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는 ‘정신분석 강의’에서 자신이 정신분석이라고 이름붙인 심리학적 연구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에 비견될 만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지동설로 인해 “인류는 우리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그 크기가 전혀 상상 불가능한 우주 체계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고, 진화론은 “인간이 창조에 관한 특권을 지닌다는 생각을 파괴”해 버렸다. 이렇게 두 번씩이나 상처입은 인류의 자존심은 뒤이어 정신분석학에 의해 “가장 민감한 모욕”을 당하게 된다. “자아가 자신의 집안에서도 더 이상 주인일 수 없으며, 자신의 정신생활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대해서 오직 초라한 정보들만을 접하고, 이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정신분석학이 보여 준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 강의, 열린책들, 2004, p.388 참조.]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선언한 이래 인간은 의식적 사유의 힘을 의심치 않았다. 명료한 의식은 나의 행위를 가능케 했고, 곧 내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의식은 곧 나의 존재 그 자체라고까지 받아들여졌다. 의식의 확고함에 기대어 인간은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고, ‘아는 것이 힘이다’고 당당히 외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인간의 오만함에 일침을 놓았다. 의식되지 않는 것, 무의식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인간 삶의 동력원으로서 무의식에 주목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을 취한다면, 내가 의식하는 것이 더 이상 나의 전부가 아니게 된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크 라깡은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틀어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표현한다. Jacques Lacan, Ecrits, Paris: Seuil, 1966, p.571. (김상환, “라깡과 데까르트”,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비평사, 2002, p.163에서 재인용)]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확고한 자기의식’이라는 환상이 주는 안정감과 평온함을 버리고, 알지 못하는 무지의 영역과 대면하는 불안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프로이트의 이론이 거센 저항에 부딪쳤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이 소개되고 받아들여지기까지의 과정은, 저항을 극복하고 억압된 진실을 드러내는 정신분석의 과정과 구조적 유사성을 띠고 있다. 무의식의 존재는 받아들이기 싫은, 따라서 억압된 고통스러운 진실이었고, 프로이트에게 쏟아졌던 온갖 비난과 논박은 분석을 거부하는 저항의 일종이었던 셈이다.

프로이트는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을 해석하면서, 작품 속에서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의 살해자일 뿐만 아니라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과정이 정신분석의 과정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Sigmund Freud,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 pp.261-262.] 역병이 창궐하여 고통받는 테베를 구하기 위해 라이오스를 죽인 사람을 자신이 반드시 찾아내리라고 선언하는 순간부터, 자기가 찾으려던 그 사람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음을 마침내 알게 되는 때까지, 오이디푸스는 사실상 자기분석의 과정을 거치게 되며, ‘오이디푸스 왕’은 이러한 자기분석의 과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억압되어 있는 진실, 분석의 대상이 되는 진실은 바로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의 살해자이며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오이디푸스가 행하는 자기분석이 끝나기 전까지 이러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뿐인데, 그는 “진실은 그것을 아는 자에게는 고통일 뿐”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거듭된 추궁 끝에 테이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에게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 주자, 오이디푸스는 격노하여 그와 같은 사실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는 크레온이 테이레시아스와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석 과정에서 피분석자는 계속해서 집요하게 분석가에게 저항한다. 저항은 분석가가 제시한 사실에 대해 단순히 격렬히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합리적인 논변을 통해서 그에 대해 반박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 강의, 열린책들, 2004, pp.390-394.] 분석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일반적 현상은 ‘오이디푸스 왕’에서 역시 그대로 나타난다. 테이레시아스를 통해 처음 진실과 대면하자 오이디푸스는 강하게 이를 부정(denial)함으로써 진실로부터 도망친다. 이는 분석을 통한 진실의 폭로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저항이다. 테이레시아스와의 대화에서 오이디푸스는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있으며, 그가 보이는 격렬한 감정의 표출은 부자연스럽다. 오이디푸스가 누구인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를 구한 자, 논리적 추론능력을 보유한 자,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따라갈 사람이 없는 자” 아닌가? 그렇게 합리적이고 현명한 사람이 뜬금없이 크레온을 끌어들이며 음모론을 내세우는 모습은 흡사 어두운 비밀을 들킨 사람이 황급히 진실을 부정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분석의 과정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점점 더 진실이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오이디푸스의 저항은 맹목적인 부정에서 합리적인 논변의 형태로 바뀐다.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던 보루는 “하나는 여럿일 수 없다” 는 명제였다. 논리적 규칙에 의거한, 일견 견고해 보이는 이 명제가 오이디푸스가 분석에 저항하기 위해 사용한 무기였다.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와의 대화에서 그의 부모와 관련된 저주를 언급할 뿐 아니라 그의 결혼에 무언가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내비치기까지 한다. 이오카스테는 라이오스의 인상착의를 묘사해 줄 뿐만 아니라, 라이오스가 세 갈래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도 알려 준다. 이만큼이나 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이디푸스는 누군가로부터 폴리부스와 메로페가 자신의 부모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의심을 거두지 못해 신탁에까지 찾아갔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그 신탁에서 자신의 생부와 생모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고, 대신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만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이오카스테가 묘사한 것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세 갈래 길이 만나는 곳에서 죽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의 연속이라고 보기엔 지나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토록 현명한 오이디푸스가 고작 ‘하나는 여럿이 아니다’라는 이유 때문에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오카스테의 이야기를 듣고도 여전히 그 사건의 목격자를 만나야지만 진실을 알 수 있으리라고 하는 오이디푸스는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분석 과정에서 진실을 어떻게 해서든 한사코 부인하고 끝까지 저항하려는 피분석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오이디푸스는 이 작품에서 피분석자인 동시에 분석가의 역할도 하고 있다. 피분석자로서 그는 억압된 진실과의 대면을 한사코 피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분석가로서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자기 손으로 잡고자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찾는 범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오이디푸스는 ‘내가 모르는 나’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나의 존재를 이루고 있으나 내게 의식되지는 않는 부분, 즉 자신의 무의식을 발견하기 위한 자기분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오스를 죽인 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기 위한 오이디푸스의 여정은, 종국에 가서는 자신의 출생에 관한 의문,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 결합하면서 끝나게 된다. 오이디푸스가 찾아 나선 것은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작품 속에서 오이디푸스는 지혜로운 자, 수수께끼를 잘 푸는 자로 등장한다. 그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만만하다. 테이레시아스를 꾸짖는 장면에서 오이디푸스는 바로 자신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음을 당당하게 외치고, 예언자의 무지를 조롱한다. 테레시아스가 ‘눈이 먼’ 반면에, 오이디푸스는 ‘잘 보는’ 사람인 것이다. 보는 것은 결국 아는 것,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며, 눈이 멀었다는 것은 곧 무지함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눈멈’과 ‘봄’의 대비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그 상징적 의미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눈이 먼 테이레시아스이고, 자신의 현명함을 뽐내는, 두 눈으로 사물을 똑똑히 볼 수 있는 오이디푸스는 오히려 진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여기서도 의식의 힘을 과신하는 인간에 대한 프로이트의 지적은 유효하다. 인간의 인식능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정신분석학은 의식되지 않는 영역이 있음을 입증함과 동시에 바로 그 영역에 더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무의식이야말로 의식의 조그만 영역을 포함하는 더 큰 영역이다.” [Sigmund Freud,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405.] 오이디푸스의 삶의 진실은 바로 의식되지 않고 억압되어 있던 내용, 즉 그가 라이오스의 아들이며, 이오카스테의 아들이자 남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이전에 의식하고 있던 내용, 즉 그가 폴리부스와 메로페의 아들이라는 것은 허구에 불과했다. 진정으로 그의 삶을 지배했던 내용은 은폐되고 억압되어 있었다.

억압되었던 진실과 대면하는 순간에 오이디푸스가 보이는 반응은 이오카스테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오카스테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끝까지 철저히 외면했다. 그녀는 진실이 밝혀지려고 하자 그 자리에서 도망쳤으며,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알지 못하는 것, 의식할 수 없는 그것(Es)과의 공포스러운 대면을 이오카스테는 거부했다. 진실을 분명히 인정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와는 달리 오이디푸스는 그것(Es)과 대면했고, ‘내가 모르는 나’를 인정했다. 분석 과정 내내 도망치고 저항하던 오이디푸스였지만, 분석의 끝에서 그는 용감하게 대응했다. 역설적이게도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이 멀게 되어서야 진실을 볼 수 있게 된 셈이다. 자기 분석 과정을 거쳐 마침내 무의식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그의 반쪽짜리 정신세계는 비로소 완전해졌고, 오이디푸스는 진정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자신의 두 눈을 찌름으로써 ‘내가 모르는 나’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벌을 내리고 책임을 짊어졌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받아들였다. 분석가 오이디푸스는 저항을 극복하고 억압된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 남은 시커먼 구멍은, 파악되지 않는 그 무엇, 그 심연의 존재를 영원히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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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3 22:05 2004/10/03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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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eoAger
    2004/10/04 00:50
    비극 오이디푸스를 읽는 것인가요?? 이렇게 보니까 또 완전 새롭다는.. ㅋ
  2. onecent
    2004/10/07 22:47
    이건 수업 숙제로 낸 글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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