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음법에 관한 단상들

쿵푸(工夫) Posted at 2006/10/29 01:18

1. 어음법은 수학과 비슷하다.

'돈을 억지로 받아낼 수 있는 힘'을 '권리'라고 추상화하고, 그것을 종이에 쓴 몇글자로 다시 物化시켜 놓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전제로 했던 채권이 그 자체로 완전히 독립되어 둥둥 떠다닐 수 있게 되는 셈인데, 그것만으로도 고도의 추상적 사고를 요하는데다가 사람들 손을 거쳐가면서 종이에 싸인이 늘어날 때마다 물화되는 권리도 덩달아 늘어나는 게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엄격한 형식성과 그 때문에 나타나는 논리성이 수학과 닮았다.

당장 밥벌어먹고 사는 데 별로 도움이 안되고, 지적 유희에 가깝다는 점 또한 비슷하다.
(지적 유희이기 때문에 어음법이 유독 내 흥미를 끄는지도 모른다)


...물론 수학은 근대 세계의 가장 밑바닥을 닦은 주춧돌인 반면, 어음에 관한 법리는 법학의 기초라기보단 채권법이 갈 데까지 간 최종 결과물 정도일 뿐이다.


2. 어음법을 이해하는 지름길은, 어음은 '물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권리가 화체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권리'에 주목해서는 정상적/비정상적인 배서를 거치면서 얽히고 섥힌 권리관계의 늪에 빠져버리고 만다.

어음은, 그 이전에 있어서는 사실상 동산과 같다. 그러기에 선의취득도 인정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음상 권리'의 취득"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는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아직 확실히 결론을 내린 건 아니지만, 현재 내 생각으론 아예 '틀린' 표현이다) 오해의 소지가 큰 표현이다. '어음상 권리의 취득'이 아닌 '어음의 취득'이라고 하는 게 낫다(또는 그래야 한다).

승계취득/선의취득을 따질 때는, "어음을 누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느냐" 만이 문제가 된다. 그 종이 위에 무슨 권리가 담겨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어음법 제16조 제2항에서는 분명히 "...어음의 소지인이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그 권리를 증명한 때에는 그 어음을 반환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다)

누가 어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느냐(법상의 표현을 빌자면, 누가 '적법한 소지인'인가)가 정해지면, 그 어음에 어떠한 권리가 화체되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이는 서명날인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해결된다.

결국, 교과서들이 언급은 하지만 상세히 검토하지는 않는, '교부행위와 서명날인을 분리하고, 권리의 이전은 교부행위에 의해, 채무부담은 서명날인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는, 일본에 있다는 학설'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라 생각된다.

어음위조의 입증책임에 관한 판례로 유명한 다음의 전원합의체판결 역시 이 점을 (어렴풋하게나마) 설시하고 있다. ('권리'의 귀속 운운한 걸로 봐서는 여전히 '권리의 화체'라는 관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듯하다)

"배서의 자격수여적 효력에 관하여 규정한 어음법 제16조 제1항은 어음상의 청구권이 적법하게 발생한 것을 전제로 그 권리의 귀속을 추정하는 규정일 뿐, 그 권리의 발생 자체를 추정하는 규정은 아니라고 해석되므로, 위 법조항에 규정된 "적법한 소지인으로 추정한다"는 취지는 피위조자를 제외한 어음채무자에 대하여 어음상의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자로 추정된다는 뜻에 지나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기명날인이 위조된 것임을 주장하는 사람에 대하여까지도 어음채무의 발생을 추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대법원 1993.8.24. 선고 93다4151 전원합의체 판결]

이처럼 '어음의 귀속'과 '어음상 권리의 발생유무(존재유무)'를 구분하는 것은, 어음행위의 표현대리 문제, 이른바 '어음의 효력발생시기'의 문제 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열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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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9 01:18 2006/10/29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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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넷
    2006/11/09 02:07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네가 법대에 들어갔다는 걸 알고는 상당히 의외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어음수표법을 재미있어했던 이유가 수학과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걸 네 덕분에 뒤늦게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 수학이 어려워서(그리고 주변의 권유로) 문과를 택하긴 했다만 수학은 어려워하면서도 상당히 재미있어했던 기억이 난다.
    어음법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것 같다. (지금은 거의 다 잊었지만...)
    재미있지? ^^
    • onecent
      2006/12/24 00:20
      음..의외이셨다니. 역시 전 법대 타입이 아니었던 것일까요.ㅎ

      어음법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이번학기 성적을 받아놓고 나니 참 심란해지는게..;

      ㅎㅎ 뭐. 재미있고 마음에 들지만 실력은 안좋은거.
      저한테 정말 수학하고 어음법은 똑같군요.
  2. 동현.
    2007/08/13 01:44
    어수 1순환에 들어선 수험생 입장으로서 굉장히 흥미롭구나.ㅎㅎ;
    언제 이에 대해서 웅재의 강의를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
    • onecent
      2007/08/14 02:12
      저 판례에서 진짜로 중요한 건 저 부분인 것 같은데 별로 강조가 안되더라구요...

      어음법은 지금 생각해도 진짜 흥미롭고, 그러면서 어려운 과목인듯.ㅎㅎ 아무리 봐도 학설대립이 기억이 안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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