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서 뭐 하고 싶어요?”
처음 만나는 선배와 인사만 나누고 나면, 그리고 약간 진지한 이야기가 시작될 타이밍이다 싶으면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저 질문.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오십 명도 넘는 사람들이 전부다 묻기 시작하면 피곤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지겹다, 이제.
선배들도 뭐 저걸 꼭 물어보고 싶겠는가. 우리들도 새내기 시절에 식상하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다. 그렇다고 아무 이야기도 안 하자니 뻘쭘하고. 화젯거리는 잘 안 떠오르고. 제 살 발라먹는 심정으로 오늘도 또 묻는다. 법대에 왜 왔어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질문이 식상하고 지겹다는 것이 결코 저 질문의 중요성까지 깎아먹는 건 아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나한테 저 질문을 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저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찾아보고 해야 진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진로’라고 딱딱하게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 실체는 자신이 지금 이 시간 무엇을 하고 어떤 것을 보고 들으며 생활하며, 또 내일은 어떤 경험을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고민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닐까.
공부에만 매달리는 중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어떤 일을 정말로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주변의 일부 친구들은 일찌감치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매진하기도 한다. 부러운 일이다. 디즈레일리라는 사람이 ‘어린 시절 자신의 할 일을 찾아낸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했다지 않은가. 현재 법대에 새로 들어온 새내기 중에도 분명히, 법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흥미 때문에 지원한 사람이 존재할 것이다. 법률가가 되어 자신의 꿈을 펼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법대에 왜 왔어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다.
문제는 그처럼 앞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다. 시험을 봤더니만 점수가 남아서 그냥 법대에 들어온 사람부터 시작해서, 법대라는 간판이 가지는 중요성 때문에 지원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능력을 확실히 인정받고 싶어서 지원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들에게 있어서는 대학 입학 후가 자신의 앞길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보다 대학이 진로 탐색의 장소로서 더 좋다는 데는 이견이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방대한 분야의 지식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고, 온갖 활동들에 마음대로 참여할 수 있다. 1학년 때 주로 듣게 되는 교양과목의 이름들만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인간과 우주’에서 시작해서 ‘문학과 정신분석’ 까지. 한쪽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배우고, 다른 쪽에서는 프로이트를 읽고 있다. 또 방학은 오죽 긴가.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을 훌쩍 떠났다가 돌아올 수도 있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이러한 가능성을 치열하게 시험해 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주변을 둘러 보면, 다른 전공을 선택한 학생들에 비해 법대생들은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적다는 생각이 든다. 인문대학이나 사회대학 학생들은 보다 세분화된 전공에 다시 지원하는 과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진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도 하거니와, 법대생들에게는 ‘사법시험’이라는 너무도 가시적인 목적이 최후방어선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진로니 뭐니 하고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않는 대신, ‘한 일이년쯤 신나게 놀다가 사법시험 공부 시작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스며들기 시작한다. 입학할 때는 온갖 가능성이 열려 있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가능성은 모조리 닫혀 있다. 그러다 보니, 법대생들에게 있어 교양수업이 대부분인 1학년 시절은 ‘다시 죽어라고 공부 시작하기 전에 놀만큼 놀아보는 시간’이 되어 버리는 것 같다. 1학년을 지내면서 자신이 진짜 그렇게 생각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가만히 앉아서 1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되어 버린다. 이래서는 억울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처음 지원할 때부터 자신의 갈 길을 사법시험과 법률가로 정해 놓은 사람이라면 예외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가능성이 모조리 닫혀 버린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나’에 대한 고민이다. 대학에 오면 온갖 고민을 하게 된다. 사회에는 문제가 들끓고 있고, 그 하나하나 치열한 고민을 요구한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머리 아픈 일이다. 인간관계는 또 왜 그리 어려운지.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사실 ‘나’에 대한 고민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생각 없이 앞서 말한 저 많은 고민들을 치열하게 해 봤자 그건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를 목적으로 삼을 때에만 다른 활동은 가치를 지닌다. 자신을 자기 자신 아닌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면 과연 그건 행복한 것일까. 행위의 목적은 바깥이 아닌 안에 있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가능성을 어떻게 시험해 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건 사실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고민 자체가 ‘현재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불안한 무규정 상태를 인정해야지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안함과 직면하느니 ‘저것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가시적이고 뚜렷한, 그래서 너무도 유혹적인 대상을 붙들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 훨씬 편안한(당장은) 일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뭘 할 것인가 고민하느니 속 편하게 놀다가 사법시험에 매달리는 게 더 쉽다. 대상을 붙들고 집착하는 건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양식이니까(쿨럭;). 그러나 중요한 건 ‘저것만 하면 다 해결되는’ 목적이란 애시당초 말짱 헛것이라는 사실이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 친구로부터 ‘차라리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히 정해져 있는 고등학교 때가 좋았다’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다 해결해 줄’ 목적은 대학교 합격이었다. 정작 그 목적을 이루고 나서야 그 목적의 전지전능함이 허구였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허구를 간파하지 못한다면, 영화 [메멘토]에서 엉뚱한 John G를 계속해서 죽이는 레너드와 다를 바 없게 되지 않을까.
진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사법시험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는 듯하다. 사법시험을 부정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시험 준비와 합격이 부정적일 이유는 전혀 없다. 법률가는 사회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고, 더 나아가 법률지식은 굳이 법률가 아닌 사람이라도 법치국가를 살아감에 있어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사법시험에 휩쓸리는 것이다. 굳이 휩쓸리는 대상이 하필 사법시험인 것은 우리가 법대생이기 때문이지, 사법시험이 특별히 맹목성을 조장하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다.
열려 있는 가능성을 외면하지 않는 것, 자신의 불안함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 갑자기 자유가 찾아온 대학생활을 그나마 좀 괜찮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이런저런 행사에 참가해 보고,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셔도 보고, 밤잠을 희생하고 공상의 나래를 펼쳐본다거나, 지쳐 쓰러지도록 운동을 한다거나, 미친 척하고 미친 듯이 공부를 해본다거나(;;;;) 등등.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고 해 볼 수 있는 시간도 넉넉하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항상 목적은 바로 ‘나’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리고 경험을 쌓으면서 어떻게 ‘나’를 그릴 것인지 생각한다면 ‘이것저것 하는 건 많고 시간은 없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어딘가 허전하고 허무해 견딜 수 없는’ 감정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원을 그리는 방법은 두 가지다. 종이의 나머지 부분이 죄다 칠해져서 원이 남겨질 것인가, 아니면 종이에 원을 직접 칠할 것인가.
자, 이제 제 살 발라먹는 심정의, 할말 없어 뻘쭘한데 이야기는 해야겠는, 같지도 않은 선배의 입장이 아닌, 비슷한 처지에서 함께 고민해 보고 싶은, 무거운 고민의 짐을 나누고 싶은 친구의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묻는다.
법대에는 왜 왔어요?
대학교에서 뭐 하고 싶어요?

2005/12/08 22:13
문득 작년 초에 끄적여놓은 글이 생각나서 이곳에 퍼다 둔다.
2005/12/10 12:05
"비밀이에요."
2005/12/13 03:52
2005/12/15 19:02
소중한건 말하지 않아야된다고 하면서...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