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를 대비시키면서 좋음과 나쁨, 그리고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가치체계를 설명한다. 강한 자와 약한 자에 관련된 논의는 특히 제 1논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니체에 따르면, 선과 악의 가치체계는 원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이는 약한 자들의 도덕, 즉 노예의 도덕이다. 반면에 강한 자들은 선과 악이라는 기준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이라는 기준에 의해 판단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14(KGW VI 2)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pp.351~391. 특히 제10절과 제11절 참조.]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본질적 차이점은 그들의 행위가 능동적인 것인지, 아니면 수동적인 것인지에 있다. 물리적인 차원의 강함은 강한 자의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다. 육체적인 근력의 강인함이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권력 등이 물리적인 차원의 강함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러한 강함은 ‘도덕의 계보학’에서 니체가 언급하는 강함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 곳곳에서 강한 자를 묘사하면서 육체적·물질적인 힘의 발현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강한 자들을 ‘금발의 야수’ 혹은 ‘커다란 맹금류’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제압과 압박, 파괴와 승리를 강한 자들과 결부시킨다. [Ibid., pp.373~374, p.377 참조.] 폭력적인 요소를 연상시키게 하는 이러한 묘사를 단순하게 받아들인다면, 강한 자는 글자 그대로 다른 사람들보다 강한 물리적 힘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그래서 약한 자를 짓밟는 사람이라고 정의될 것이다. 반대로 약한 자들은 힘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강자의 폭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강한 것에게 강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요구하고, 그것이 압박욕, 제압욕, 지배욕, 적대욕, 저항욕, 승리욕이 아니기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약한 것에게 강한 것으로 나타나기를 요구하는 것만큼 불합리” [Ibid., p.377.]한 것이다. 어떤 활동이나 작용의 배후에서 이를 자유롭게 제어하는 ‘주체’ 따위는 없다. ‘강자가 원하기만 한다면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관념은 약한 자들이 강한 자들에게 책임을 지우기 위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하다. 약한 자들은 이러한 환상을 통해서 자신들의 약함을 스스로 의욕한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강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어서 자신들의 속성을 ‘선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다. [Ibid., 제1논문의 제13절, 제14절 참조.]

만약 강함이라는 것이 물리적인 힘을 의미하고, 강한 자들이 강함을 드러내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필연적이라면, 이는 결국 강자의 무자비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변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논리를 극단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면 결국 가장 냉혹한 적자생존의 법칙에 이르고 만다. 가장 힘이 강한 자만이 그보다 약한 자를 모두 제압하고 살아남게 될 것이고,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화될 것이다. 니체의 사상이 파시스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 [마크 네오클레우스, 파시즘, 이후, 2002, pp.26~29 참조.]은 바로 그의 글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되어, 무제한의 폭력 행사를 정당화하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함에 대한 니체의 주장을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강함 개념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해에 불과하다. ‘강한 자’와 ‘약한 자’는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물리적 힘의 강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는 누구보다도 강한 육체적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능동성을 갖추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바로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 [프리드리히 니체, Op.Cit., p.367.]에서 고귀한 모든 도덕이 생겨난다. 반면에 약한 자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긍정이 아닌 부정이다. “노예 도덕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대립하는 어떤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 … 노예 도덕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반작용” [Ibid.]인 것이다. 약한 자는 외부의 것을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확립한다. 약한 자에게 있어서 ‘나’는 ‘타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강한 자’는 거꾸로 ‘타인’을 ‘내가 아닌 것’으로 규정한다.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의 이러한 차이 때문에 두 존재양식의 행위 양태는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폭력성과 잔인성은 강한 자들의 행위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현상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강한 자들은 결코 타인에 대한 폭력성과 잔인성 그 자체를 목적으로서 추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강한 자들은 타인을 짓밟을지는 몰라도, 짓밟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짓밟으려고 한다’라는 말 자체가 벌써 배후에 존재하는 의도를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언어의 유혹’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한 자들의 폭력성과 잔인성은 그들의 소박한 무지, 혹은 “고삐 풀린 맹수”의 순진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다.

폭력성과 잔인성은 강한 자에게 있어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약한 자 역시 얼마든지 폭력성과 잔인성을 표출할 수 있다. 오히려, 약한 자야말로 타인을 짓밟고 폭력을 가하려고 하는 사람, 그러한 폭력적 행위를 목적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타인을 짓밟는 행위는 이미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이와 같은 폭력적 행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타인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만족이다. 이렇게 일그러진 형태로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가장 약한 자들의 힘을 향한 의지가 발현되는 모습이다. [Ibid., pp.488~489 참조.]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관계를 의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행위는 아무리 물리적으로 강한 힘을 동반한다고 해도 반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짓밟으려고 하는 자는 그 누군가를 끊임없이 ‘곁눈질’할 수밖에 없다.

강한 자들은 구태여 다른 사람을 일부러 괴롭히려고 하지 않는다. 원한과 증오는 부정에 바탕을 둔, 약한 자들의 감정이며, 이러한 감정은 강한 자들에게는 없다. 강한 자는 행위를 함에 있어서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의 행위의 원천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강한 자는 ‘곁눈질’하지 않기 때문에, 즉 타인을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될 수는 있을망정, 폭력 행사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한 자들에 대한 강한 자들의 감정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에 가까운 것이 된다. 타인의 존재가 자기 자신의 규정이나 스스로의 행위에 전제가 되지 않는 진정한 능동성을 갖춘 상태에서 바로 ‘거리의 파토스’의 출현이 가능해진다.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지 않는 능동성,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각종 부정적 영향을 ‘소화’해 내는 ‘망각의 힘’을 갖춘 사람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강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묘사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능동적 인간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여 주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설명을 믿는다면, 카이사르에게서는 ‘거리의 파토스’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카이사르 개인의 사전에는 복수라는 낱말이 없다. 복수심에 불타는 쪽과 복수의 대상이 되는 쪽이 같은 수준에 있지 않으면 복수심은 성립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4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한길사, 1996, p.359.]

“‘갈리아 전쟁기’와는 달리, ‘내전기’에는 적에 대한 카이사르의 경멸감이 주조음을 이루고 있다. 자기가 상대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증오도 원한도 복수심도 초월할 수 있다. 증오나 원한이나 복수심은 경멸에 자리를 양보한다.” [Ibid., p.501.]


반면, 루쉰의 소설 ‘아Q정전’에 등장하는 아Q는 능동성을 갖추지 못한 약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아Q의 이른바 ‘정신적 승리법’은 자신이 당한 굴욕과 고통을,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둔갑시켜서 자기만족을 얻는, 약한 자들의 자기기만이다. 더 나아가 그는, 스스로를 경멸하고 따귀를 때림으로써 쌓인 원한을 해소하려고까지 하는데, 이는 원한에 기초한 행동양식 뿐만 아니라 그 원한의 방향을 스스로에게 되돌리는 모습까지도 보여 주고 있다. [루쉰, 아Q정전·광인일기, 혜원출판사, 1997, pp.60~65 참조.]

결국 ‘도덕의 계보학’에서 능동성은 강함의 본질적 요소이며, 그 둘은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니체가 말하는 강한 자는 스스로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능동성을 갖춘 사람이다. 니체는 이러한 능동성을 바탕으로 “인간 유형이 스스로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강력함과 화려함” [프리드리히 니체, Op.Cit., p.345.]에 이르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타인에게 얽매여 반작용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실현하지 못한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계속해서 곁눈질하며 움츠러드는 약한 자들로 가득찬 오늘날, 스스로를 실현하는 충만한 능동성을 바탕으로 외부 세계의 영향까지도 자신 안에서 긍정하고, 그러한 긍정하는 에너지를 더 확장시켜 궁극적으로는 외부 세계에 의지를 관철시키는 인간형을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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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1 02:33 2004/12/21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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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necent
    2004/12/21 02:34
    꽤나 공들여 쓴 과제.
  2. ^^
    2005/01/04 18:48
    타인에게 자유로울수 있는 사람은 정말 강한것 같아요..
    2005년에는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는데,,
    (오빠 말고요, 저요.ㅋ)
  3. onecent
    2005/01/08 00:42
    사실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건 있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몰라. 니체는 불가능한 이상을 이야기한 것일지도.

    좀 더 단단한 사람이라. ㅎ
    나도 좀더 단단해져야 하는데. 쩝.
    새해엔 너나 나나 더 단단해져야겠다.
  4. 이재학
    2005/07/27 01:13
    니체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가득차 있는 것 같아..ㅎㅎㅎ



    한 가닥 빛이 떠올랐다. 이제는 길동무가, 내 어디를 가든 업고 갈수밖에 없는 그런 죽어 있는 길동무나 송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길동무가 있어야겠다.

    스스로가 원하여 내 가는 곳으로 나를 따라가려는, 살아 있는 그런 길동무가.

    한 가닥 빛이 떠올랐다. 이제 나는 군중이 아니라 나의 길동무들에게 말하련다! 내가 고작 가축 떼나 돌보는 목자나 개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여기 가축 떼로부터 많은 가축을 꾀어내기 위해 왔다. 군중과 가축들은 내게 화를 내리라. 나는 목자들로부터 도둑이라 불리기를 바라노라.

    나는 저들을 목자라고 부르지만 저들은 저들 자신을 선한 자, 의로운 자라고 부른다. 나는 저들을 목자라고 부르지만 저들은 저들 자신을 참신앙의 신도라고 부른다.

    저들, 선하다는 자와 의롭다는 자들을 보라! 저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저들은 저들이 지금까지 떠받들어온 가치관을 파괴하는 사람. 바로 파괴자, 범죄자를 가장 미워한다. 그러나 이같은 사람이야말로 창조하는 자인 것을.

    저들 온갖 신앙의 신도들을 보라! 저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저들이 떠받들어온 가치를 파괴하는 사람, 바로 파괴자, 범죄자가 아닌가. 그러나 이같은 사람이야말로 창조하는 자인 것을.

    창조하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은 송장이 아니라 길동무다. 무리나 추종자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더불어 창조할 자,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판에 써넣을 길동무를 찾고 있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그리고 더불어 추수할 자를 찾는다. 모든 것이 무르익어 수확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백 개의 낫이 부족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삭을 손으로 뽑아내며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자신의 낫을 갈 줄 아는 자들을 찾는다.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파괴자, 선과 악을 경멸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리라. 그러나 그런 자들이야말로 추수하는 자요 축제를 벌이는 자인 것을.

    나는 나와 더불어 창조할 자를, 더불어 추수하고 더불어 즐겁게 축제를 벌일 자를 찾고 있다. 가축의 무리와 목자 그리고 송장과 더불어 내가 무엇을 도모하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5. 이재학
    2005/07/27 01:18
    그리고.. 괜히 하나 더


    < 男兒當自强 >


    傲氣面對萬重浪,
    패기는 만근의 파도에 맞서고


    熱血像那紅日光.
    끓는 피는 저 붉은 태양과 같이 빛나니


    膽似鐵打, 骨如精鋼,
    담력은 단련된 무쇠, 뼈는 정련한 강철


    胸襟百千丈, 眼光萬里長.
    가슴엔 거대한 포부, 눈빛은 끝없이 멀리


    我發奮圖强, 做好漢.
    나는 온 마음으로 사나이가 되리라


    做個好漢字, 每天要自强.
    사나이라면, 매일 스스로 강해져야 하고


    熱血男兒漢, 比太陽更光.
    열혈남아는 태양보다 빛나야 하는 법


    讓海天爲我聚能量, 去開天闢地,
    천지여, 내게 힘을 모아주소서 내가 천지를 개벽하리라


    爲我理想去闖看,
    내 이상을 위해 뛰어들리라


    看碧波高壯, 又看碧空廣闊浩氣揚,
    푸른 파도의 웅장함을 보면서, 그리고 푸른 창공의 광할함을 보면서 호연지기를 키우노라


    我是男兒當自强.
    나는 마땅히 스스로 강해지는 사나이 대장부


    昻步挺胸大家作棟梁, 做好漢.
    늠름한 걸음으로 가슴을 쫙 펴고 모두의 기둥으로써 멋진 사나이가 되리라


    用我百點熱, 耀出千分光.
    나의 들끓는 열정으로 온 세상에 빛을 밝히리라


    做個好漢字, 熱血熱腸熱, 比太陽更光.
    사나이가 되리라, 온몸의 뜨거운 피로.. 태양보다 더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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