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마이클 키튼이었다. 위로 치켜올라간 눈썹, 굳게 다문 입가에 패인 주름. 키튼은 결코 편안한 인상을 주는 배우가 아니었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갈라져 나왔다. 과거의 악몽에 시달리는, 심기가 불편한, 불안정한 인간. 브루스 웨인에 그는 잘 어울렸다.
그 다음에는 발 킬머였다. 키튼의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던 물론이었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입술이었다. 알다시피 배트맨은 입술 빼고는 얼굴 전체를 가면으로 가리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브루스 웨인은 입술이 특이하기 그지없게 생긴 사람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만약 브루스 웨인이 발 킬머같은 입술을 하고 있었다면, 정체를 숨기고 배트맨 짓을 하고 싶었다면 다른데는 다 드러내놓더라도 입술만큼은 반드시 가리고 악당을 때려잡으러 다니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브루스 웨인은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조지 클루니가 역을 맡았다. 키튼의 분위기 같은건 아무래도 좋았다. 킬머의 입술만 아니면 됐다. 그점에선 일단 클루니는 합격이었던 셈.
그러나 아무래도 브루스 웨인하고 클루니는 통 어울리지가 않았다. 가면을 벗은, 바람둥이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 역에는 어느정도 어울렸을지는 몰라도, 밤의 기사 배트맨에는 영 어색했다.
2005년, 크리스찬 베일이 브루스 웨인으로 나타났다. 썩 괜찮다. 입술이 잘생긴 것도 큰 장점이고, 약간은 우수에 깃든 듯한 표정도 좋다. 마이클 키튼같은 배트맨이 다시 나타나는건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터. 그래도 크리스찬 베일은 브루스 웨인으로 흠잡을 데가 별로 없다.
처음에는 팀 버튼이었다. 고담시는 어둡고, 기괴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 - 다시 말해 팀 버튼의 전매특허 분위기(크리스마스의 악몽을 한번 생각해 보라) - 를 풍겼다. 배트맨은 만화를 통해 우리에게 낯익은 남색/회색/노란색의 타이즈 대신, 온통 시커먼 색으로 뒤덮였다.
그걸 조엘 슈마허가 이어받았다. 그는 고담시를 발랄한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번쩍이는 총천연색 복장을 한 로빈이 마침 등장했고, 배트맨도 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덩달아서 그의 옷을 번쩍거리는(그리고 푸른색이 필요이상으로 가미된) 소재로 바꿨다. 도시 전체가 무슨 카니발이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슈마허는 자기 스타일대로 한 것일 뿐이다. 문제는 그 스타일이 배트맨 영화에는 꽝이라는 것. 슈마허는 [오페라의 유령]처럼, 총천연색의 화려함이 필요한 영화만 만드는 편이 낫다. (흑백의 현재를 호화찬란한 과거가 뒤덮어 버리던, 오페라 하우스에 빛깔이 되살아나던 그 인상깊은 첫장면을 생각해보라)
2005년, 슈마허의 손을 거치고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던 배트맨 시리즈는 [메멘토]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에게 넘어갔다. 내가 [메멘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당연히 놀런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제발 박쥐씨를 살려내다오.
[배트맨 비긴즈]의 배트맨은 사실적이다. 만화에서 배트맨을 보면서 우리는 종종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다. 바로 배트맨은 슈퍼맨처럼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외계인도 아니요, 스파이더맨처럼 몸이 변형된 초능력자도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배트맨은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물론 돈은 많다 -_- 사실 오늘날 사회에서 돈 많다는건 그 자체로 힘을 의미하긴 하지만;) 방탄복을 입고, 줄타기용 총과 표창 등 쓸만한 장비로 무장했다 뿐이지, 브루스 웨인이 눈에서 레이저가 나간다거나 손에 빨판이 달려서 벽을 타고 돌아다닐 수는 없다. 초능력자가 아닌 보통 사람인 이상, 아무리 수련을 통해 무예를 닦았다 한들 이소룡만큼 세지기도 어려운 노릇일 거다.
그러니 배트맨이 총든 놈들이 우글거리는 악당 소굴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 이리 찌르고 저리 차며 수십명을 때려눕히고 유유히 되돌아나오는 장면은, 상상해 보면 통쾌하기는 하겠으나 결코 현실성이 있다고 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슈퍼맨/스파이더맨/엑스맨/헐크 등 초능력자라면 몰라도, 브루스 웨인한테는 미안하지만 무리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는 있어도 때려눕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사정이 이렇다고 해도, 원래 나쁜놈들은 떼지어 다니길 좋아하니 배트맨도 혼자서 여럿을 상대해야 할 일이 심심찮게 있을 건 분명하다. 만일 당신이 배트맨이라면 어쩌겠는가?
뒤에서 기습하고, 숨어있다가 한놈한놈씩 낚아채서 처리하고, 휙 나타났다 휙 사라지길 반복하고. 이러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게 [배트맨 비긴즈]의 배트맨이 취하는 수법이다. 영화 내내 배트맨이 전면에 등장해서 여러명을 현란하게 때려눕히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격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대부분 어둠 속이라 관객은 배트맨의 모습조차 제대로 분간해내기 어렵다. 배트맨이 활약하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부두에서 팔코니의 부하를 덮칠 때인데, 대여섯 명의 적이 한명 한명 어디론가 끌려가 쓰러지는 동안 배트맨의 모습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망토를 편 배트맨은 꽤나 폼난다
영화 속에서 팔코니가 잘 지적했듯이,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걸 두려워하는' 법.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적이 나를 두려워하게 만든다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다. 브루스 웨인은 이 점을 간파했고, 그래서 그는 브루스 웨인이라는 사람이 아닌 '박쥐'라는 상징이 되기로 한다. 상징은 아파하지 않는다. 상징은 죽일 수도 없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그가 하늘을 난다는게 사실일까" 박쥐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거치면서 신화가 된다. 이제 웬만한 좀도둑은 굳이 힘들여서 두들겨 팰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박쥐가 나타나기만 해도 벌벌 떨고 꽁무니를 뺄 테니까.
[배트맨 비긴즈]의 사실주의는 이제까지 잘 빠진 스포츠카로만 등장했던 배트카를 장갑차로 바꾸어 놓은 데서도 드러난다. 장갑차가 스포츠카보단 훨씬 배트맨에겐 '합목적적'이라는 건 당연한 일. 게다가 미사일까지 나가 주면 이건 뭐 할말 다 한 셈이다.
잠복/기습형 전투방식, 배트카와 더불어 놀런의 사실주의적 터치가 기가 막히게 발휘된 건 배트맨 호출용 조명등이다. [배트맨 비긴즈] 끝자락에 첫선을 보이는 배트맨 호출신호는 구름낀 하늘에 희미하게 뜬다. 저게 배트맨 마크인지 뭔지도 잘 모를 정도다. 만화에서는 물론이요 이제까지 나왔던 영화에서 배트맨 호출신호는 허공에 영사기 스크린이라도 걸어놓은 듯, 밤하늘에 페인트질이라도 한 듯 깨끗하고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어디 될 법한 일이던가.
클라이막스에 거대한 규모의 화려한 액션 장면 하나가 나온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되는 게 아니요, 거물급 스타 배우가 떼로 출연한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시의적절하게 등장하는 재치있는 대사 하나, 장면 하나가 관객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다. [배트맨 비긴즈]는 작은 것들의 힘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 내내 사용되는 기법 중의 하나는 영화 초반에 나왔던 짤막한 대사를 후반부에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다. 듣기에는 같은 말 한마디지만, 그것이 두번째로 등장할 때는 처음 그 대사가 나왔던 때 그 말이 품었던 의미를 간직한 채 현재의 상황에 나타남으로써 의미효과를 배가시킨다.
처음 등장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에서 다시 반복됨으로써, 그 때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때보다 더 힘을 불어넣어주는 말. (어린시절 박쥐동굴 입구로 떨어진 브루스 웨인에게 아버지가 말해주고, 나중에 불길을 피해 엘레베이터를 타고 박쥐동굴로 떨어져내린 배트맨에게 알프레드가 다시한번)
"브루스, 사람이 왜 떨어지는 지 아니? ...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세우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야. (Why do we fall, Bruce? ... To learn to pick ourselves up.)"
처음과 비슷한 상황에서 반복되고, 처음에는 별 효과를 보지 못한 말이었지만 바로 그 '똑같음', '변하지 않음'으로 인해 두 번째에는 강한 의미효과를 갖게 되는 말. (방황하는 브루스 웨인에게 알프레드가, 그리고 7년 후 위기에 처한 브루스 웨인에게 다시 알프레드가)
"아직도 날 포기 안했군요? (Still haven't given up on me, have you?)"
"...절대로.(...Never.)"
(마이클 케인이 얼마나 맛깔스럽게 Never 라고 내뱉던지!)
처음과 완전히 역전된 상황에서 반복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반복'으로 인해 '전복'을 나타내 주는 말.(처음에는 웨인社의 CEO가 폭스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폭스가 그 CEO에게)
"..메모 못 받았나? (Didn't you get the memo?)"
시리즈물의 경우, 다른 영화에 비해 작은 것으로 큰 효과를 거두는 데 유리하다. 전편의 내용을 넌지시 상기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 밤을 새워가며 흑태자와 칼스의 활약을 지켜본 사람들은 속편에서 아수라와 멸살지옥검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전율하고, 스타워즈의 팬들은 베이더의 쉭쉭거리는 숨소리만 듣고도 눈물을 흘린다. [배트맨 비긴즈]의 마지막 장면에서, 트럼프카드가 나타났을 때, 그리고 카드를 뒤집자 조커가 나타났을 때, 배트맨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짜릿하지 않았겠는가?
...
케이티 홈즈는 영화 내내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건 홈즈 자신의 탓이라기보다는 그 배역 자체 때문이었을 것이다. 슈퍼히로 영화에서 주인공의 상대역은 언제나 별 무게없는 공허한 역할이 될 수밖에 없는 걸지도. 그 외의 배우들 - 마이클 케인, 리암 니슨, 게리 올드만, 모건 프리먼 - 은 저마다 자기 역을 잘 소화해냈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건 싸이코 정신과 의사를 연기했던 킬리언 머피. (사실 누구보다 훌륭했던 건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려진 박쥐들(지원군!)이었지만)
배트맨 시리즈는 부활했다. [배트맨 비긴즈]의 성공을 발판으로 앞으로 새로운 배트맨 영화가 계속 나올 가능성이 크다. 나로선 제발 크리스토퍼 놀런이 계속 감독을 맡아줬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2005/08/07 15:34
정말 좋았지요 비긴즈 ;ㅅ;
저도 대사 반복하는 게 정말 너무 좋았던지라, 반가워서 답글 남깁니다 ^^
2005/08/12 16:26
비긴즈가 아마도 스타워즈를 제외하곤 올여름 제가 본 영화중 제일이 아니었을지. ㅎ
써놓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까, 대사 반복되어 나오는게 저거 말고도 몇개 더 있었던 것 같네요. 여튼 인상적이었습니다.
2005/08/12 23:03
2005/08/15 04:13
2005/08/17 10:40
종현./2009 로스트메모리즈 이야기도 한번 들어볼테냐?
2005/08/19 2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