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공부 한 자도 한 해놓은 시험이 세 개요, 기말보고서는 네 개나 되는 상황에서
다 제껴놓고 농구중계를 보고 있는데,
돌연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번호가 "015-944320178"이라고 떴다.
뭐야 이게. 세상에 '015'도 있나? 게다가 하이픈도 하나밖에 없잖아.

또 무슨 광고전화겠거니 하고 별 생각없이 슬라이드를 밀어올려 전화를 받았다.
(사실 그때 마침 중간광고 나오던 때라 그렇지, 경기 하고 있는 중이었으면 안 받았을 거다)
여보세요 했더니만 "안녕하세요"하며 들려오는 녹음된 ARS 목소리에 '역시나 또 허튼 광고전화구나 젠장'하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참이었는데,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 다음 마디가 "서울지방검찰청입니다" 였던 것이다.

뭐야 이거. 하는 생각에 전화 끊으려던 걸 참았는데,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구저쩌구 한 일로 인해 검찰청 조사차 소환되셨으니 몇월 며칠(녹음상태가 좋지 않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출두하라는 내용이었다. 사건번호는 몇몇이라는 것도 친절하게 말해 주더니만, 출석하지 않으시면 구류조치하겠다는 엄포까지 놨다. 이 엄포 효과가 대단했다. 친철하디 친절한, 전형적인 ARS 녹음 목소리로 "임의로 출석하지 않으면 구류조치할 수 있습니다"고, 꼭 무슨 "지금 신청하시면 3개월 무이자로 서비스해드립니다" 말하는 투로 어찌나 생기발랄하게 잡아가겠다고 그러는지, 두 배로 등골이 서늘했다. 칼 들고 킬킬 웃는 정신병자 살인마가 진지하게 화내는 살인마보다 두 배로 무서운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될 거다.

"다시 들으시려면 1번, 상담원 연결을 원하시면 9번을 눌러주세요."
순식간에 말소리가 그쳤다. 정작 중요한 내용은 녹음상태가 안 좋아서 제대로 듣지도 못했는데. 머리에 제대로 남은 건 '소환되셨습니다' 와 '출석 안하면 잡아가겠습니다' 두 가지였다.

머리속에 온갖 생각이 다 지나갔다.
아아 드디어 내 수많은 악행들이 꼬리가 밟혔구나. 좀 착하게 살걸. 며칠 전 [지구를 지켜라] 다운받아 본 게 걸린 건가. 혹시 내 방에 있는 책 중에 뭔가가 금서라서 국가보안법으로 잡아가는 거 아냐 이거.

다시 한번 뭐라 그러는지 들어나 보자. 1번을 눌렀다.
통화 대기음악이 흘러 나왔다. 대기음악이 언제나 그렇지만, 기다리는 사람 초조한 걸 비웃기라도 하듯 평화롭고 느긋하기 짝이 없는 상투적으로 유명한 클래식음악.
난 다시듣기를 눌렀는데 왜 이건 상담원 연결되는 분위기일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상담원한테 다시 확인해달라고 하면 되겠지. 이것저것 따지게 생겼냐 지금.

상담원이 연결됐다.
서울지방검찰청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제가 좀전에 소환됐다는 전화를 받았는데요, 확인 좀 해주실 수 있나요.
네 성함과 주민번호를 말씀해 주셔야 확인 가능합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김웅재인데요. 네? 죄송하지만 잘 안들립니다.
또박또박 우렁차게 한 자씩 말해줬다. 김! 웅! 재!
김운재씨요?
아씨. 이런 사람 2002년 월드컵 이후로 너무 많다. 이운재한테 위자료라도 받아내야 할 판이다.
아뇨 '우'에 이응 받침입니다!
네. 주민번호는 어떻게 되시죠?
841...
생일도 다 안말했는데 전화가 끊어졌다.
헉 이게 뭐야. 다급한 마음에 아까전 걸려온 그 015 번호로 통화를 시도했으나 없는 번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ARS 번호가 통화가 될 리가 없지. 서울지방검찰청 전화번호를 찾아서 걸 생각으로 네이버에다 '서울지방검찰청'을 치고 검색을 했다.

그랬더니만 이게 웬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검찰청직원을 사칭해서 개인정보를 빼내가는 요즘 한창 극성인 전화사기였던 것이다.
서울지방검찰청 홈페이지에서는 아예 주의하라고 공지사항까지 띄워 놓은 상태다.

알고 나니까 그제서야 이상한 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ARS 녹음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출두할 날짜가 언제인지조차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는 점. 녹음된 목소리에서는 내가 누구인지도 말한 적이 없다는 점(그래놓고는 이름부터 물어보는거다). 분명히 다시듣기를 눌렀는데도 상담원하고 연결이 됐다는 점 등.

주민등록번호 말하다 끊겨서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
출두 안 해도 되니까 다행이긴 한데, 이거 참. 갈수록 사기수법이 교묘해지니 아차 하다가 걸려들어가지 않게 조심하고 볼 일이다.

요새 극성이라니까 혹시나 검찰청에서 이런 전화가 걸려오더라도 절대로 개인정보 내주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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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7 18:47 2007/12/0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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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Na
    2007/12/08 18:07
    대체 어디가 "교묘"하다는거야 ㅋㅋ

    그보다도 니가 다시듣기를 누른 순간
    수신자부담 국제전화가 연결되서
    다음달 전화요금이 몇만원 더 나올지도...
    그런 수법도 유행인가보던데.
    • onecent
      2007/12/09 12:02
      왜; 막상 당하면 정신없어서 속게 된다니까.

      국제전화 연결되는 것도 무섭다. -_-
      근데 그렇게 하면 자기들이 어떻게 이득을 보지?
      내가 내는 국제전화 요금이 그쪽으로 지급되기라도 하는건가?
  2. 경선
    2007/12/08 22:28
    나도 오늘 비슷한 전화 받았어.
    001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기업은행이라고 하면서 카드가 연체됐으니 연체료 납부하라고;
    녹음된 목소리에 다시 듣기나 상담자 연결 말하는 것까지 똑같았어-

    비슷한 사례를 들은적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누군가 내 이름을 도용해서 신용카드라도 만들었나 하고 꽤나 놀랄뻔했지;;
  3. 東賢.
    2007/12/09 02:16
    심지어 내 친구네 집엔 아들을 납치했다는 협박전화까지도 오더라.. 자취나와 있는 아들녀석이 마침 연락이 안되는 바람에 그 집은 반나절 발칵 뒤집혔었다는.. 정말 입금할뻔 했었다던데; 험난한 세상 어찌할꼬.
    • onecent
      2007/12/09 12:11
      납치했다고 협박전화 하는건 저도 이야기 들었어요;
      '살려주세요'하고 소리지르는 것까지 녹음해놨다가 틀어놓는다죠 -_-
      그때 경악을 금치 못했었는데 정말.

      이제 앞으로는 무슨 일 났다는 전화 오면 일단 안 믿고 봐야 할 듯.
  4. GUNa
    2007/12/09 20:36
    울 어머니는 위 리플들에 언급된 모든 케이스를 겪어보셨대..
    "신세계백화점에서 170만원이 결제되었습니다"라는 문자도 받아보셨고..ㅋㅋ 얼마전 법원에서 소환전화왔을때는 이름 물어보길래 "이름도 모르면서 전화했어요?"라고 했더니 끊더래..ㅋㅋㅋ
    • onecent
      2007/12/16 22:17
      모든 케이스를 다 겪어보셨다고;;

      아..나도 '이름도 모르면서 전화했어요?' 하고 쿨하게 대응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5. 하영
    2007/12/10 01:30
    나한텐 아무전화도 안왔는데;
    돈뜯어갈게 없다는 것을 안건가ㅠ
    • onecent
      2007/12/16 22:17
      ㅎㅎ 안 오면 좋은거야.
      핸드폰번호 많이 노출이 안 됐다는 것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좋은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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