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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10/16 캘 립킨, 그리고 한결같음 (2)

캘 립킨, 그리고 한결같음

Posted 2005/10/16 02:08, Filed under: 日常
나는 스포츠를 좋아한다. 남들이 하는걸 보면서 멋진 플레이에는 감탄하고, 멍청한 플레이에는 비난을 퍼붓는 것도 즐겁기 그지없거니와, 몸 쓰는걸 별로 꺼리지 않기에 직접 경기에 참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개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단연 농구고, 미식축구도 꽤나 오래전부터 좋아했다. 그에 비해 축구나 야구는 원래 내 경멸의 대상에 속했다. 한경기에 한팀이 백점씩 넣는 농구에 비해 양팀 합쳐서 다섯골이면 보기드문 골 풍년에 속하는 축구는 맥빠지기 그지없었고, 어쩌다 괴물같은 투수라도 한명 나왔다 치면 두시간동안 투수와 포수 둘이서 캐치볼 하다가 끝나버리는 야구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축구에 대해선 생각이 많이 변했다. 요샌 축구 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는 걸 알게 됐다. 2002년의 그 잊지못할 월드컵 때문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다. 전국이 붉은 물결로 뒤덮일 때, 골이 터진 후의 함성이 한강변을 뒤흔들 때, 로데오에서 밤새 사람들이 광란의 축제를 벌일 때..

..난 독서실에 있었으니까. -_-;;

2002년에 난 (축구를 경멸하던) 편집증적 고3이었고, 기를 쓰고 월드컵에 빠지지 않으려 애썼으니까.
지금 와선 그때 월드컵을 즐기지 못한게 내 평생 몇 안되는 진심으로 후회하는 일로 꼽힌다.

축구에 대해 호감이 부쩍 커진 건 다름아닌 위닝일레븐 때문이다. 몇판 하다 보니 어느 팀에 무슨 선수가 있는지도 좀 알게 되고, 그러다 보니 각국의 프로팀들과 리그에 대해서도 익숙해지고 차차 흥미를 갖게 됐다. 직접 몸으로 뛰는 건 아니지만 경기를 간접적으로나마 하다 보니 축구란 게 이런 묘미가 있는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바도 있다.

그러고 보면 게임이란 게 참 위력이 대단한 물건이다. 제아무리 삼국지를 붙들고 서너번씩 열심히 읽은 사람이라 해도, 삼국지 컴퓨터게임을 밤을 지새우면서 한 사람과 행여 등장인물 이름대기 내기라도 했다간 얼마 못가 박살이 나게 마련이지 않은가.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번 잡았다 일곱번 놓아줬는지 어쨌는지, 장료와 감녕이 서로 번갈아가며 손권과 조조를 벌벌 떨게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를지 몰라도, 올돌골이며 엄백호, 엄여 등 구석에 처박혀 있는 이름모를 장수들의 각종 능력치까지 줄줄 꿰고 있는게 게임을 오래 해본 사람들이다.

2006년 독일월드컵은 2002년보다 훨씬 더 관심있게 지켜볼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내 처지는 고3이었던 2002년 당시와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 내년 여름에는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고시생일 확률이 100%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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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으로 많이 샜는데, 원래 스포츠 이야길 꺼낸 건 캘 립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스포츠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로 수많은 위대한 선수들이 은퇴했다. 마이클 조던이 은퇴하는건 내가 본 것만 두번이고, 데이빗 로빈슨, 하킴 올라주원, 그리고 얼마전에는 레지 밀러까지. 농구뿐 아니라 미식축구도 마찬가지다. 조 몬태나, 스티브 영, 존 엘웨이, 배리 샌더스, 제리 라이스. 다들 자기 분야에서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들이다.

위대한 선수들인만큼 은퇴하는 모습 역시 감동적이기 그지없는 경우가 많았다. 조던이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 워싱턴 유니폼을 입고 시카고에 마지막으로 돌아왔을 때, 시카고에선 경기전 선발선수 소개를 할 때, 원정팀 선수인 그를 마치 자기팀 선수인 것처럼 조명을 다 끄고 열렬한 환호와 함께 소개했다. 그것도 조던이 시카고에서 뛰던 당시 항상 그를 소개했던 아나운서를 특별히 초청하면서까지.

레지 밀러의 마지막 모습도 아름다웠다. 경기종료를 앞두고 레지밀러가 벤치로 교체되어 들어가자, 상대편의 감독이 일부러 작전타임을 불렀고, 작전타임 시간 내내 관중과 양팀 선수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그를 위해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한 캘 립킨만큼 멋진 은퇴사를 남기고 떠난 사람은 없다. 캘 립킨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뛰었던 야구선수다. 앞서 길게 떠들었듯이 난 야구에 별로 관심이 없고, 그렇기에 메이저리그에 대해서도 그다지 잘 알지 못한다. 그는 2001년에 은퇴했는데,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특별히 마련된 연단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How do I want to be remembered? Well, to be remembered at all is something special. ..."
(제가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냐구요? 기억된다는 것 그 자체가 특별한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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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킨이 뛰어난 선수였음은 틀림없지만, 그는 1995년에 세운 메이저리그 기록으로 특히 유명하다. 바로 2,131경기 연속출장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이다.

2,131. 내가 알기로 메이저리그는 한해에 160개 가량의 경기를 한다. 단순 계산으로도 십삼년이 넘는 세월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기장에 나왔다는 말이 된다.

나는 닷새만 학교에 나가도 헥헥대고 주말에는 늘어져서 빈둥대기 십상인데, 립킨은 십삼년 동안 한결같이 경기가 있는 날에는 그라운드에 나섰다. 그가 매 경기마다 기가 막힌 활약을 하진 못했을지 모른다. 어떤 날은 펄펄 날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죽을 쑤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그는 경기장에 유니폼을 갖춰입고 나왔다. 이천백삼십한번이나 빠짐없이.

그 성실함에 절로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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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인간은 시간을 자르고 쪼개서 관리하려고 드는 유일한 동물이라지만, 결국 압도적인 힘으로 밀려오는 시간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고 만다. 시간에 휩쓸리면서 사람은 변하고, 잊어버린다.

그렇기에 밀려오는 시간의 파도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의연히 버티는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가. 변덕에 몸을 내맡기지 않는 꾸준함, 성실함.
한결같음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며, 유한한 인간으로서 시간의 영원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 하나 이겨보려고 바락바락 애를 쓰는 찌질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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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치가 사라지는 상대주의의 시대라지만, 성실함만은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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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Justine 2005/10/22 02:39 Delete Reply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침표를 찍는다는거, 정말 멋진 일이면서도 어려운 일인것 같아.
    확실히 "영웅"을 만들줄 아는 미국스포츠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더 많은건 사실이네. "From North Carolina, 6-6,.."의 감동은 확실히 평생 잊지 못할듯.. 참, 최근 우리나라에선 허재가 은퇴무대에서 한 덩크도 정말 멋졌었는데..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개근상을 못타본 나한테 립켄 주니어나 AC그린 같은 사람들은 그저 경외스러울뿐..

    (영웅에게 마지막 올스타전 결승홈런을 선물했던 찬호 오라버니에게도 박수를!)

  2. # 가넷 2005/10/24 12:06 Delete Reply

    짧게 소개해준 실화들만 보고도 감동이 밀려오는구나.
    기회 있을때마다 감동적인 얘기들 올려줄 순 없는지?
    어디 그런 얘기들만 모아놓은 글 없으려나...
    정말 감동이 뭔지 아는 사람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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