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3 4 5 6 7 8 9 ... 10
형사소송의 심판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두고 견해가 나뉘는데, 다수설과 판례(의 주류)는 '잠재적 심판의 대상'과 '현실적 심판의 대상'을 구분하는 이른바 이원설을 취한다. 그리고 공소제기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의 사실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범죄사실대상설, 구성요건에 대입하여 재구성된 사실을 의미하는 소인(count) 개념을 도입하여 소인이 심판 대상이라고 보는 소인대상설, 현실적 심판의 대상은 소인이고 공소사실은 잠재적 심판의 대상이라고 보는 절충설이 주장된다.

일본 형사소송법상의 소인 개념을 형사소송법의 해석에 도입할 이유는 전혀 없다. 소인을 '법적 구성요건에 대입하여 재구성된 사실'이라고 보는 이상, 이는 형사소송법상 '공소사실'(엄밀히 말하면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 개념과 동일한 의미이다. 소인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용어만 증가시켜 불필요하게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소인 개념을 전제로 하는 절충설과 소인대상설은 (판례가 흔히 쓰는 표현을 빌자면) '취할 바 못된다.'

이원설과 범죄사실대상설 중에서는 어떤 견해가 타당한가?
두 학설의 차이는, '현실적 심판 대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이원설에서 말하는 '잠재적 심판의 대상'은 범죄사실대상설에서 말하는 '범죄사실'과 동일한 개념이기 때문에, 결국 심판 대상을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으로 나누는지 여부만이 두 학설의 차이점이다.

나는 '현실적 심판 대상'이라는 개념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원설을 지지하는 이재상 교수의 설명을 보자.
"법원의 현실적 심판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이고 그 공소사실과 동일성이 인정되는 사실은 공소장변경이 있을 때에 비로소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에서 잠재적 심판의 대상에 불과하다.." (형사소송법(제6판), p.382 25행 이하)

그러나 이러한 이원설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수긍할 수 없다.

1. 심판의 대상(소송물)이라는 개념을 설정하는 취지 자체에 반한다. 소송물의 범위를 확정하는 것의 실천적 의미는, 그것이 이중기소가 금지되는 범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고 기판력이 미치는 범위를 결정하는 기준도 된다는 데 있다. 법원이 그 사실에 대해 심판하였기 때문에 판결이 확정된 뒤 다시 공소를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고(기판력), 법원이 그 사실을 이미 심판하고 있기 때문에 중복해서 심판을 청구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이다(이중기소). 이원설은 기판력의 범위와 이중기소가 금지되는 범위를 '잠재적 심판의 대상'의 범위와 동일하게 설정하는데, 그렇다면 '잠재적 심판의 대상'만이 본래 소송법 이론에서 말하는 '소송물(=심판의 대상)'인 것이다. 심판의 대상과 기판력이 미치는 범위, 이중기소가 금지되는 범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미 소송물 개념을 해체시켜 버리는 것이다.

2. 법률의 규정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법원은 심리의 경과에 비추어 상당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공소사실 또는 적용법조의 추가 또는 변경을 요구하여야 한다(형사소송법 제298조 제2항). 만약 이원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잠재적 심판의 대상'에 대해서는 공소장 변경이 있기 전까지는 법원이 심리를 할 수 없다고 본다면, 대체 무슨 수로 법원이 "심리의 경과에 비추어" 공소장을 변경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제298조 제2항은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 이외의 사실에 대해 법원이 심리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규정이다.

3. 공소장변경 없이 공소사실과 다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공소장 변경이 없어도 (1)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불이익을 미치지 않는다면 (2) 공소사실의 동일성이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과 다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 일관된 판례 법리인데, 이 역시 '공소사실과 동일성이 인정되는 범위 내의 사실', 즉 '잠재적 심판의 대상'에 대해 법원의 심리가 가능함을 전제로 할 때에만 나올 수 있는 결론이다. 다수설은 이 문제를 이른바 "축소사실의 인정"이라는 이름하에 논함으로써 마치 공소사실에 완전히 포섭되는 "축소사실"인 경우에만 공소장변경필요성이 없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그래야 '현실적 심판 대상'의 범위 안에서 법원이 심리판단하는 이원설과 들어맞기 때문에), 대법원의 판시내용으로부터는 결코 축소사실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법리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


지난 일주일간 쌓인 울화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이재상 교수의 범죄사실대상설에 대한 비판 부분을 조목조목 뜯어보기로 하자.

"공소사실대상설(=범죄사실대상설)도 심판의 범위를 공소사실과 동일성이 인정되는 모든 사실에 확대하는 결과 피고인의 방어권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형사소송법이 특히 공소장변경제도를 인정한 취지를 무의미하게 한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공소사실대상설은 공소불가분의 원칙에 관한 형사소송법 제247조 제2항에 치중한 나머지 같은 법 제254조와 제298조를 완전히 무시한 이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p.382)

범죄사실대상설에 따르면, 이른바 '현실적 심판의 대상'보다 심판의 범위가 확대되는 것은 사실이고, 그에 따라 피고인의 방어권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 제298조의 공소장변경 제도가 필수불가결한 것이 된다. 법원이 심판하는 범위는 전법률적, 사회적 관점에서 파악된 사실(즉 '범죄사실')이지만, 공소장에 검사가 기재한 공소사실만을 인정할 수 있음이 원칙이다. 즉, 검사가 적용을 구한 범죄구성요건이 아닌 다른 구성요건이 충족됨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피고인의 예상을 깨는 재판을 하지 않기 위해 공소장변경 절차를 거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민사소송법 제136조 제4항의 법적 관점 시사의무와 구조가 완전히 동일하다)

그러므로 범죄사실대상설은 "형사소송법이 특히 공소장변경제도를 인정한 취지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사소송법이 왜 '특히' 공소장변경제도를 두어야만 했는지를 적절하게 설명해 주는 학설이다. 그리고 법 제254조와 제298조는 피고인 방어권 보호를 위한 필수적인 장치로서 그 중요성이 한층 강조되는 것이지, 이들 조문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원설 측에서 범죄사실대상설에 가하는 비판은 어느 하나 타당한 것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덧붙이자면, 형사소송법의 소송물을 '범죄사실', 즉 전법률적,사회적 관점에서 파악된 사실이라고 규정하고 나면, 민사소송과 형사소송, 행정소송(항고소송)을 관통하는 통일적 소송물 개념을 정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바로 [전법률적,사회적 사실관계]를 그 핵심으로 삼는 소송물 개념으로서, 민사소송에서는 이른바 이원설의 입장과 맞아떨어지고, 항고소송의 경우 처분사유 추가변경의 한계와 관련해서 논의되는 '기본적 사실관계' 와도 맞아떨어진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6/12/24 01:10 2006/12/24 01:10







형사소송법

제229조 (배우자의 고소)
제1항 형법 제241조의 경우에는 혼인이 해소되거나 이혼소송을 제기한 후가 아니면 고소할 수 없다.
제2항 전항의 경우에 다시 혼인을 하거나 이혼소송을 취하한 때에는 고소는 취소된 것으로 간주한다.

제232조 (고소의 취소)
제2항 고소를 취소한 자는 다시 고소하지 못한다.

이혼소송의 소장이 각하된 경우에도 제229조 제2항의 "이혼소송을 취하한 때"에 포함되는지를 놓고 학설은 대립한다. 포함된다고 보는 게 다수설이고,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가 소수설이다. 판례는 다수설과 같은 입장이라고 하는 게 일반적이다. 소수설은, 자신의 의사로 이혼소송을 취하한 것이 아닌 소장각하의 경우를 취하 또는 취하간주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다수설과 판례를 비판한다.

이렇게만 보면, 소수설의 견해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간통죄의 고소의 효력을 혼인의 해소 또는 이혼소송 계속과 결합시켜 놓은 것은, 혼인관계가 계속되는 이상 일방 배우자가 타방을 형사처벌하는 결과는 법이 허용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따라서 혼인을 해소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표명하지 않는 이상 간통죄를 범한 배우자의 처벌을 구할 수 없고, 이혼소송 중에 그 소를 취하함으로써 혼인 해소의 의사를 철회하였다면 고소 역시 취소한 것으로 의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혼 소장의 각하만으로는, 소 취하나 취하 간주와 비교해 볼 때 혼인관계 지속의 의사를 표명했다고 보기 힘들다. 재판장의 소장 보정명령에 응하지 않은 것이나 공판기일에 불출석함으로써 취하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나 원고의 귀책사유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일단 적법하게 계속된 소송의 변론기일에 의도적으로 불출석하는 것(그것도 취하간주를 위해서는 쌍방 당사자가 불출석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과, 소장을 제출함으로써 혼인관계 해소의 의사를 명백히 표시하였지만 소장의 형식적 잘못으로 인해 각하명령을 받는 것은, '혼인관계 해소의 의사 존부'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실질적 차이가 존재한다.

이상의 내용을 압축해서 답안지에 써 주고, 그러므로 소수설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 주면 깔끔하게 논점 하나 해결될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렇지가 않다.

문제는 대법원의 입장이다.
정말로 대법원이 다수설과 마찬가지로 이혼소장이 각하된 경우를 취하 또는 취하간주와 같이 보는가?

이 문제에 대한 판례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빠지지 않고 인용하는 95도477 판결의 판결문을 꼼꼼히 살펴보자. (직접 링크를 타고 가서 한번 들여다 보자. 특히 참조조문 부분을)

형사소송법(이하 법이라고만 한다) 제229조 제1항은 간통에 대한 고소는 혼인이 해소되거나 이혼의 소를 제기한 후가 아니면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위 고소는 혼인관계의 부존재 또는 이혼소송의 계속을 그 유효조건으로 하고 있다 할 것인바, 위 고소 당시 이혼의 소를 제기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소장이 각하된 경우에는 처음부터 이혼의 소를 제기하지 아니한 것과 같아, 그 고소는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고 할 것이다. (95도477)

대법원은 이혼소장이 각하된 경우 고소의 효력을 부인하는 근거를 제229조 제1항 에서 찾고 있지, 제229조 제2항 을 적용하고 있지 않다(참조조문으로 제1항이 명시되어 있다).
교과서들에서 말하듯이 이혼소장 각하를 취하와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 관한 한 대법원의 입장은 다수설과 같지 않으며, 그에 대한 소수설의 비판은 판례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

제229조를 살펴보면, 제2항이 없더라도 이혼소송에서 소를 취하하거나 취하간주된 경우 고소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제1항이 있는 한, 이혼소송의 계속이 어떤 이유로든(소장 각하든, 소각하판결이든, 취하든 간에) 소멸되면 그에 따라 고소의 효력 역시 소멸된다.
그런데도 굳이 제2항을 둔 것은, 제232조 제2항의 재고소 제한의 효과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이재상 교수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p.192 14-16행)

정리하자면, 이혼소송의 계속이 (사유 여하를 막론하고) 소멸하면 제229조 제1항에 의해 고소의 효력도 소멸한다.(학설은 소급효냐 비소급효냐를 놓고 다투는데, 이 논의는 내가 보기엔 전혀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그리고 소송계속의 소멸이 소 취하와 취하간주에 의한 경우에는(그리고 그 경우에만), 제229조 제2항이 적용되어 고소취소로 간주되고, 그 결과 제232조 제2항의 적용을 받아 다시 고소하는 것이 금지된다.

이렇게 해석하면, 소장각하의 경우에는 제229조 제1항에 의해 고소의 효력이 소멸하고 일단 간통죄 사건은 공소기각판결로(이 경우는 제327조 제2호에 의한 기각판결이다. 고소취소간주규정의 적용이 없으므로 제5호가 적용되지 않는다) 종료될 것이다. 그러나 제232조 제2항이 적용되지 않는 결과, 고소인은 다시 이혼청구의 소를 제기하고 다시 고소를 해서 처벌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소장 각하의 경우 일단 제229조 제2항이 아닌 제1항을 적용하면 이와 같은 결론이 나오는 게 논리적이지만, 아쉽게도 대법원은 첫 단추는 제대로 꿰 놓고 길을 잘못 들고 만다. 95도477 판결의 두 번째 판시사항을 보자.

그런데 법 제232조 제2항은 고소를 취소한 자는 다시 고소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혼소장이 각하된 경우에도 위와 같이 고소가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고소를 취소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는 이상, 이 경우에도 역시 위 규정에 따라 다시 고소하지 못한다고 봄이 위에 본 형사소송법의 각 규정의 입법취지에 비추어 상당하고 이와 달리 오로지 고소를 취소한 경우에 한하여 위 규정이 적용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 (95도477

"이혼소장이 각하된 경우에도 위와 같이 고소가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고소를 취소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는 논리로 대법원은, 제229조 제2항이 아닌 제1항이 적용되는 경우인데도 제232조 제2항을 적용하고 있다. 이는 법률 규정상 근거가 없을 뿐더러, 취하와 취하간주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그 경우만을 특별히 취급하는 제229조 제2항의 존재의의를 간과한 해석이다. 이혼소장이 각하된 경우는, 대법원 말처럼 고소가 효력을 상실한다는 점에서는 고소취소와 같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고소취소에만 부여되는 법적 효과가 소장 각하에도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제229조 제2항과 같은 조문을 '일부러' 두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대법원의 입장은, 학설이 지적하는 것처럼 소장 각하를 취하와 동일하게 취급하기 때문에 잘못인 것이 아니라, 근거 없이 제232조 제2항의 적용범위를 확대하고 있기 때문에 부당한 것이다.



...물론, 가장 심각한 문제는 대법원의 잘못된 해석론도 아니요 대법원의 입장을 오해한 학설도 아니고, 이걸 도저히 답안지에 다 쓰고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6/12/24 00:16 2006/12/24 00:16
  1. ch2
    2007/10/11 05:35
    와, 님 대단하시네여

    저는 지금 형소법 시작하는 공무원 수험생인데, 이혼소장이 각하되면 다시 재고소를 하는 방법이 안나와있길래 끙끙 앓다가 혼자 찾고 있던 중이였거든여. 전 아직 결혼은 안했지만 만약 단지 소장각하라는 이유만으로 재고소를 못하고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그런경우는 없어야 한다는 정의감에 불타서여 ㅋㅋ

    근데 님이 적어놓은 글 보고 감탄했습니다^^;; 절차위반으로 해서 공소기각판결이 남으로써 소장을 다시 쓸수 있게됐군여 ㅋㅋ

    와,속시원하다 잘읽고 갑니다
  2. guna
    2007/10/12 09:45
    와, 님 대단하시네여

    초시때라면-_-이것만 물고 늘어져서 열변을 토하면 과락은 면하게 해줄지도? -_-ㅋ
  3. KCG
    2009/01/19 22:30
    지대로네요~ 지대로야..화이팅하소서







그냥 이것저것.

日常 Posted at 2006/12/03 12:00
1. 책을 살 일이 생겨서 오랜만에 그날에 들어갔는데, 이거야 원. 읽고 싶은 책도 많고, 읽어야 할 책은 더 많다.

사 놓고 안 읽은 책도 만만치 않게 많다.


2. 생일선물로 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 대본을 펴낸 책을 받았다. 워낙 열심히 본 영화인지는 몰라도 대사만 읽어도 장면이 떠오르는게 재미가 쏠쏠하다.

생각난 김에 비포 선셋 디비디를 꺼내서 이 장면 저 장면 건너뛰어가며 봤는데, 역시나 첫 장면이 최고다. 그 짧은 순간 안에 지나간 세월을 담아낼 수 있다니. 영화나 연극처럼, 한정된 시간 안에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경우에는 그 속에서 긴 세월의 경과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게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배우 얼굴에 주름살을 그려넣어 보거나, 그것도 도저히 안 통할 만큼 동안인 녀석한테는 수염을 달아 준다거나 하는 게 주로 쓰는 수법인데, 아무래도 어색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제이크 질렌할(감당못할 정도로 동안 -_-;)한테 회색 수염 붙여줬던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에 비하면, 비포 선셋은 일 처리하기가 참 쉬웠다. 실제로 배우들이 늙어버렸으니까. 분장 안해도 세월의 흔적이 생생하게 얼굴에 새겨져 있다. 그냥 전편의 영상을 오버랩시켜서 현재의 모습과 비교만 해 주면 끝이다. (물론 그 오버랩시키는 타이밍이나 편집이 정말 기가 막힐 정도긴 했지만)


3. 책상을 정리하면서 1순환 때 써 놓은 답안지 뭉치를 발견하고 펴 봤다.
내 답안 쓰는 실력은 퇴보하고 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6/12/03 12:00 2006/12/03 12:00
  1. 하영
    2006/12/14 15:45
    그저 1순환때 "너무" 잘썼던게 아닐까?ㅎㅎㅎ
  2. 리더
    2006/12/17 22:31
    그렇지만은 않아 하영아 ㅋㅋ
  3. onecent
    2006/12/18 01:15
    ㅎㅎ 그래서 더 문제라니까요.
    어째 실력이 늘기는커녕..-_-;







분리이론

쿵푸(工夫) Posted at 2006/10/29 02:01
분리이론은, 제23조 제3항(독일기본법 제14조 제3항)의 직접효력성을 전제로, 그 적용을 배제하기 위한 이론이다. 즉 분리이론은 직접효력설을 전제로 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제23조 제1항,제2항과 제3항을 분리하고, 이러이러한 경우는 제3항은 적용되지 않고, 제1항과 제2항이 적용될 뿐이라고 하면, 재산권 제한을 당한 사람은 법원에 직접 보상청구를 할 수 없게 된다. 보상 어쩌구 하는 문언이 담겨 있는 건 제3항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1항,제2항이 적용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비례의 원칙 위반으로 해당 법률이 위헌무효일 수는 있다. 그런 경우는 취소소송을 통해 처분의 취소를 구하든지 아니면 위헌법률에 근거한 처분임을 이유로 국가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헌법재판소가 분리이론을 수용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직접효력설이 학계의 다수설임을 의식한 것일까?

(이 부분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_-; 우리 헌법재판소가 분리이론을 수용한 이유에 대한 추측으로는 타당할지 모르나, 분리이론의 원산지인 독일의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 설명이다. 독일연방헌재가 분리이론을 도입한 실천적 의의가 무엇이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2006.12.24. 수정)

개발제한구역을 지정하여 그 안에서는 건축물의 건축 등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는 도시계획법 제21조는 헌법 제23조 제1항, 제2항에 따라 토지재산권에 관한 권리와 의무를 일반·추상적으로 확정하는 규정으로서 재산권을 형성하는 규정인 동시에 공익적 요청에 따른 재산권의 사회적 제약을 구체화하는 규정인바, 토지재산권은 강한 사회성, 공공성을 지니고 있어 이에 대하여는 다른 재산권에 비하여 보다 강한 제한과 의무를 부과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기본권을 제한하는 입법과 마찬가지로 비례성원칙을 준수하여야 하고, 재산권의 본질적 내용인 사용·수익권과 처분권을 부인하여서는 아니된다.  [1998.2.4, 89헌마214]

헌법 제23조에 의하여 재산권을 제한하는 형태에는, 제1항 및 제2항에 근거하여 재산권의 내용과 한계를 정하는 것과, 제3항에 따른 수용·사용 또는 제한을 하는 것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전자는 입법자가 장래에 있어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형식으로 재산권의 내용을 형성하고 확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국가가 구체적인 공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미 형성된 구체적인 재산적 권리를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박탈하거나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1999.4.9, 94헌바37]


그리고 89헌마214 판례의 아래 밑줄친 부분의 설시는, 분리이론/경계이론 문제와는 상관이 없고, 다만 헌법불합치 결정의 효력 때문에 인정되는 것이다. (행정법 볼때부터 저 판례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던지 -_-)

도시계획법 제21조에 규정된 개발제한구역제도 그 자체는 원칙적으로 합헌적인 규정인데, 다만 개발제한구역의 지정으로 말미암아 일부 토지소유자에게 사회적 제약의 범위를 넘는 가혹한 부담이 발생하는 예외적인 경우에 대하여 보상규정을 두지 않은 것에 위헌성이 있는 것이고, 보상의 구체적 기준과 방법은 헌법재판소가 결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입법형성권을 가진 입법자가 입법정책적으로 정할 사항이므로, 입법자가 보상입법을 마련함으로써 위헌적인 상태를 제거할 때까지 위 조항을 형식적으로 존속케 하기 위하여 헌법불합치결정을 하는 것인바, 입법자는 되도록 빠른 시일내에 보상입법을 하여 위헌적 상태를 제거할 의무가 있고, 행정청은 보상입법이 마련되기 전에는 새로 개발제한구역을 지정하여서는 아니되며, 토지소유자는 보상입법을 기다려 그에 따른 권리행사를 할 수 있을 뿐 개발제한구역의 지정이나 그에 따른 토지재산권의 제한 그 자체의 효력을 다투거나 위 조항에 위반하여 행한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 [1998.2.4, 89헌마214]


[+] 분리이론에 대해서는 행정법연습 수업 때 발표를 맡은 걸 계기로 글을 하나 쓰게 되었다. 분리이론의 비밀을 풀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_-;
발표문은
http://onecent.x-y.net/tt/entry/분리이론의-수용가능성과-보상규정-없는-공용침해의-구제방법 참조. (2007년 12월 7일)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6/10/29 02:01 2006/10/29 02:01
  1. GS.
    2006/10/30 20:19
    제목을 보자마자 튀어나오는 욕 ㅅㅄㄴ.
    이거 너무 싫어..







어음법에 관한 단상들

쿵푸(工夫) Posted at 2006/10/29 01:18

1. 어음법은 수학과 비슷하다.

'돈을 억지로 받아낼 수 있는 힘'을 '권리'라고 추상화하고, 그것을 종이에 쓴 몇글자로 다시 物化시켜 놓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전제로 했던 채권이 그 자체로 완전히 독립되어 둥둥 떠다닐 수 있게 되는 셈인데, 그것만으로도 고도의 추상적 사고를 요하는데다가 사람들 손을 거쳐가면서 종이에 싸인이 늘어날 때마다 물화되는 권리도 덩달아 늘어나는 게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엄격한 형식성과 그 때문에 나타나는 논리성이 수학과 닮았다.

당장 밥벌어먹고 사는 데 별로 도움이 안되고, 지적 유희에 가깝다는 점 또한 비슷하다.
(지적 유희이기 때문에 어음법이 유독 내 흥미를 끄는지도 모른다)


...물론 수학은 근대 세계의 가장 밑바닥을 닦은 주춧돌인 반면, 어음에 관한 법리는 법학의 기초라기보단 채권법이 갈 데까지 간 최종 결과물 정도일 뿐이다.


2. 어음법을 이해하는 지름길은, 어음은 '물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권리가 화체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권리'에 주목해서는 정상적/비정상적인 배서를 거치면서 얽히고 섥힌 권리관계의 늪에 빠져버리고 만다.

어음은, 그 이전에 있어서는 사실상 동산과 같다. 그러기에 선의취득도 인정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음상 권리'의 취득"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는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아직 확실히 결론을 내린 건 아니지만, 현재 내 생각으론 아예 '틀린' 표현이다) 오해의 소지가 큰 표현이다. '어음상 권리의 취득'이 아닌 '어음의 취득'이라고 하는 게 낫다(또는 그래야 한다).

승계취득/선의취득을 따질 때는, "어음을 누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느냐" 만이 문제가 된다. 그 종이 위에 무슨 권리가 담겨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어음법 제16조 제2항에서는 분명히 "...어음의 소지인이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그 권리를 증명한 때에는 그 어음을 반환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다)

누가 어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느냐(법상의 표현을 빌자면, 누가 '적법한 소지인'인가)가 정해지면, 그 어음에 어떠한 권리가 화체되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이는 서명날인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해결된다.

결국, 교과서들이 언급은 하지만 상세히 검토하지는 않는, '교부행위와 서명날인을 분리하고, 권리의 이전은 교부행위에 의해, 채무부담은 서명날인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는, 일본에 있다는 학설'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라 생각된다.

어음위조의 입증책임에 관한 판례로 유명한 다음의 전원합의체판결 역시 이 점을 (어렴풋하게나마) 설시하고 있다. ('권리'의 귀속 운운한 걸로 봐서는 여전히 '권리의 화체'라는 관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듯하다)

"배서의 자격수여적 효력에 관하여 규정한 어음법 제16조 제1항은 어음상의 청구권이 적법하게 발생한 것을 전제로 그 권리의 귀속을 추정하는 규정일 뿐, 그 권리의 발생 자체를 추정하는 규정은 아니라고 해석되므로, 위 법조항에 규정된 "적법한 소지인으로 추정한다"는 취지는 피위조자를 제외한 어음채무자에 대하여 어음상의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자로 추정된다는 뜻에 지나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기명날인이 위조된 것임을 주장하는 사람에 대하여까지도 어음채무의 발생을 추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대법원 1993.8.24. 선고 93다4151 전원합의체 판결]

이처럼 '어음의 귀속'과 '어음상 권리의 발생유무(존재유무)'를 구분하는 것은, 어음행위의 표현대리 문제, 이른바 '어음의 효력발생시기'의 문제 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열쇠가 된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10/29 01:18 2006/10/29 01:18
  1. 가넷
    2006/11/09 02:07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네가 법대에 들어갔다는 걸 알고는 상당히 의외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어음수표법을 재미있어했던 이유가 수학과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걸 네 덕분에 뒤늦게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 수학이 어려워서(그리고 주변의 권유로) 문과를 택하긴 했다만 수학은 어려워하면서도 상당히 재미있어했던 기억이 난다.
    어음법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것 같다. (지금은 거의 다 잊었지만...)
    재미있지? ^^
    • onecent
      2006/12/24 00:20
      음..의외이셨다니. 역시 전 법대 타입이 아니었던 것일까요.ㅎ

      어음법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이번학기 성적을 받아놓고 나니 참 심란해지는게..;

      ㅎㅎ 뭐. 재미있고 마음에 들지만 실력은 안좋은거.
      저한테 정말 수학하고 어음법은 똑같군요.
  2. 동현.
    2007/08/13 01:44
    어수 1순환에 들어선 수험생 입장으로서 굉장히 흥미롭구나.ㅎㅎ;
    언제 이에 대해서 웅재의 강의를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
    • onecent
      2007/08/14 02:12
      저 판례에서 진짜로 중요한 건 저 부분인 것 같은데 별로 강조가 안되더라구요...

      어음법은 지금 생각해도 진짜 흥미롭고, 그러면서 어려운 과목인듯.ㅎㅎ 아무리 봐도 학설대립이 기억이 안난다는..







remember Penny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6/09/24 11:22


remember Penny Hardaway


..그의 이름은 내 아이디로 남았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9/24 11:22 2006/09/24 11:22







사무라이 참프루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6/08/27 14:32


[카우보이 비밥]을 만든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2004년작, [사무라이 참프루].
와타나베 신이치로는 이것저것 뒤섞어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 따라올 자가 없어 보인다. [비밥]에서는 우주SF에다가 카우보이와 재즈를 섞어내더니 이번에는 에도시대 사무라이에다 힙합을 버무려버렸다.

시대는 에도시대라는데, 칼자루를 마이크삼아 비트박스를 넣는 사무라이가 등장했다가, 페인트통과 붓을 들고 다니면서 단속을 피해 그래피티를 그려대는 사무라이도 나오는가 하면, 대포로 무장한 미국 배의 침공을 야구시합으로 이겨버리는 사무라이도 있는 식이다. 당장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무겐은 검술이라기보단 브레이크댄스에 가까운, 카포에라 비스무레한 신공을 보여준다.

흉내내기 어려운 센스. [비밥]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다. 엔딩에서도 딱 적당한 만큼만 여운을 남기는 게, 구질구질한 거 없이 깔끔하고 좋다.




... 자, 이제 남은 건 돈 모아서 디비디 사고 피겨 사고 하는 일인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8/27 14:32 2006/08/27 14:32
  1. 득희
    2006/09/07 04:00
    오옷 웅재형~
    이게 형이 말씀하신 에니메이션!
    정말 센스 있네요 하핫!
    • onecent
      2006/09/11 11:24
      아니 이게 누구야.ㅎ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오셨나; ㅎㅎ
      웰컴웰컴.

      사무라이 참프루는 진짜로 일부러 시간내서 볼만한 가치가 있어..
  2. 승현
    2006/09/17 23:05
    5화 정도까지 보다가 어찌어찌하여 다 못봤는데..다시 시도해보려구요ㅎ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봤는데 보자마자 와타나베씨 작품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어요; 정말 비밥에서의 스탈과 분위기 물씬-그러면서도 뭔가 다른.







돌아온 슈퍼맨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8/13 15:10

미션 임파서블 3편, 엑스멘 3편, 슈퍼맨 리턴즈, 캐리비안의 해적 2편 그리고 괴물까지. 이번 여름시즌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던 블록버스터들은 웬만큼 챙겨 보았다. 애초에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던 미션 임파서블은 그럭저럭 볼 만했지만, 기대가 컸던 엑스멘 3편은 힘이 부족했고 마찬가지로 고대했던 캐리비안의 해적은 턱없이 실망스러웠다(잭 스패로우와 키라 나이틀리가 무려 두시간 반동안 나와도 역부족이었으니, 할말 다 한거다). 돈 많이 들인 헐리웃 영화 중에선 그나마 슈퍼맨이 제일 나았다(그리고 괴물이 슈퍼맨보다 낫다).

어쩌다 보니 [슈퍼맨 리턴즈]는 두번이나 보게 되었다. 분명 만육천원씩이나 쓸 영화는 아니다. 그래도 연달아 보면서 브라이언 싱어가 영화를 잘 찍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

슈퍼맨 영화를 찍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해보자. 뭐가 가장 큰 문제일까?
스토리가 뻔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일 것이다. 악당이 아무리 그럴싸하게 음모를 꾸며도 결국은 영웅이 악당의 계획을 분쇄하고 정의를 바로세우는 전형적인 구도는 모든 슈퍼히어로 영화가 따를 수밖에 없는 틀이겠지만, 그 슈퍼히어로가 하필이면 슈퍼맨이기 때문이 일은 더 힘들어진다. 슈퍼맨은 너무 쎄기 때문이다. 빛보다 빠르고 총알보다 단단하며 지구를 거꾸로 돌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넘치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면, 아무리 화려한 특수효과를 사용해서 스펙터클한 영상을 보여 준다고 해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가 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슈퍼맨의 지나친 '슈퍼'함은 독이 된다. 미사일을 쏘면 공중에서 미사일을 잡아서 우주로 날려버리질 않나, 지진을 일으켰더니 지각을 파고 들어가서 어긋난 지층을 도로 맞춰놓질 않나, 핵폭탄을 정통으로 맞아도, 그냥 하늘로 올라가서 햇빛 좀 쬐고 나면 완벽하게 회복돼 버린다. 반짝반짝 빛나는 초록색 돌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관객은 슈퍼맨의 안전을 한순간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슈퍼맨이 가장 지키고 싶은 건 로이스 레인이고 그런 탓에 로이스가 주로 위험에 처하게 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로이스가 추락하는 비행기에 타고 있든, 침몰하는 배에 갇혀 있든 별로 걱정이 안된다. 추락하는 비행기는 도중에 잡아서 천천히 땅에 내려놓고, 침몰하는 배는 건져내면 된다. 슈퍼맨만이 사용할 수 있는, 구출방법의 무지막지함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비행기에서 로이스를 탈출시키는게 아니고, 배속에서 로이스를 구해내는게 아니다. 비행기 전체를 잡아서 내려놓으면 그 안에 탄 로이스도 자연히 사는거고, 귀찮게 선실 문 열고 로이스를 찾아서 뭍으로 끌고올라갈 거 없이 그냥 배를 들어올려 버리면 되는거다.

이정도 되면 대규모 재난을 로이스를 비롯한 메트로폴리스 사람들에게 아무리 많이 가해 봤자 영화는 삼십분 정도만 지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루해지고 만다. 슈퍼맨이 구해줄 게 뻔하니까. 어떻게든 긴장감을 줄 만한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 "뻔함"을 어떻게든 완화해야 한다.

more..(스포일러 주의!)

결말이 어차피 뻔하다면, 최소한 결말이 '어떻게' 나오는지는 가급적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야 재미있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슈퍼맨 리턴즈는 그런 점에서 도무지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그리고 볼거리만 물리도록 많은) 캐리비안의 해적이나 엑스멘보다는 확실히 나은 영화다. 물론 어느정도의 "뻔함"은 모든 슈퍼맨 영화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겠지만.


[+] 다만 [슈퍼맨 리턴즈]라는 이름은 한심하다. '돌아온 슈퍼맨'이라고 하면 안될게 뭔가? 그렇게 주어-동사 구조가 좋으면, '슈퍼맨, 돌아오다'라고 해버리면 될 것을. 쯧쯧.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8/13 15:10 2006/08/13 15:10
  1. ㅉㅉ
    2006/08/15 23:36
    나 누구게요? =_=
  2. ㅉㅉ
    2006/08/20 15:25
    그래서 누구란 거야 -_-
  3. 위에
    2006/12/17 22:34
    윤OO이 아니야??







침묵과 열광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6/07/30 12:37

강양구·김병수·한재각, 침묵과 열광 - 황우석 사태 7년의 기록, 후마니타스, 2006
이성주, 황우석의 나라, 바다출판사, 2006


[침묵과 열광]은 황우석 사태의 배후에 놓여 있는 사회구조적 원인으로 이른바 '과학기술동맹'을 지목하고,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황우석 사태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보여 주고자 한다.

"'황우석 사태'의 핵심에는 물론 황 교수의 과학 사기 사건이 자리잡고 있지만, 이 과학 사기 사건이 전 국민적 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전 세계적인 스캔들로 불거진 데는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탓이 크다. 정치권·정부·언론·재계·의학계·과학계의 권력층이 황 교수와 여러 형태의 이해 관계를 맺으면서 '황우석 사태'를 배태시키고 심화시킨 것이다."

황우석 사태를 배태시킨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과학기술동맹'이지만, 정부의 인사들은 문책이 되지 않은 채 여전히 정부의 정책을 결정하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기업들이 이 사태에서 수행한 역할은 아예 부각조차 되지 않았다.

"이번 사태를 황우석 교수라는 한 과학자 개인이…벌인 사기 사건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부정한다. '모두가 황우석에게 속았다'는 식의 평가는 드러난 객관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이번 사태를 책임져야 할 관련자들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불순하기조차 하다. 반성과 문책이 수반되지 않은 일은 다시 벌어지는 법이다."

한편에는, "좀처럼 존경할 만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던 한국 사회의 열등감과 공허감을 일거에 극복해 줄 영웅으로 인식"됐던 황우석에 대한 맹목적이고 "다분히 애국주의 색채를 띤" 열광이 있다.

논문 조작이 밝혀지고 '황우석 사태'가 이제 결말에 접어들고 있는 시점에서도, 황 교수에 대한 열광은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이제 그 애국주의적 열정에는 비장감마저 보인다.… '황우석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렇다. 황우석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것을 잉태시킨 사회구조적 원인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부와 기업, 그리고 과학기술은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다시 밀월관계를 맺을 테고, 그 과정에서 실험 과정의 투명성과 윤리성(난자 채취 문제가 제대로 거론되지도 못했던 점을 기억하라)은 짓밟힐 것이다. 거기다 한국의 대중은 '국익'이란 커튼으로 언제든지 모든 것을 덮어 버릴 태세가 되어 있다.

[황우석의 나라]의 저자 이성주는 동아일보 의학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는 황우석 사태를 지켜보다 언론의 행태에 환멸을 느껴 2006년 사직서를 내고 14년간의 기자생활을 접고 이 책을 썼다. 그런 탓에 언론사 내부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저자는 포퍼(K.Popper)에게서 영감을 얻어 황우석 사태를 낳은 언론과 과학계, 정치권의 문제점이 바로 '민주주의 시스템'의 부재라고 진단을 내리는데, 이는 어찌 보면 식상할 정도로 타당한(당연히 여기는 것이지만 그 당연한 것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지적이라 할 것이다.

황우석에 대한 열광은 한국의 대중을 움직이는 동인의 한 발현에 불과하다. (가령, 여길 한번  찬찬히 살펴보라. 그 이면에 깔린 심리는 황우석 사태에서 드러난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어째서 그런 열광이 가능한 것일까 하는 것이 바로 내가 가장 흥미가 있었던 점이었고 황우석 사태에 관련된 책을 찾은 이유이기도 했다. [침묵과 열광]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황우석의 나라]는 서문에서 "왜 우리는 황 교수에게 그렇게 열광을 했고…극단적인 행태를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현대 정신의학의 여러 이론을 통해 설명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본문 내용은 '왜' 그러한 열광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나타난 현상들을 "부인"이니 "투사"니 하는 전문용어로 포섭시키는 정도에 불과하다. 나의 의문점들에 대한 답은 아마도 대중심리학 책들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두 권을 굳이 다 읽을 필요는 없고, 보다 총체적인 관점과 다양한 문제제기, 그리고 깊이 있는 분석을 보여 주는 [침묵과 열광]을 꼼꼼히 읽어보면 될 듯하다. 황우석 사태는 이미 지나갔다. 그러나 그에 대한 치열한 반성은 반드시, 언제까지고 계속되어야 한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7/30 12:37 2006/07/30 12:37
  1. 재학
    2006/07/30 16:32
    허생이 말한 것처럼, 땅이 좁고 사람이 적어서 그래요..
  2. onecent
    2006/08/06 18:27
    사람이 적은거 같진 않아 딱히;;; ㅎㅎ

    그나저나 너 언제쯤 귀국하냐.







X-Men 3 : The Last Stand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7/16 18:15
2006년 6월 14일 수요일, 메가박스 1관, 조조(08:20)

기다리고 기다리던 엑스맨 시리즈의 마지막편. 1편과 2편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떠나고 브렛 래트너(러시 아워 시리즈의 감독이다)가 새로 연출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약간 불안해 했던 게 사실이다. 래트너는 원래부터 엑스맨 시리즈의 대단한 팬이라 열심히 영화를 만들었다는 소문이었지만, 슈퍼히어로 영화라고 해서 꼭 그 슈퍼히어로의 팬이 더 잘 만들 수 있는 건 아닌 법이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멘은 코믹북 시리즈의 영화화 붐에 불을 당긴,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정작 싱어 자신은 제의를 받고 나서부터 만화책을 찾아서 읽어보기 시작했다고 하고, 다 죽어가던 배트맨 시리즈를 기사회생시킨 크리스토퍼 놀런 역시 특별히 만화 배트맨에 심취해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영화 잘 찍는 감독(싱어의 대표작은 유주얼 서스펙트, 놀런은 메멘토)이 슈퍼히어로 영화든 뭐든 다 잘 찍는 거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찾아 본 예고편은 불안감을 어느 정도 없애 주었다. 비스트와 엔젤, 저거넛 등 그동안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캐릭터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 기대감을 갖게 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캐릭터인 갬빗은 이번에도 영화 진입에는 실패한 모양이었지만, 어차피 이미 나와 있는 인물들만으로도 러닝타임이 모자랄 정도니 어쩔 수 없다.

개봉일(14일) 전날 메가박스 상영시간표에 '엑스맨'이 떠 있는 것만 보고 허겁지겁 달려가서 헛물을 켜는 우여곡절(그날은 시사회였다. -_-; 시사회 표도 없이 시사회장에 난입하려 했던 셈이다) 끝에, 개봉일 조조로 볼 수 있었다.

뚜껑을 열어 본 결과... 내 불안감이 현실로 드러났다.

[엑스맨 3]는, 전편들을 능가하는 규모의 액션을 보여 준다. '최후의 전쟁'이라는 부제답게, 매그니토 편의 돌연변이들과 엑스멘의 전면전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매그니토가 그야말로 '엿가락처럼' 구부리는 인상적인 장면에서부터, 매그니토와 파이로가 합작해서 선보이는 불붙은 자동차 공격이랄지, 키티 프라이드와 저거넛의 추격장면 등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볼거리를 많이 제공한다고 해도 이번 엑스멘은 전편들에 비해 힘이 떨어진다. 전편보다 더 많은 캐릭터가 등장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너무나 많은 인물들이 별다른 활약 없이 버려지고 만다. 명실상부 주인공 자리를 꿰찬 울버린에게 비중이 실리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악당 우두머리인 매그니토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캐릭터들은 그야말로 눈요기거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스톰과 아이스맨, 파이로, 키티 프라이드나 비스트는 그래도 전투에서나마 자기 능력을 발휘했다지만(특히 아이스맨은, 잠깐이었지만 만화책에서의 모습 - 온몸이 얼음덩어리인 모습 - 을 보여 주었다), 매그니토 편에 서서 등장한 대부분의 캐릭터들, 그리고 특히 콜로서스와 엔젤은 전투씬에서조차 심하다 싶을 정도로 버림받았다. 그들의 만화책상의 비중을 생각한다면 아쉽기 짝이 없다.

날개 한번 제대로 못펴본 엔젤

전투장면에서 능력 보여주는 것도 제대로 안 되는 마당에, 각 캐릭터들의 갈등관계나 심리묘사가 가능할 리가 없다. 키티-아이스맨-로그의 삼각관계는 공감할 틈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고,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진(피닉스)의 자기분열 역시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진이 피닉스로 각성한 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영화 한 편에, 그것도 다른 스토리라인(큐어와 관련된 스토리)과 함께 밀어넣기에는 너무 대규모였을지 모른다. 감독은, 트릴로지의 마지막이라는 점 때문에 가능한 많은 것을 보여 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전편들에 비해 대사의 맛깔스러움이 많이 떨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짤막하지만 그러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기고,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대사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1편에서 울버린이 "그게(손톱이) 나올 때, 아픈가요?" 라는 로그의 질문에 단 한 마디로 "매번"이라고 내뱉는 장면이나, 2편에서 매그니토가 막무가내로 진입하겠다는 울버린을 비웃으며 "그래서 어쩔 텐가, 손톱으로 긁기라도 하려고?" 하고 조소하는 장면처럼 기억에 박히는 장면이 없었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체스판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매그니토가 나오는 장면만은 예외다) 그와 같은 강한 인상을 남겨야만 하는 순간 - 싸우러 가기를 주저하는 엑스멘을 울버린이 독려하는 장면 - 에서 3편은 맥없이 실패한다. (울버린의 말에 다들 독려가 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좀더 불평을 해 보자면, 울버린의 얼굴이 핀 게 마음에 안들었다. 울버린이 처음 스크린에 등장하던, 1편의 그 장면을 기억하는가? 철창 안에 갇혀서, 얼굴도 드러나지 않은 채 그림자에 묻혀서는 시가 연기를 내뿜는 게, 흡사 성난 맹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미간은 잔뜩 찌푸리고, 상처는 나는 족족 나으니 어디 아픈 데는 하나도 없을 게 분명한데도 마치 십년 동안 두통을 앓고 있었던 것 같은 표정에, 과연 이녀석이 우리편인지 적인지 도무지 모호한, 바로 그 절반쯤은 악마같은 얼굴이 울버린의 매력이었다.

그런데 3편의 울버린은 너무 표정이 밝다. 미간의 주름살도 거의 풀렸고, 심지어 짜증내는 사이클롭스를 차분히 달래주려고 하기까지 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머저리같은 놈, 짜증내려면 골방에 처박혀서 너 혼자 질질 짜라' 정도의 대사를, 그 특유의 '대꾸하면 머리에 바람구멍을 세 개 내 줄테다' 라는 표정으로 내뱉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영화를 보면서 '브라이언 싱어를 돌려줘!' 라고 생각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엑스멘을 버리고 간 브라이언 싱어지만, [슈퍼맨 리턴즈(!)]를 선사해 줬으니 또 뭐라고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엑스맨 3편은 분명 영화값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오락영화이긴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데는 미치지 못했다. 1편이나 2편은 기꺼이 두 번씩 보러 갈 정도였으니 이 차이는 꽤 크다. 트릴로지의 마무리가 약간 미진한 것 같아 못내 아쉽다. 그나마 마지막 장면에서는 신나게 해 줬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7/16 18:15 2006/07/16 18:15







2006년 5월 6일 토요일(사실은 7일 일요일 새벽), 메가박스 2관, 심야(0:20).

여름시즌의 첫 테이프를 화려하게 끊은 미션 임파서블 3. 사이언톨로지에 심취해 독특한 행태를 보이는데다 케이티 홈즈에 빠져서 보기 안 좋을 정도로 허우적대는 모습 때문에 미국에서는 탐 크루즈의 관객 동원력이 예전같지 못한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박스 오피스 성적이 신통찮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미국 이외의 나라들에서는 꽤나 흥행 성적이 좋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현지만큼 탐 크루즈에 대한 가십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탓일 듯하다.

1996년에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1편은 꽤나 재미있게 본 영화였다. 비록 스토리가 너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탓에 두 번째 볼 때서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제대로 알 수 있었지만.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인 얼굴 뜯어내기(;)가 신선했다. 잊을 때쯤이면 돌연 아래턱께를 붙잡고 부욱 하고 얼굴을 잡아뜯어 버리는 바람에 그 때마다 허를 찔리곤 했다. 처음 볼 당시에는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도 못 하고 있던 터였기에 막판에 범인의 정체가 드러날 때는 꽤나 충격을 먹었던 기억도 난다.

1편의 성공을 뒤에 업고 2000년에는 속편이 개봉했다. 탐 크루즈의 장발 헤어스타일, 그리고 오우삼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점이 화제를 끌었던 걸로 기억한다. 난 일찌감치 기대를 접고 극장까지 찾아가서 이 영화를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시 오우삼의 '대놓고 개폼잡는' 액션 스타일 - 날아오르는 흰 비둘기떼, 휘날리는 롱코트에 선글라스 등등 - 은 이미 식상해지고 있던 터였다. 97년의 [페이스오프]에서 헐리우드는 오우삼의 개폼잡기에 매료됐고, 99년의 매트릭스 1편에서 개폼잡기 액션은 정점에 오른다. 그 이후로 오우삼 스타일의 액션은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었고, 같은 스타일을 답습하면서 단지 액션의 스케일과 액션장면의 길이만을 늘린 영화들은 줄줄이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미션 임파서블 2는 그 대표적인 예고, 매트릭스 속편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나 다를까, 미션 임파서블은 예전 텔레비전 시리즈와는 동떨어진, 전형적인 오우삼 영화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탐 크루즈는 생김새만 다를 뿐이지 하는 짓이나 격투솜씨까지 사실상 주윤발이나 다름없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가운데, 롱코트 대신에 롱트를 휘날리며 권총을 쏴대고 공중을 가르며 날라차기를 해 대더니만, 급기야는 모래사장에서 단순한 발구르기 한번으로 땅에 놓여 있던 총을 튀어오르게 하는, 네오 수준의 사기 기술을 선보이기에 이른다. 이건 해도 너무했다. 난 나중에 티비로 이 영화를 봤는데, 예상했던 만큼,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만큼 엉망이었다.

그러다 5년 만에 세 번째 영화가 개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편보다는 훨씬 낫지만, 1편보다 월등히 나은지는 잘 모르겠다. 감독은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 [로스트]의 연출을 맡았던 J.J. 에이브럼스로, 영화 연출은 처음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정말 글자 그대로 '숨쉴 틈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는데, 완급조절에 좀 문제가 있다 싶을 정도다. ('급'만 있지 '완'은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영화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맨 처음에 배치하는 편집방식 때문에, 시작하는 순간부터 긴장의 연속이다. 한 사건이 해결됐나 싶으면 더 큰 사건이 터져 버리고, 가까스로 대처했나 싶으면 또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는 식이다.

1편이나 2편과 마찬가지로, 사건들이나 그 해결과정에 개연성은 별로 없다.  탐 크루즈는 주윤발 수준에서는 한 발 물러섰지만, 여전히 하는 짓들을 보면 엑스멘에서 스카웃 제의가 왜 안들어오나 싶을 정도다. (그러고 보면, 극중 크루즈의 역할인 이단 헌트의 능력치는 머리 길이와 깊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3편의 머리길이는, 1편보다는 조금 길고 2편보다는 많이 짧다) 머리가 길수록 무시무시한 파워가 나오는 건 아닐까? 대체 이녀석 정체가 뭔가? 삼손의 환생인가?

그러나 여름 블록버스터 영화, 그것도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액션영화에 그런 개연성을 기대하는 사람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신기하고 화려한 첨단장비(가면 만드는 기계가 신기함의 최고봉을 달린다)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보고 즐기면 그만이다. 거기다 별로 하는 일은 많지 않지만 소름 돋을 정도로 기분나쁜 악당(오웬 데이비언 역을 맡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알고보니 작년에 아카데미상을 탄 배우였다;)도 있겠다, 다리 위의 전투장면과 같은 멋있는 액션 장면이 중간중간 등장해 주니 이정도면 썩 괜찮은 셈이다. 어떻게 평범한 간호사인 이단 헌트 약혼녀가 그렇게 총을 잘 쏘느냐, 세상에 주먹으로 하는 인공호흡도 있느냐 하며 비웃기도 하는데, 어차피 주인공 죽을 리 없다는 건 표 사는 순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애교로 봐 줄 수 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7/02 15:36 2006/07/02 15:36
  1. 종현.
    2006/07/14 23:16
    그치만 난 이단이 죽는 줄 알았다고.
  2. 승현
    2006/07/21 23:21
    ㅋㅋ 저도 죽는 줄 알고; "오옷! 헐리웃 영화에서 사상 최초로 주인공이 죽는구나-"라며 신기해하고 있었는데...;;
    • onecent
      2006/08/06 18:28
      역시 말도 안돼. ㅎ
      탐크루즈는 우주전쟁에서도 안죽었다구. 외계인이 쳐들어와도 안죽는 마당인데.. ㅎㅎ







피닉스 너마저..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6/06/04 12:37

동부지구는 마이애미가 디트로이트에게 4대 2로 승리.
지난 3년간의 철벽수비와 팀워크는 어디로 갔는지. 한두명의 슈퍼스타를 믿고 날뛰던 녀석들에게 농구는 다섯명이서 하는 경기라는 걸 깨우쳐주던, 벼랑끝에 몰릴수록 더 강해지던 디트로이트 피스턴즈는 온데간데 없었다. 동부의 절대강자로 군림하던 피스턴즈의 시대는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이렇게 열렬한 홈 팬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피닉스 선즈도 조금 전 댈러스 매버릭스에게 6차전을 지고 말았다. 서부지구 결승 시리즈는 댈러스의 4대 2 승리.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매 시리즈마다 드라마를 연출해 내던 신데렐라 팀 피닉스의 기적적인 행진도 끝났다. 피닉스 팬은 아니었지만, 올해 플레이오프를 지켜보면서는 이 팀을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라운드에서 밥맛없는 코비에게 제대로 한방 먹여 준 것만으로도 피닉스 팬이 돼 줘야 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응원하던 팀들은 모두 져 버렸다.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사진 출처는 NBA.com)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6/04 12:37 2006/06/04 12:37







다빈치 코드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5/21 18:11

주말 동안 침대를 뒹굴거리며 [다빈치 코드]를 읽었다. 남들 다 읽을 때는 청개구리 근성으로 안읽겠다고 유치하게 뻗대다가 결국에는 사정없이 뒷북을 치고 마는 이 꼬락서니라니.

소설을 읽지 않았던 탓에 다들 들뜬 마음으로 영화의 개봉을 기다릴 때도 심드렁했었던 게 사실이다. 기가 막히게 재미있다는 평가가 나오지 않는 한 일부러 보러 갈 생각도 아니었다. 예고편에서 본 톰 행크스의 헤어스타일을 두 시간동안 참아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은 어찌어찌하다가 어제 형 책장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형도 선물받고는 읽을 생각을 안했던 모양이다)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꽤나 재미있게 읽었다. 중간중간 일부러 컴퓨터를 켜서 다빈치 그림을 찾아봐 가면서.

영화화하기 참 좋은 소설이다. 불과 이틀 정도의 시간에 걸친 이야기를 다룰 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에 곳곳에서 전개되는 장면들을 챕터를 잘게 나눠서 왔다갔다 하면서 서술하고 있어서 흡사 속도감 살린 편집을 염두에 둔 헐리우드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것 같다. 별다른 각색 없이 바로 크랭크인해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소설을 먼저 읽고 나서 영화의 예고편을 봤더라면, 내 나름대로 그려 놓은 로버트 랭던 박사의 이미지에 톰 행크스를 맞춰 보고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예고편에서 본 톰 행크스의 모습이 머리에 박혀 있는 탓에 소설 속의 랭던 박사를 톰 행크스에 끼워맞추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랭던 박사는 내게 우스꽝스런 헤어스타일을 한 사람의 이미지로 각인되고 말았다. 톰 행크스가 랭던 박사 역에 적절한 선택이었는지 어떤지는 나로선 알 수 없게 됐다.

영화는 소설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모양이고, 그 탓에 책을 읽은 사람들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할 거라는 게 지배적인 평가인 듯하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난 지금, 영화 상영 금지를 외치는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간접적으로라도 시위하기 위해서 기필코 영화를 봐 줘야겠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6/05/21 18:11 2006/05/21 18:11







재수

日常 Posted at 2006/05/20 23:36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1&article_id=0001301531&section_id=100&menu_id=100


이 뉴스를 보고는 형이 내 방에 들어와서 조금 전까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한참동안 불만을 토로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나도 침 튀기면서 독설을 퍼부었을만한 일이었지만, 청개구리 근성이 워낙 지독한지라 난 다른 사람들이 열을 낼 때는 오히려 차분하게 대응하는 습성이 있다. 저 뉴스를 보고 어이없어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라면 있는 힘껏 핏줄을 부풀려가며 투덜대 줘야겠지만, 이미 투덜대고 있는 사람 앞에서라면 그렇게 애쓸 것도 없잖은가.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이거다. 우린 축구에 미친 나라에 사는 축구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거 참, 재수 지지리도 없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6/05/20 23:36 2006/05/20 23:36
  1. 동현
    2006/06/05 01:30
    글쎄..축구에 미쳤다기보다는 "월드컵"에 미쳤다고 해야겠지;;







[말아톤 - 감독 정윤철 출연 조승우, 이미숙, 이기영]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만큼 행복한 때는 없다. 좋아서 하는 일인만큼 의욕은 충만하고, 자연스레 더 잘 하려고 애쓰게 된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일은 점점 잘 하게 되고 잘 하게 되니 더 좋아지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보다는 억지로 시켜서 하는 일에 쏟는 시간이 더 많은 게 현실인 듯하다. 어려서는 하기 싫어 죽겠는 공부를 엄마가 시켜서 마지못해 하고, 나이가 웬만큼 들어 엄마가 시키는 일은 없어지나 싶더니만 이제는 '앞으로 먹고살 일'이 그 억센 손아귀를 옥죄어 들어온다. 좋아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이 일치하는 삶, 그런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삶을 누리려면 일단은 자기가 진짜로 좋아하는 일이 뭔지를 찾아내는 게 급선무다. 그래야 그걸 온 힘을 다해서 하면서 기쁨을 누릴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그 일을 통해 '먹고살 일'까지 해결하는 방법도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체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뭐지?
...

[말아톤]에 나오는 윤초원은 달리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초원이가 달리기를 '잘'하는 건 분명하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곧잘 우수한 성적으로 완주해 낸다. 그렇지만 정작 초원이는 힘들여 완주해 내고 나서도, 메달을 따내도 속시원하게 웃지조차 않는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건 초원이 옆에 있는 엄마다. 엄마는 아들이 자랑스럽고, 기쁘다. 애한테 좋아하는 걸 하나 만들어주고 싶었고, 나는 해냈다. 봐라. 초원이는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가...

이쯤 되면 아까의 말을 바꿔 쓰는게 맞을 듯하다.
"윤초원은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윤초원의 엄마는 생각한다/믿고 있다/믿고 싶어한다.

엄마는 아들을 위한답시고 아들에게 달리기를 배우게 하고 계속해서 달리기 연습을 시켰지만, 그건 엄마 자신의 욕망을 (헛되이) 채우기 위해서였다. 초원이는 초코파이가 먹고 싶어서,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 엄마한테 혼나기 싫어서 달리고 또 달렸을 뿐이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엄마가 자기 손을 놓아버릴까봐 무서워서. 어렸을 때 동물원에서 자기 손을 놓아버렸던 것처럼..

엄마는 이 사실을 "20년이 걸려서야" 깨닫는다. "초원이는 달리는 걸 좋아해. 그래서 시키는거야"라면서 엄마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다. 달리기를 시키고, 그렇게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잘 달리는 초원이를 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원이보다 하루 더 늦게 죽고 싶다"는 엄마의 소원은, 영화에서 초원이의 달리기 코치가 정확하게 간파해 내듯이, 초원이가 엄마 없이 하루도 못 살기 때문이 아니라 엄마가 초원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초원이는 엄마의 욕망에 사로잡혀 질식당하고 있다. 그래서 엄마는 초원이를 놓아주기로 한다. 억지로 힘든 마라톤을 시키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엄마가 초원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던만큼, 이제껏 초원이도 행여 놓칠세라 그런 엄마를 단단히 그러쥐고 있었다. 엄마가 초원이를 놓아 주자, 고삐에서 풀려난 초원이의 욕망은 스스로 작은 목표물을 붙잡는다. 그건 바로 달리기였다.

달리기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작업을 하게 된 초원이는 달리기를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달릴 때 얼굴에 부딪히던 맞바람을 떠올리고, 그 순간 느꼈던 행복을 기억해 내기 시작한다. 달리고 싶다. 엄마가 달리라고 시키지 않아도, 엄마가 달리면 안된다고 해도!

오로지 달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춘천까지 혼자 버스를 타고 온 윤초원. 뒤따라온 엄마는 출발선 근처에서 초원이를 찾아낸다.

엄마가 이제부터 마라톤 안한다고 했잖아.
오늘은 춘천 마라톤 하는 날.
아니야. 이제 이런 힘든거 안해. 집에 가.
오늘은 10월 10일! 춘천 마라톤 하는 날!
뭐하는 짓이야 이게!
오늘은 초원이 사십이일구오 달리는날!
연습 제대로 못했어. 도중에 쓰러질거야.
초원이 엄마 말 들어. 엄마 말 듣는 사람 착한 사람이지?
가서, 짜장면하고 탕수육 먹자. 가자.
(...)
뛰다가 도중에 쓰러지면 주사 맞아야 돼. 주사 맞고 싶어?
...안 쓰러져.
초원이 안 쓰러져요.


가끔, 배우가 내뱉는 대사 한마디가 마치 영화관 전체를 뒤흔드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네오의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Because I choose to)" 가 그랬고, 샘이 다 죽어가는 프로도에게 "그걸 대신 들어드릴 수는 없지만, 당신을 들고 갈 수는 있어요 (I can't carry it for you, but I can carry you)" 라고 말했을 때가 그랬다. 그리고 윤초원의 바로 저 "안 쓰러져" 역시, 비록 아무런 웅장한 배경음악도 없고 의도된 극적 장치도 없었지만, 영화관을 뒤흔들고도 남았다.

자폐증이 있는 초원이는 영화 내내 스스로 말을 하는 적이 없다. 그가 하는 말은 어디선가 들은 말의 반복일 뿐이다. 텔레비전에서 들은 그대로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초원에서는.."이라고 줄줄 따라하고,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라며 엄마가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할 뿐이다. 그와 조금이나마 대화하기 위해서는 그가 따라할 수 있는 말을 질문에 선택지로 포함시켜서 해 줘야 한다. "오늘 끝까지 달릴 수 있어, 없어?"/"있어."  "초원이 힘들어, 안 힘들어?"/"안 힘들어." 이런 식으로. 지하철에서 얻어맞아 아프고 어쩔 줄 몰라하는 상황에서도 초원이는 언젠가 엄마가 했던 말,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를 되풀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모른다. 엄마가 병원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슬퍼하면서도 "비가 주룩주룩 내려요"라고, 엄마가 따라해보라고 자신에게 해줬던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 윤초원이 마침내 스스로 말한다. 안 쓰러질 거라고. "초원이 쓰러져, 안 쓰러져?" 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렇게 좋아 못살던 짜장면도, 탕수육도 거부하고, 엄마 말 듣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도 거부한다. 주사 이야기만 하면 경기를 일으키던 그에게 급기야 엄마는 주사로 위협한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초원이는 "안 쓰러져"라고, 비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지만 힘있게 선언한다. 막무가내로 앞뒤 안가리고 안 쓰러지고 따라서 주사도 안 맞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쓰러질지도 모르고 주사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쓰러지지 않겠다, 그리고 달리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저 한 마디가 나오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뒤로는 일사천리다. 달리다가 쓰러질 뻔하지만 다시 일어서고, 누군가 쥐어준 초코파이를 버리고 달리는 그 자체를 즐기며 결승점을 통과하고. 그리고 마침내 진짜 기뻐서 웃을 때까지.

이제 또 앞서 말한 문장을 고쳐야 한다.
윤초원은 달리기를 좋아한다.

...

날 때부터 진짜 좋아하는 것 한 가지를 머리에 각인한 채 태어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좋아하는 일도, 그 출발점을 더듬어 가다 보면 최초의 순간에는 뭔가에 의한 강제가 있었을지 모른다. 초원이한테 달리기가 그랬듯이, 억지로 시켜서 시작한 일이지만 그게 나중에는 그 자체로 기쁨이 될 수도 있다. '하다 보면 정 든다'는 말도 있잖은가? 그렇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정 들때까지 무작정 괴로움을 견디면서 억지로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대체 뭔가?
이거, 정말로 쉽지 않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5/14 15:46 2006/05/14 15:46
  1. 하영
    2006/05/14 16:34
    이런 면에서도 감동적인 영화였구나!
    • onecent
      2006/05/20 23:38
      다시 봐도 저 장면에서는 가슴이 북받쳐오더라구;
      대한민국의 모든 어머니들이 봐야 할 영화야.
  2. 승현
    2006/05/19 00:36
    이 질문 때문에 정말 미치겠다는;;ㅠ
    • onecent
      2006/05/20 23:38
      그렇지? 미칠 노릇이야.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세상 사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게 재밌기도 한 일 아니겠어? ㅎ
  3. J.
    2006/05/19 08:39
    정말 어려운 질문이야.
    그런데 어떨 때 생각하면 그냥 하나의 강박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구..
    • onecent
      2006/05/20 23:39
      강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요, 진짜.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4. nature
    2006/05/21 13:36
    좋으면 좋은거지 뭐 있어??.. 나 너무 쉽게 생각했나..흐음...ㅋ
  5. 초학구파;
    2006/05/22 01:29
    새삼 이 글이 너의 클리셰의 총집결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면 말고;)
    • onecent
      2006/05/22 09:27
      '클리셰의 총집결'이 그야말로 정확한 표현이네그려. ㅎ
      너무 티내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식상한 냄새가 풀풀 풍기지?







서울여성영화제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4/22 20:46



지지난 주 토요일, 올해로 8회째를 맞은 서울 여성영화제에 다녀왔다. "다녀왔다"고는 하지만, 영화는 한편밖에 보지 못했고, 그렇다고 영화제가 열렸던 영화관(신촌 아트레온) 안에서 분위기를 즐기면서 오래 머물렀던 것도 아니었다. 그날 황사는 그야말로 극악무도했는데, 그 누런 모래폭풍을 뚫고 친구들과 신촌에서 점심을 먹고, 상영시간에 딱 맞춰서 아트레온에 들어가서 영화를 관람한 후, 근처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으로 마무리했다. 간결했지만 좋았다.

본 영화는 마를린 호리스(Marleen Gorris) 감독의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s Line)]이었다. 시간상으로 주인공 안토니아의 인생 후반부를 다루는데, 안토니아와 그 딸, 손녀, 증손녀를 중심으로 그들이 주위의 여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냈다. 그들이 꾸려가는 삶은 전형적인 공동체의 모습과는 다르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농장 풍경과 맞물려 유토피아처럼 느껴진다. 안토니아는 물론이고 딸과 손녀 모두 결혼하지 않지만(물론 주변인물 중에는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그들의 삶에는-영화 속 표현을 빌자면-"사랑이 넘쳐흐른다".

안토니아가 마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근처 농장에 사는 농부 바스가 안토니아를 찾아와 (상당히 느닷없고 생뚱맞게;)청혼한다. 안토니아는 좋은 사람인 것 같고, 자기는 아내가 필요하고 자기의 다섯 아들들은 엄마가 필요하다는 게 바스의 말인데, 그에 대한 안토니아의 대답이 아주 재미있다. "하지만 나는 당신 아들들이 필요 없는걸요."
안토니아와 바스는 평생 애인 사이로 지낸다.

시간은 흐르고 행복한 일과 불행한 일, 기쁨과 슬픔이 안토니아의 농장 사람들에게도 찾아오지만, 삶은 계속된다. 안토니아의 친구가 염세주의를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그와 특히 가까웠던 손녀 테레즈와 딸 대니엘라가 실의에 빠져 집안이 우울함에 싸여 있을 때, 안토니아가 무릎을 짚으며 일어나면서 절반은 한숨, 절반은 기합으로 한마디 내뱉는다. "Life is to be lived..삶은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래. 죽지 못해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만큼 살아야 한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4/22 20:46 2006/04/22 20:46







무심코 던진 돌에..

日常 Posted at 2006/04/03 00:24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죄 없이 맞아 죽는 개구리를 살리기 위해, 돌을 던지지 못하도록 팔을 잡아매 둬야 하는가?



...나는 점점 귀족주의자가 되어 가고 있다.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6/04/03 00:24 2006/04/03 00:24
  1. 하영
    2006/04/06 10:02
    귀족주의자? 어떤 의미에서?
    • onecent
      2006/04/11 13:17
      글쎄..돌을 던지지 못하도록 팔을 잡아매선 안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다는 뜻이야.
  2. 이경호
    2006/04/12 22:11
    어쩌면 귀족주의자가 되는 것이 러셀의 역설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좋은 길일지도 모르지. 이상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거야.



    하지만 그래, 정말 위선적일지도 모르지만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는게
    잘못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어느 누구도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 없겠지.
    • onecent
      2006/04/22 19:57
      "이상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은 이해가 간다만, 귀족주의자가 되는 것이 러셀의 역설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네가 설명을 안해주면 나로선 못알아듣겠다;;ㅎ

      모두가 귀족주의자- 아니지, 정확하게 말하면 귀족'주의자가 아니라 '귀족'- 이 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모두가 귀족이라는 말은 결국 아무도 귀족이 아니라는 말하고 같을지도 몰라. 약함을 전제하지 않는 강함은 과연 가능할까?
    • 비밀방문자
      2006/04/24 10:29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onecent
      2006/04/30 19:31
      왜 러셀의 역설 이야기를 했는지는 이제 알겠다.
      하지만 난 귀족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귀족없는 이상향을 꿈꾸는 건 더더욱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지. 귀족들만이 사는 세상이 만약 가능하다면 가장 좋은 거 아닐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과연 약함이 전제되지 않고도 강함이 가능할까 하고 궁금해 하는거고.

      만약 그게 불가능하고, 소수의 강함과 다수의 약함이 필연이라면, 그런 경우 귀족'주의'는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었어.

      난 오늘날의 사회는 약자들로 우글대고 있다고 본다. domination 이야기를 했지만.. 만약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dominate 하고 싶어하고, 그가 실제로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실제로 dominate한다고 해도 그건 전혀 강함이 아니야. 다른 사람을 짓밟고 싶어하는 것이야말로 나약한 자들의 속성이기 때문이지.. 강한 자들의 감정은 경멸이거나 무관심이지 증오나 미움이 아니니까.

      증오나 미움으로 날뛰는 약한 자들이 없어진다고 해도, 경멸과 무관심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야. 죽이려고 던진 돌 뿐만 아니라 '무심코' 던진 돌에도 개구리는 죽기 때문이지.







최근에 읽은 책 몇 권.

日常 Posted at 2006/04/03 00:21
1. George Orwell, 1984

[1984]의 전반부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다. '빅 브라더'로 대표되는 [1984]의 음울한 사회는, 이제는 새삼스레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소설에 등장하는 'Newspeak (新語)'은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윈스턴이 당에 저항하다가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차츰차츰 그의 정신이 산산조각이 되어 결국은 인간성이 완전히 말살되고 마는 모습은 실로 섬뜩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게 항상 잠들기 전, 늦은 밤이어서 무서움이 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최근에는 읽은 책들과 본 영화들은 기묘하게도 서로 겹치는 구석이 많았다. 한창 이 책을 읽던 중에 마찬가지로 음울한 전체주의 사회를 그린 영화(브이 포 벤데타)를 본 데다가, 책 속에 나왔던 고문 장면들이 머리속을 떠돌고 있던 가운데 영화 [청연]에서 주인공들이 끔찍하게(!)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봐야 했다(그러고 보니 [브이 포 벤데타]에도 고문 장면이 나오긴 한다. [청연]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지만;). 게다가 또,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 제목부터가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이다. 이 책에 대해선 아래에서 따로 언급하겠지만, 일단 조지 오웰과 [1984]에 대한 글에서 두 구절을 인용하면 좋을 것 같다.(강조는 내가 멋대로 가한 것이다)

"오웰이 발견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운영자들이 분별력을 갖추기는커녕 자신의 동료들과 더불어 비합리적 충동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 충동에는 권력에 대한 욕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가 상상했던 자유주의가 전체주의의 악몽으로 바뀌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오웰은 생애의 남은 기간 동안 자신이 믿는 사회주의의 인간적·개인적 성격을 강조했다. 비평가들은 고전적 스토아 철학으로 복귀하여 진보를 포기했다는 이유로 오웰을 음울한 작가로 간주한다. 그러나 인간사를 조직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상대주의가 없다면 남는 것은 오직 순수한 절대적 인간성이다. 오웰이 [1984년]에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순수한 절대적 인간성,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1984년은 이미 한참 지났고(다시 한 번, 기묘하게도 난 1984년생이다 -_-), 오웰이 만들어낸 '빅 브라더'는 상투적인 용어가 돼 버렸지만 여전히 이 책은 읽어볼 만하다(나만 빼고는 이미 다 읽어봤을지도 모르겠지만;;). 대신 심약하신 분들은, 윈스턴이 잡혀가는 대목에 이르면 일단 책을 덮고, 그 뒤부터는 밝은 대낮에 읽으실 걸 권한다(네녀석이 겁이 많아서 그래!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읽은 Signet Classics 판에는 에리히 프롬의 서평이 뒷부분에 부록으로 달려 있다. 프롬이 이 책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약간 궁금하긴 하지만, '(드디어)책 한권 다 읽었다'는 기쁨을 빨리 만끽하고 싶어서 "본문은 여기까지야", "남의 서평을 읽으면 자기 생각을 세우지 못해"라고 얼토당토않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책을 덮고 치워버렸다.

2.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 2, 한겨레출판사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언제 읽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 구술면접을 준비한답시고 온갖 책을 다 뒤적거리다가 읽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한창 머리가 깨어나고 있는 중이었고, 박노자씨의 그 책 역시 내가 사회 의식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한창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던 시절에 읽었으니 그의 날카로운 문제제기에 깊이 공감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 몇 년이 흘렀고, 그 시절의 날카로움을 조금이라도 되찾고 싶어서 [당신들의 대한민국 2]를 집어들었다. 바보 되기 딱 좋은 시험공부가 (일시적으로나마) 끝나고 나서 가장 먼저 산 책이 바로 이거였다. 박노자씨는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병영국가 대한민국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 상황에 대한 비판 등 예전의 책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주제들에 대한 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찌 보면 진부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런 문제제기로도 지금의 내 무뎌진 머리에겐 신선한 자극이었다.

3. 윌리엄 L. 랭어 엮음(박상익 옮김),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푸른역사

얼마 전 오랜만에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이 들고 온 책이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라는 책이었다. 재미있는 책이라고 하시면서 원래는 두 권짜리로 된 책 중 첫번째 권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뭐든 따라하고 싶어하는 유치한 제자로서 바로 다음 날 학교 책방에 가서 책을 찾아봤는데,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는 없고, 시리즈의 두 번째 권인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만이 재고가 남아 있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없는 돈을 털어서 (꽤나 비싸다 -_-;;)사서 읽어 보았다.

여러 사람들이 서양 근현대사의 여러 주제에 대해 쓴 글을 묶어 놓은 역사책이다. 한 사람이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서술한 게 아니라 책 전체를 꿰뚫는 연속성은 없지만, 그게 흠이 되진 않는다. 넉넉히 시간을 두고 많은 분량을 한꺼번에 읽는 게 쉽지 않은 나로선 짤막짤막한 글들로 이루어져 있는 게 오히려 이점이 되었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라든가, 영국 엔지니어 브루넬, 그랜드 투어 등,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뉴턴이나 루소, 마르크스와 같은, 비교적 잘 알려진 사람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점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책 중반부 계몽주의-루소-로만주의(낭만주의) 로 이어지는 세 개의 글은, 서로 독립적이지만 내용 면에서 연결되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조망 역시 가능하게 해 준다. 그 부분이 내가 가장 주의를 기울여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계몽주의 시대에서 낭만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은 흥미를 끄는데, 전에 읽었던 [낭만주의의 뿌리]라는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한번 읽은 책의 내용 중에 제대로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는 건 참 분통터질 노릇이다)

'우리 시대에 계몽주의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글 중에서 특히 울림을 주는 구절을 옮겨 놓는다.

"덧없는 충동에 복종하고, 변덕스런 생각을 따르고, 격정에 굴복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무정부 상태일 뿐이며, 그것은 다른 형태의 노예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유인은 법을 따른다. 하지만 그의 자유는, 그 자신이 자유로운 가운데 법을 만들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그리고 그 법이 자신의 환경과 가능성 및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적 검토로부터 출현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성립한다. 그러한 법을 자제심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도록 한다. 이러한 방법을 따를 때, 그리고 안이한 타협이나 절망의 유혹적 마력을 거부할 때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4/03 00:21 2006/04/03 00:21
  1. 승현
    2006/04/08 20:26
    '1984'를 읽은지 몇 년 흐르긴 했지만 그 섬뜩함은 아직도 생생해요.







브이 포 벤데타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4/02 18:04
"...중간에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어."

"우리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고, 어찌 보면 지금 우리 이야기일지도 몰라."

영화가 끝나고 난 뒤, 화장실에서 우연히 들은 [브이포벤데타(V for Vendetta)]에 대한 두 가지 매우 다른 감상이다. 첫 번째 볼멘소리는 고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사람이 같이 영화를 본 친구에게 실망스럽다는 투로 내뱉은 것이다. 두 번째 관전평은 나보다도 좀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역시 그와 함께 영화를 본 듯한 친구에게 한 말이었다.

남의 대화를 엿듣는 게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영화를 본 뒤에는 일부러라도 화장실에 들러서 사람들의 관전평을 주워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포일러 주의]

내용 보기


Remember, remember, the fifth of November.
4월 19일이든, 87년 6월이든, 우리도 기억해야 한다.





[+] 나탈리 포트만은 삭발을 해도 아름다우시다. T_T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4/02 18:04 2006/04/02 18:04
  1. GS.
    2006/04/03 22:17
    저 "T_T" 는 너답지 않다. -_-







이터널 선샤인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3/18 23:53

[이터널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에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을 골라내 지워주는 '라쿠나'라는 가상의 회사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슴아픈 일을 겪게 마련인 탓에, 라쿠나 회사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기르던 개가 죽은 뒤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 개를 잊기 위해 기억 제거 시술을 받으려고 하는 노부인부터 시작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옛 연인을 잊기 위해 회사를 찾은 클레멘타인과 조엘까지.

다시는 꼴도 보기 싫다. 그 사람이 내 머리속에서 사라진다면, 난 더 이상 가슴아파할 일도 없을 것이고, 기분좋게 새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조엘과 크게 싸운 뒤 클레멘타인은 홧김에 기억 제거 시술을 받고, 그 사실을 알고 충격받은 조엘 역시 복수하는 심정으로 클레멘타인을 기억에서 없애 버리기로 한다.

라쿠나 회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영화에서처럼 손님이 들끓을 게 틀림없다. 괴로운 기억을 입맛대로 골라서 도려내 버릴 수 있다니. 나쁜 기억은 싹 지우고 기분좋은 기억만을 남길 수 있다면 삶은 좀더 행복해질 게 틀림없다.

라쿠나 회사에서 일하는 메리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메리는 명언집에서 본 글귀 두 가지를 외우고 다닌다.

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쉽게 잊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실수조차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순결한 수녀의 운명은 얼마나 행복한가! / 세계는 잊는다, 잊혀진 세계에 의해/ 티끌 하나 없는 정신의 영원한 광채! / 기도가 하나씩 받아들여지고, 소망은 하나씩 포기된다.

첫 번째 글귀는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등장하는 말이다. [선악의 저편]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 구절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도 기억과 관련해서 몇 가지를 언급하는데, 그는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불행한 일을 겪고 나서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증오심을 키우는 사람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들은, 니체가 말하는 강한 자와는 거리가 멀다.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가 내용이 비슷하다는 걸 생각한다면, 위의 저 구절 역시 비슷한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하다.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 그 과거의 실수를 계속해서 떠올리며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런 실수를 하다니 쪽팔려 죽겠다' 하는 식으로 괴로워하고 있어서는 결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지나간 일은 어차피 아무리 애를 써도 바꿀 수 없는 법. '쩝. 실수했네. 뭐, 어쩔 수 없지' 하고 툭툭 털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진정으로 강한 자라면 일부터 털어버릴 일도 없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잊어버리고 말 테니까.

두 번째 글귀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에서 발췌한 것이다. 수녀가 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 대한 격정적인 사랑과 수녀로서 지켜야 하는 하느님 앞의 경건함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자기와는 달리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티끌 하나 없는 정신'에 대해 찬미를 보내는 구절이다. 아벨라르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엘로이즈로서는, 차라리 아벨라르를 잊어버리고 신 앞에 부끄럽지 않은, 욕정에 휘둘리지 않는 깨끗하고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클레멘타인과 조엘은,(그리고 메리는) 기억을 지우고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잊은 채, 그들이 예전에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고 다시 서로에 대해 사랑을 느끼게 된다. 메리 역시 기억을 지우기 전과 마찬가지로 하워드 박사를 사랑하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기억 제거 시술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이하게도 그들이 예전에 살았던 삶의 궤적을 똑같이 따라간다.

이들은 잊고 싶은데도 잊지 못해서 괴로웠던 게 아니다. 그들은 애시당초부터 잊고 싶지 않았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그리고 메리는 하워드를 잊고 싶지 않았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워갈수록 자기가 클레멘타인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머리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게 된다. 라쿠나의 기억 삭제 프로그램은 결국 조엘의 머리속에서 어떻게든 숨으려 하는 클레멘타인을 찾아내 전부 지워버리지만,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보는 순간 뭔가에 홀린 듯이 그녀에게 다시 끌리게 되고, 그건 클레멘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패트릭과 함께 있으면서 클레멘타인은 끊임없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불안해하던 그녀는 결국 조엘을 처음 보자마자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둘은 자석처럼 서로 달라붙는다.

패트릭은 과거에 조엘이 클레멘타인에게 주었던 선물을 주고, 조엘이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하면서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과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는데도 클레멘타인은 패트릭을 거부하고, 과거에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을, 거짓말처럼 단번에 찾아낸다. 이런 게 운명이고, 이런 게 인연인 것일까?

그렇게 서로 다시 만나서,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그들이 기억을 지운 적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모르고 처음부터 다시 사랑을 시작했으면 그냥 간단히 문제는 해결됐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싹 지워버리기까지 했는데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만났고, 그처럼 운명적인 사랑으로 엮인 그들, 보기만 해도 전기가 파지직 통하는 그들은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그들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영화 끝. 기분좋은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기분좋게 끝나지 않는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전에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서로 싸우고 헤어졌으며, 심지어 서로를 잊기 위해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메리가 라쿠나 회사의 기록을 전부 빼내서 시술을 받은 사람들에게 돌려보낸 탓에, 그들은 서로 뭐가 마음에 안 들었으며 어떤 점들이 자신을 화나게 했는지, 왜 싫증이 나게 됐는지...등등, 기억 제거 시술을 받기 전 스스로 녹음해 놓은 목소리를 고스란히 듣게 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잊고자 했던 과거를 전부 알아버리고 말았다. 이제 막 서로가 너무나 마음에 들기 시작한 차였는데, 돌연 과거가, 온갖 상처와 아픔으로 가득한 과거가, 그 오랜 시간이 무겁게 그들의 머리를 내려쳤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혼란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시작되려던 그들의 관계는 과거가 되살아남에 따라 이제 끝장이 나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돌아서서 떠나는 클레멘타인을 조엘이 붙잡는다.

Joel: I don't see anything I don't like about you.
난 너한테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하나도 없어.
Clementine: But you will! But you will, and I'll get bored with you and feel trapped, because that's what happens with me.
그렇지만 마음에 안 들게 될 거야!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난 너한테 싫증을 느끼게 될 거고 갑갑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왜냐면 난 그렇게 되게 돼 있기 때문이야.
Joel
: Okay.
그래도 상관없어.

Clementine
: ...Okay.
그래.
Joel: Okay.

그래.

그래도 상관없어. 다시 싸우게 돼 있든 말든, 나중에 서로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든 말든.

이제야말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기억을 지우기 전의 상태로.
지워버린 과거가 되살아났는데도 그 둘은 서로를 놓지 않기로 한다. 그들은 과거를 그대로 끌어안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니체는 '잊어버리는' 자를 강하다고 추켜세운 것이지, 잊지 말아야 할 것,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지워버리고 문제가 해결됐다고 자위하는 사람을 찬양한 게 아니다.
'티끌 하나 없는 정신'이 내뿜는 광채는 창백하다. 그런 건 신에게나 어울린다.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채 빛을 발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게 아닐까. 모래알이 뭉쳐서 진주가 되듯이.

그 둘은 이제 다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비록 시작점에서 끝나지만, 틀림없는 해피엔딩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3/18 23:53 2006/03/18 23:53
  1. 가넷
    2006/03/31 08:29
    영화감상문만 보고도 이렇게 감동받긴 처음이다.
    이번 주말엔 이터널 선샤인이나 빌려볼까.
    아, 지금 시간에 뭐하는 거냐고? 은행이 아직 안 열려서 기다리는 중이야. -_-
    은행 좀 일찍 열고 늦게 닫으면 안 되나... 쿨럭
    • onecent
      2006/04/02 18:42
      그러고 보니..
      .... 이 글, 엄청난 스포일러로군요 -_-;;;

      은행들은 보통 늦게 열고 일찍 닫는 게 대세인듯. ㅎ
  2. 비밀방문자
    2006/06/08 23:21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onecent
      2006/06/17 23:16
      아이고 이런. 그동안 쓰던 스킨에 최신댓글이 안 떠서 새로 댓글이 달린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이터널 선샤인 진짜 괜찮은 영화였죠. ㅎ
      자주 와주시면 저야 고맙죠.
  3. md factory
    2006/10/31 01:14
    와 글 너무너무너무 잘 쓰세요.
    국문학과인데 정말 부러워요. ㅠㅠ 진짜 부럽네요.







1 2 3 4 5 6 7 8 9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