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본 영화는 우디 앨런의 '애니 홀'이었다. 난 우디 앨런의 영화를 하나도 본 적이 없고, 그래서 이런저런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최고작으로 꼽는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는 선택했다. 영화는 웃기려고 애쓰지 않지만 기가막히게 웃기고, 로맨스를 다루지만 오버하지 않고 담담하다. 그냥 쉴새없이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우디 앨런이 나올 뿐이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에 대한 언급도 상당히 나온다. 왜 이 영화가 그토록 대단하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썩 마음에 들었다.
말 많이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중에 듣는게 재미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디 앨런은 수다를 엄청스레 떨지만, 그는 말을 재밌게 하는 사람에 속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문득 영화 하나를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쉴새없이 이야기하던, 그리고 너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던 그 두사람.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또 듣고 싶었다. 그래서 '비포 선셋'을 다운받았다.
아무리 오랫동안 어떤 사람과 함께 있어도 별 할말이 없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예 별 말이 필요없는 경우도 있고, 처음 만났지만 끊임없이 할 말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모건 프리먼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서로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관계다. 그리고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의 제시와 셀린은 서로에게 계속해서 할 말이 생기는, 그런 관계다.
'비포 선라이즈'나 '비포 선셋' 모두, 오버하지 않는 영화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불치병으로 창백해져서 죽어가는 가운데 그 주인공의 상대역을 비롯한 모든 출연배우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 주변에서 너무 많이 볼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훨씬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둘 중에 하나만 봐야 한다면 '비포 선라이즈'를 보는게 낫겠지만,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나서 보는 '비포 선셋'이야말로 아름답다. 전편의 무게가 후편에 고스란히 실린 채 몇배는 증폭되니까.
지난주에 보고 나서 바로 '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 합본 디비디를 주문했는데, 오늘 집에 다시 와 보니 책상위에 소포가 놓여 있다. 포장을 뜯고 이 장면 저 장면 건너뛰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비포 선셋'의 첫장면이야말로 최고다. 과거의 순간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다가 진짜 셀린이 나타나는 그 장면.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를 세 편 본 셈인데(나머지 하나는 '스쿨 오브 락'이다), 세 편 다 아주 마음에 든다.

2005/10/23 01:49
2005/10/27 20:38
2005/10/29 21:01
한마디만 더 하자면, 보통 속편을 볼 때에는 전편과 어떤게 재미있나 비교하면서 보게 되는게 인지상정인데, (가령 황비홍 과 황비홍 2 등을 볼 때...) 비포 선셋과 비포 선라이즈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데에 특징이 있지. 이 영화는 삶 그자체기 때문에. 9년전의 우리들의 어떤 날이 9년후의 우리들의 어떤 날보다 더 '재미있었다' 고 이야기 할 수 없듯이... ㅋㅋㅋ
PS. 내 홈피에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느낀 감동을 쓴 어처구니없는 감상문이 있음..니 졸업사진날의 사진도 볼 겸 들르드록! ㅋㅋ
2005/10/29 21:05
2005/11/03 18:08
영재의 비유 매우 맘에 드는데.
9년전의 어떤 날이 9년 후의 어떤 날보다 더 재밌었다고 히야기할 수 없듯이..라..
둘다 글을 참 잘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