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에서 처음 [아는 여자]의 포스터를 봤을 땐, 그야말로 무덤덤할 뿐이었다. 정재영에 이나영이라. 정재영은 [실미도]에서 꽤 괜찮았지만,(물론 난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실미도]에서 그의 연기를 극찬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그가 찍는 영화를 무조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이나영은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 배우다. 포스터도 전혀 멋지지 않다. 약간의 장난기 풍기는 사진에 큐트한 글씨를 남발해 놓은, 최근의 트렌드를 그대로 따른 포스터.
따라서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보러 가기로 했을 때도, 나의 기대치는 여전히 제로. 주변에서는 기대를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에, 괜한 반발심으로 여간 재미있지 않으면 좋아해 주지 않겠다 라고 꿍한 마음을 먹고 있을 정도였다.
영화가 관객을 사로잡느냐 마느냐는 처음 5분 안에 판가름이 난다는 말이 있다. 이 공식은 내 경우에도 대개 들어맞았다. 나이트크롤러의 환상적인 백악관 습격장면을 본 후에는 [엑스멘2]에 빠져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글래디에이터]의 놀라운 초반 전쟁씬은 그 이후의 지루한 전개를 간신히나마 견디게 해 준다.
또, 영화의 처음 5분은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도 한다.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처음에 등장하는 문구, <주유소를 왜 터는가? ...
>이 바로 그런 케이스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냥 웃어라' 하고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 필이 꽂히면 내내 너무나 재미있게 영화를 볼 수 있다. 안 꽂히면? 할수 없지 뭐.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는 초반 윤소이가 빌딩 옥상에서 점프를 하는 그 순간이 바로 승부가 나는 순간이다. '오케이. 이 영화는 황당유쾌액션극이구나. 좋았어!' 가 되거나, '이게 뭐야. 유치찬란하잖아' 가 되는 거다.
[아는 여자]의 경우도 그랬다. 진지하고 무게있는 첫장면. 아름다운 멜로영화의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풀풀 풍기다가 돌연 "X발"이 난무하고 2%광고가 패러디되면서 필이 꽂힌다. 푸핫. 이거 엄청 재밌겠는데.
사실, 난 너무나 무관심했던 탓인지 오프닝크레딧이 올라가기 전까지도 이게 장진 감독의 영화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킬러들의 수다]도 괜찮게 봤었던지라 그의 영화라는 걸 알았다면 약간은 기대를 하고 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영화는 시종일관 정신없이 웃기면서도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에도 공감할 수 있게끔 해준다. 보통의 식상한 로맨틱코메디와는 좀 다르다. 두 주인공이 이런저런 난관을 거치고 티격태격하면서 결국엔 해피엔딩으로 가는 스토리구조가 아니다. [아는 여자]에서 본격적으로 로맨스가 시작되는 건 영화의 마지막 장면부터다. 앞으로 그들이 어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고, 영화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극장을 나가면서 누구나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나영이 좋아졌다
장진 감독의 개그는 빛을 발한다. 진지함으로 웃기는 것. 그게 진짜 고수들의 수법이다. 낮은 톤의 감정 없는 목소리로 "영화는 돌연 액션영화로 바뀌어...정말 일관성없는 영화다"를 내래이션으로 내뱉는 센스는 정말 만점이다. 마라톤 뛰고서 김치냉장고 타 온 후 두 주인공의 진지한 모습이 교차되는 장면도 최고.
이런 개그센스에다가 약간의 어처구니없음까지 가미되었으니, 이거야말로 진짜 유쾌한 영화다. 마지막에 전봇대가 파지직 터지는 거라든지, 임하룡이 스포츠신문에 나타난다든지 하는 요소가 바로 그렇다. 황당함과 어이없음이 딱 적당하게 버무려져 재미가 배가 된다.
큰 줄거리를 감싸고 있는 곁가지 사건들이 난잡하게 벌여지는 듯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퍼즐이 맞춰지듯이 앞뒤가 하나하나 들어맞게 되는 것도 꽤나 인상적이다. 수미쌍관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고나 할까.
주절주절 너무 많이 떠들었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나왔다는 것. 물론 기대치가 극도로 낮았기 때문에 만족이 그만큼 더 크기도 했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극장에서 볼 만한 영화다. ★★★★
2004/07/21 18:24
2004/07/22 11:44
의외로 괜찮았나보구나 흐음... (이것도 봐야겠는데...;;)
2004/07/22 20:51
가넷/ 진짜 재밌습니다. 아라한에 이어 상반기 두번째로 재미있는 영화;
2004/07/23 00:05
나 그거 꼭 보구싶었는뎅...+_+
2004/07/23 20:42
2004/07/24 22:18
재미있을거 같애.
2004/07/25 18:29
ㅎㅎㅎ/ 그런 사랑을 받는 입장에 있었으면..하는 생각이 먼저 들긴 했습니다만, 사실 진짜 멋진 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네요.
J./ 역시 실화란 말이군요! (...그래 나도 희망이..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