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껍질

주절주절 Posted at 2004/09/27 20:19
하드커버 책은 보통의 경우 빳빳한 책껍질로 싸여져서 나온다. 책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책의 진짜 표지(말 그대로 '하드'한 '커버' 부분)와는 달리 책껍질은 화려한 디자인으로 책을 더 멋지게 보이게끔 하는 역할을 한다. 딱딱한 책의 표지에 이것저것 색을 넣고 꾸미는 것보다는 종이에 디자인하는 게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책은 페이퍼백, 즉 문고판보다는 하드커버(양장본)을 더 좋아한다. 손에 잡히는 묵직한 느낌 때문에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우쭐한 기분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문고판을 쥐고 있을 때보다 진지하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에 독서하는 마음가짐을 잡는 데도 양장본이 더 낫다.

손에 잡히는 느낌만 놓고 보자면, 껍질을 벗기는 편을 더 좋아한다. 미끌미끌한 종이의 감촉보다는 딱딱한 커버의 오돌토돌함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쥐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으면 책을 더 많이 쥐고 있으려 들 테고, 많이 쥐고 있으면 자연히 그 안에 써져 있는 글씨를 들여다보는 시간도 늘어날 테니 꿩먹고 알먹고인 셈이다. 그래서 난 하드커버를 읽을 때는 껍질을 벗겨놓는다. 그렇지만 껍질도 책의 일부요, 책을 온전히 보관하고 싶은 마음도 크기 때문에 읽지 않을 때는 다시 껍질에 싸둔다.

그런데 그렇게 껍질을 벗겼다 씌웠다를 하다 보면, 정말로 껍질을 벗긴 편이 훨씬 더 예뻐서 내내 벗겨놓고 싶은 책이 있는가 하면, 책의 껍질에는 디자인이 잘 되어 있지만 속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서 밋밋하기 그지없는 책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책세상에서 나온 니체 전집 중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다. 껍질은 빨간색 바탕에다 니체 얼굴도 그려넣는 등 나름대로 신경을 쓴 것 같지만, 멋지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정말 멋진 건 껍질을 벗긴 겉표지다. 회색 바탕에 선명한 빨간색으로 책 제목, 전집 권수, 출판사 이름을 새겨 놓았다. 회색과 빨간색의 조화가 그렇게 예쁠 수 없다. 전집을 전부 모아서 껍질을 벗긴 상태로 꽂아 놓으면 보기만 해도 흐뭇할 것 같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프로이트 전집은 책세상 니체전집과는 정반대의 경우다. 프로이트 전집의 경우 껍질이야말로 멋진 디자인을 자랑한다. 전집의 각 권마다 프로이트의 각기 다른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매 권마다 한가지 톤의 색깔을 사용했다. 화가 고낙범씨가 특별히 디자인했다고 하는데, 껍질의 그림들만으로도 충분히 소장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껍질을 벗겨놓고 나면 김이 빠진다. 밋밋하기 그지없는 아이보리색 바탕에, 흰색으로 글씨를 새겨놓았다. 바탕색과 글씨색이 비슷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니체전집처럼 색 배합만 잘 해도 얼마든지 예쁜 책을 만들수 있다는 걸 몰랐을까?

그런가하면 이런 책도 있다. 박영사에서 펴낸 소위 말하는 法書라는 것의 하나다. 껍질 디자인이 화려하지도 않고 멋대가리없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교과서를 휘황찬란하게 디자인할 필요도 사실 없고, 내용은 딱딱하기 그지없는데 껍질 디자인만 발랄하면 그 또한 이상하다. 그냥 일관성있게 딱딱한 편이 차라리 낫다. 그러나 껍질을 벗겨 보면 이건 좀 너무하다 싶다. 정면에 책 이름도 안 써놨다. 측면에 책 이름과 저자, 출판사 이름이 찍혀 있긴 하지만, 대체 왜 책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면에는 아무것도 안 써놓은건지? 여백의 미를 강조하는건가?

때문에 난 법서는 꼭 껍질에 싼 채로 비닐로 한번 더 싸서 들고 다닌다. 자주 들춰보고 들고 다니고 하다 보면 책이 쉽게 닳기 때문에 비닐로 한번 더 싸 주는건 필수다. 비닐로 싸는 대신, 어차피 너덜너덜해지는 껍질을 벗겨버린 채 들고 다니는 친구들도 있지만, 껍질 벗긴 모양이 저래서야 그렇게 할 마음이 안생긴다.

이 책은 나남출판에서 나온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인데, 상당히 독특하다. 껍질을 씌워놓으나 벗겨 놓으나 디자인에 전혀 차이가 없다. 특이한 건 분명하지만, 저렇게 하드커버에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 어쩔수 없었는지는 몰라도 커버 표면이 매끈하게 처리되어 있다. 하드커버 특유의 질감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러니 저 책도 그냥 껍질 싸 놓은채로 읽는 편이 낫다.

사실, 책은 그 안에 든 내용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요, 표지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다. 그렇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책이 예쁘면 아무래도 손이 더 가게 마련이고, 어차피 읽을 거라면 멋있는 책이 기분이 더 좋은 건 당연하다. 하드커버 책껍질을 벗겨서 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선, 출판사들이 니체전집처럼만 책을 만들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그다지 힘든 것도 아니다. 색깔 배합을 잘 고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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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7 20:19 2004/09/2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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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차피양-ㅗ-
    2004/09/27 20:48
    저는 책을 험하게 다루는 편이라 책을 사고나면 항상 껍질을 벗기는 편인데, 제가 산 책중에는 안이 예쁜게 별루 없더라구요. 출판사들이 껍질 안에 신경을 많이 써줬으면 좋겠어요. 정말! 그런데 법서를 읽으시다니, 법학생이신가 봐요.
  2. onecent
    2004/09/28 21:31
    어차피양-ㅗ-/ 정말 출판사들이 껍질 안에도 신경을 써줬으면 책읽는 사람들한테는 참 좋은 일일텐데 말입니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매출이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죠. 그리고, 저는 법학생이 맞긴 맞습니다.
  3. 초학구파
    2004/09/30 03:31
    에크리 하드커버에 대한 기대감을 저런 식으로 표출하는건가.
  4. 딸기
    2004/11/05 21:53
    난 책표지 집착쟁이야. 책이든 노트든 귀퉁이 해지는 건 절대절대 못 참아. 그래서 속이 아무리 예뻐도 꼭!껍질이 있어야 해~
    근데 저 헌법학은 정말 너무하지 싶다;; 한번도 벗겨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네~
  5. 이경호
    2004/12/04 17:15
    디자인 계열인 일본이 강국.
    하지만 정작 일본 책 중에 하드커버책은 그 미칠듯한
    가격의 압박으로 살 일이 없다는게
    (아니 불가능하다는게 좀 더 사실적이겠군)
    슬프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