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는 만족을 얻지 못하고 무의식으로 억압된 욕망이 억압을 피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증상이라고 보았다. 성적 충동의 에너지인 리비도는, 금지에 부딪치고 욕망의 충족이 좌절될 경우 에너지를 배출시킬 수 있는 어떤 다른 출구를 찾아야만 한다. 증상은 결국 깊숙이 감추어진 것에 대한 일종의 대용물[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 강의, 열린책들, 2002, pp.380~381 참조.]인 것이다. 신체의 일부가 갑자기 마비되거나, 다른 모든 신체기능은 정상인데 유독 언어 장애만 나타난다거나 하는 등의, 이른바 히스테리 증상의 원인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규명되었다. 따라서 감추어져 있는 것, 억압되어 있는 욕망을 환자로 하여금 드러내게 함으로써 증상은 해소될 수 있었다.

초기에 프로이트는, 증상 형성이 환자의 어린 시절의 체험과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점을 임상 경험을 통해 확인하고, 어린 시절의 외상적 체험, 이른바 ‘원초적 장면’이 증상을 형성하는 원인이 된다는 가설을 세웠다. 유아기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거세위협, 부모로부터 유혹당한 경험 등이 무의식 속에 자리를 잡은 채 증상형성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임상 사례를 통해 프로이트는 그러한 외상적 체험이 많은 경우 실제로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그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는 ‘원초적 장면’은 환자들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초적 장면’이 실제로 일어났었는지 아니면 단지 환상에 불과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심리적 결과물 역시 일종의 현실성을 지니는 것이며, 이는 한 개인에게는 실제 체험, 즉 물리적 실재보다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심리적 실재[자끄 라깡의 ‘환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라는 말은 심리적 실재가 갖는 중요성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로서 받아들여진다. “신경증의 세계에서는 심리적 실재가 결정적”인 것이 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Op.Cit., pp.495~506 참조.]
[엄밀히 말한다면, 어떠한 기억도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지 않다. 모든 기억은 왜곡의 산물이다. 역사적 사건은 그 사건을 경험한 주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왜곡되어 머릿속에 저장되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은 같은 사건을 겪은 여러 사람들의 기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거세공포증은, 아버지가 실제로 아이에게 어머니에 대한 욕망의 단념을 요구하며 거세 위협을 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어느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에게 그와 같은 위협을 직접적으로 할 수 있겠는가? 별다른 의도 없이 한 말 한마디, 혹은 어떤 일상적인 사건 하나가 어린 아이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으며, 이러한 인상이 환상 속에서 부풀려지고 변형되어 ‘진정한 거세위협의 체험’으로 구성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꼬마 한스의 사례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스의 엄마는 결코 한스에게 진정으로 위협을 가한 적이 없다. 그저 ‘만지지 마라’ 정도의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이 한스에게는 거세공포증, 나중에는 말에 대한 공포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영향을 미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꼬마 한스와 도라, 열린책들, 2002 참조.]

호프만의 소설 ‘모래사나이’에서 주인공 나타니엘이 겪은 어린 시절의 사건 역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소설 전반에 걸쳐 신비스러운 요소가 산재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히나 도입부에 등장하는 나타니엘의 편지글은 비현실적인 점이 너무 많아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시커먼 구멍만 남은 사람의 얼굴이 나타난다거나, 코펠리우스가 어린 나타니엘의 눈에 새빨간 재를 뿌리려고 했다거나, 나타니엘의 손과 발을 떼었다가 다시 붙여놓았다거나 하는 등의 묘사[E. T. A. Hoffmann, Tales of Hoffmann, Penguin Books, 1982, pp.91~92 참조.]가 갖는 비현실성은 명백하다. 게다가 객관적 관찰자의 시점에서가 아닌, 나타니엘 자신의 시점에서 쓰여진 편지글을 통해 이러한 내용이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이와 같은 사건이 나타니엘의 환상의 산물이라는 프로이트의 지적[Sigmund Freud, "The Uncanny"(1919), SE 17, pp.227~228 참조.]이 매우 설득력을 갖는다.

프로이트가 분석한 것처럼[Ibid., pp.227~232 참조.], 나타니엘은 유모가 이야기해 준, 어린아이들의 눈알을 뽑아 간다는 모래사나이의 이야기에서 심한 충격을 받았고, 나타니엘의 거세공포증은 이 이야기와 결합해서 형성되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눈알이 뽑힐지도 모른다’는 관념이 나타니엘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끊임없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음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타니엘이 스스로 써 놓고도 ‘이게 대체 누구의 끔찍한 목소리인가!’라고 놀라움을 표시한(그럼으로써 무의식의 작용을 의미심장하게 암시한) 시에도 눈이 뽑히는 모티프가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나타니엘은 코폴라가 내 ‘좋은 눈! 좋은 눈!’이라고 외쳤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는 반응을 보이고, 급기야 올림피아의 눈알이 뽑힌 것을 보고는 미쳐버리고 만다. 망루 위에서 돌연 나타니엘을 발작하게 한 것 역시 망원경을 통해 무엇인가를 본 행위였다. 결국 나타니엘이 첫 번째 편지글에서 이야기한 사건이야말로 나타니엘의 ‘원초적 장면’인 것이다. 그리고 코펠리우스는 아버지의 나쁜 측면, 즉 자신에게 거세 위협을 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징한다. [Ibid., p.232.]

그러나 이와 같은 프로이트의 설명에 동의한다고 하면, 중대한 의문점이 떠오르게 된다. 나타니엘은 대체 왜 이러한 환상을 만들어냈는가? 이는 심리적 실재 개념을 인정할 경우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의문이기도 하다. 사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세위협을 환상 속에서 만들어내고, 이로 인해 거세공포증 속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왜 신경증자는 환상을 통해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거세위협을 있었던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신경증자가 거세위협을 환상을 통해 만들어내는 이유는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어머니와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와 동시에 어머니로부터 분리하고자 한다.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가로막는 아버지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의 구조 속에 완전히 매몰되어 자신의 욕망을 갖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완전한 만족을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어머니와의 결합 역시 근본적으로 결핍된 주체를 채워줄 수 없다. 아버지가 나를 거세하려고 한다는 환상,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와 경쟁하고 있다는 환상이야말로 완전한 충족을 줄 수 있는 욕망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다. 주체에게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거세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결핍에 대한 인정이다. [페터 비트머(홍준기·이승미 옮김), 욕망의 전복, 한울아카데미, 1998, pp.138~161 참조.] “상징적 거세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아버지의 금지명령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 더 편하다.” [Jacques Lacan, Le Séminaire VII, p.354. (Ibid., p.160에서 재인용.)]

나타니엘은 아버지의 금지명령을 필요로 했고, 그렇기 때문에 거세위협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나타니엘의 아버지는, 비록 그에 대한 묘사는 소설 속에서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매일 저녁 아이들을 불러 앉혀놓고 기묘한 이야기를 해 주는 데 열을 올리는, 자상한 성격의 사람이다. 게다가 저녁때가 아니고는 아버지는 일 때문에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약간의 대담함을 무릅쓴다면, 나타니엘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너무 잘해주는’ 아버지였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타니엘에게 금지명령을 내리고 나타니엘을 그 유아적 욕망의 대상인 어머니로부터 분리할 수 있게끔 하는 역할을 나타니엘의 아버지는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타니엘은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위협을 코펠리우스라는, 원래부터 매우 불쾌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사람으로부터 찾았다. 모래사나이 이야기로부터 얻은 충격과 코펠리우스에 대한 불쾌감과 두려움이 결합하면서, 나타니엘의 환상 속에서 코펠리우스는 아버지가 하지 못한 아버지의 역할을 떠맡는 대체물이 된 것이다. [나타니엘의 공포증은 꼬마 한스의 경우와 유사한 점이 많다. 한스는 말에 대한 공포증에 시달렸는데, 라깡은 이와 같은 공포증의 원인은, 한스가 말을 아버지의 대체물로 생각한 데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스 아빠는 한스와 엄마를 분리하지 못함으로써 한스의 불안을 증폭시켰고, 이는 한스의 말 공포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브루스 핑크(맹정현 옮김), 라캉과 정신의학, 민음사, pp.282~283 참조.]

비록 그의 거세공포증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고, 그가 의욕한 것이었다고까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니엘은 그와 같은 공포증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된다. 나타니엘의 분리는 끝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여 정신병적인 이자관계를 벗어나 상징계에 진입하여 삼자관계를 이루는 것이 ‘정상적인’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라깡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나타니엘은 아버지의 금지를 거세위협의 형태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타니엘은 완전한 만족을 주는 대상을 찾고 그것에 집착하는, 정신병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클라라와 올림피아를 대하는 나타니엘의 태도는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클라라는 욕망을 가진 주체이다. 따라서 그녀는 나타니엘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나타니엘의 신비주의적 성향을 차갑게 비웃기도 하고, 그가 생각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타니엘 역시 그녀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욕망의 구조를 가진 주체들간의 만남은 언제나 이렇게 일정한 불협화음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들 사이에는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그와 같은 상황을 참지 못한다. 그는 완전한 합일을 원하고, 자신의 욕망이 전부 채워지길 바란다. 그런 그에게 있어 올림피아는 완벽한 만족을 줄 수 있는 대상이었다. 올림피아는 욕망을 가진 주체가 아니다. 그녀는 아무 의미도 없는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타니엘은 정확하게 자기가 원하는 바를 올림피아 안에 투사해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다. 나타니엘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는 올림피아,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E. T. A. Hoffmann, Op.Cit., p.118.]인 올림피아는, 사실상 자기 자신에 불과하다.

결여된 주체에게 완전한 만족, 결핍의 제거는 불가능하다. 타인의 욕망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형성하고, 무의식에 의해 분열되어 있는 주체는 서로간의 결핍을 인정하면서 부분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완전한 만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코펠리우스 같은 악마를 만들어 내면서까지 외면하고 싶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외면이 도를 지나쳐 올림피아와 같은 인형에 리비도를 투사해서 완전한 만족에 집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으로 자신의 빈 곳을 채우려고 하는 헛된 노력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남는 것은 나타니엘과 같은 파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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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0 23:44 2004/11/10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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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necent
    2004/11/10 23:45
    이것 역시 숙제로 써낸 글.
    왠지 블로그가 점점 과제 저장소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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