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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2004. 12. 16., 2003헌가12, 판례집 제16권 2집 하, 446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제3조 제2항 위헌제청


"...특정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의 필요성이 아무리 높고 범죄행위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고조된 상태라 하더라도 형법의 기본원칙인 죄형의 균형성을 무시하면서까지 형량을 높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형벌이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잔인하면 일시적으로는 범죄 억지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중벌에 대해 면역성과 무감각이 생기게 될 뿐이고, 나아가 범죄예방과 법질서 수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법질서의 영속성과 안정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뿐이다."


"일찍이 몽테스키외는 “모든 이완의 원인을 살펴보면 이완은 범죄를 처벌하지 않았던 것의 결과이지 형벌을 경감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형벌을 받아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폭정의 결과이다. 폭정은 악당에 대해서나 정직한 사람에 대해서나 동일한 형벌을 과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잔혹한 형에 의해서 사람들이 억압되어 있는 나라가 있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대부분 정부의 폭력의 결과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한 정부는 이런 형을 가벼운 죄에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중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는 규범준수를 담보할 것으로 기대되는 요소로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제재의 양 내지 강도”(Sanktionshöhe)가 아니라 “제재의 개연성 내지 가능성”(Sanktionswahrscheinlichkeit)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즉, 규범을 위반한 경우에 제재가 가해질 개연성 내지 가능성이 높을수록 규범준수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형사특별법은 형법전이 미처 범죄로 파악하지 못했던 신종 범죄의 신속한 규율이라든가 일정 영역에 있어서 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인 규정을 둘 필요성이 있는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제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법률의 철저한 집행을 통하여 범죄를 억지하는 것이 아니라 중형을 규정한 법률의 제정을 국민들에게 홍보함으로써 위하를 통한 범죄의 억지를 꾀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는 폭처법을 포함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형사특별법이 일반법인 형법에 규정된 범죄의 형가중만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중벌주의가 언제나 부정적인 효과만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중벌주의에만 의존하는 형사정책은 문제가 있다. 폭처법의 경우 범죄발생시간이나 장소, 수단, 전과, 상습성 등에 따른 형벌가중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에 대하여 가중처벌하는 것이 반드시 특별법 제정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차이는 그 차이가 중대하지 않는 한 법정형의 범위내에서 해결할 수 있고, 만일 법정형이 이들 범죄의 다양한 유형을 차별화하여 적용하기에 한계가 있다면 법정형을 강화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멋진 글이다.
헌법재판소 실무수습 과제를 하면서 찾아 본 결정문인데, 읽다가 감동해버렸다.
헌재 결정문을 읽으면서 감동한 건 행정수도특별조치법사건(관습헌법사건)에서 전효숙 재판관이 쓴 반대의견 이후로 처음이다.
앞으로 감동적인 결정문이 많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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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7 21:55 2009/04/07 21:55







그랜 토리노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9/04/01 18:36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를 많이 보진 않았다. 최근 영화들 몇 개만 챙겨 봤을 뿐.
미스틱 리버, 밀리언달러베이비, 그리고 그랜 토리노.
저 세 편은 모두 아주 마음에 들었다. 밀리언달러베이비와 그랜 토리노에서는 이스트우드가 직접 출연까지 하는데, 밀리언달러베이비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그의 모습과 참 닮았다.

기름기 없이 마른 몸매에, 얼굴엔 주름살이 짙게 패어 있지만 힘주고 노려보는 눈빛만은 날카롭지 그지없는 모습.
억지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기름기를 뺀 뽕 없는 연출. 그러나 그려내는 이야기는 날카롭기 그지없고, 그의 얼굴에 패인 주름살의 깊이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뇌리에 남겨놓는다. 영화관을 나서서도 몇 번이나 곱씹게끔.

난 미스틱 리버보다 밀리언달러베이비가 더 마음에 들었고, 밀리언달러베이비보다 그랜 토리노가 좋다.
좀 더 찾아서 봐야겠다. 이스트우드가 찍은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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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1 18:36 2009/04/01 18:36
  1. 세진
    2009/04/11 14:30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아버지의 깃발 세트 추천!! +_+







레슬러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9/03/16 14:24


이렇게 훌륭한 영화가 일산 CGV에서는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직장인들은 가 볼 수도 없는 오후 12:10 에 단 한 회만 상영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퇴물에 관한 영화라고 퇴물취급하는 것일까.

가서 꼭 보자. 그나마 한 회 상영하는 것마저도 내리기 전에.


[+] 덕택에 간만에 Guns n' Roses 찾아듣고 있다. 망할 코베인 녀석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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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6 14:24 2009/03/16 14:24
  1. lonelysole
    2009/03/17 09:54
    요즘 영화 많이 보는구먼. 애생기면 영화보기 힘드니 많이 봐두소.

    It was nice talking to you on the phone. As may be the case with you, there are not many guys around me to talk about those issues that I'm so eager to talk about...
    • onecent
      2009/03/20 18:50
      애 생기기 전에 '애인'이 생기면 지금보다 더 많이 보지 않을까.ㅎㅎ

      맞아. 난 가끔 친구들하고도 이야기해보고 그러는데..확실히. 쉽진 않지.









For what it's worth, it's never too late, or in my case, too early, to be whoever you want to be.
There's no time limit, start whenever you want.
You can change, or stay the same. There are no rules to this thing.
You can make the best or the worst of it.
I hope you make the best of it.

I hope you see things that startle you. I hope you feel things you've never felt before.
I hope you meet people with a different point of view.

I hope you live a life you're proud of.
And if you find that you're not, I hope you have the strength to start all over again.

(- 벤자민 버튼이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이야기를 마침내 전해들은 벤자민 버튼의 딸만큼은
카트리나의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용기를 갖고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테니까.

어쩌면 마지막 장면 -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즈를 덮치고 밀려오는 홍수에 거꾸로 가는 시계가 잠기는 장면 - 이 역설적으로 저 말의 가치를 더욱 빛내 준다.

살면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어준 시간을 최고로 값지게 써야 한다.
그리고 내 삶을 값지게 가꾸어 나가는 건 바로 지금부터라도 가능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 데이빗 핀처,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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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3 16:10 2009/03/13 16:10

  1. 2009/05/25 01:36
    원작 소설보다 포레스트검프에 가깝다는 느낌이었음.

    각본은 거의 번역 또는 샘플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거 같다.
  2. onecent
    2009/05/25 22:40
    맞아. 정말 포레스트 검프 비슷했어.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각본 쓴 사람이 같더라고;







아내의 유혹

스크랩 Posted at 2009/03/09 12:44
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309103614&section=06

정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런 몰상식이 소위 '주요' 일간지에 버젓이 실리고 있다는게 놀랍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요즈음은 이런 몰상식을 어떻게 해서든 상식으로 보이게끔 포장하려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사법권 독립, 인간의 기본권 보장과 같은 원칙들은 선진국, 개발도상국 할 것 없이 이제는 전지구적 수준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명색이 OECD 회원국인 대한민국에서 이와 같은 원칙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그와 같이 부정하고 있음을 숨기려 들지조차 않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아내의 유혹'과 기존의 이른바 '막장드라마'와의 차이는, 기존의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살인까지 서슴지 않게 만드는 불륜, 무자비하고 또 그런만큼 비현실적인 복수 등을 소재로 삼아)사람들의 극단적인 욕망을 자극하지만, 그러한 극단적인 욕망 자극을 가족드라마 또는 시대극 등 '통상적인' 드라마 형식으로 포장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기존의 '막장드라마'들이 비현실적인 신생아 바꿔치기나 어이없는 불치병의 돌연발병 등의 '막장'수단을 동원하여 원초적인 감정 자극에 승부를 걸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부끄러워했다면, '아내의 유혹'은 '막장드라마'임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이야기전개의 개연성은 완전히, 그리고 적나라하게 무시당했다. 가끔 보고 있으면 이런 것도 극이라고 방영할 수 있을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사회 전 분야에서 '아내의 유혹'을 찍고 있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들, 인류가 근대의 역사를 통해 확립하려 피를 흘렸고 피를 흘려 지켜온 가치들이 스스럼없이 짓밟히고 있다. 최소한의 변명도 없이, 죄책감을 느끼는 시늉조차 없이.
남은 것은 원초적인 욕망 뿐이다. '힘이 있으니 맘대로 쓰겠다, 참을 이유가 뭐가 있느냐'하는 식의, 원시적이고 물리적인 욕망이다.
그러한 욕망이 본능적인 것이고 어찌 보면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임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의 말을 빌자면) 우리는 본능을 배반할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이다. 민주주의, 법치주의, 사법권 독립, 그리고 인간의 기본권 보장과 같은 원칙들을 기준으로 삼아 본능을 배반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보다 큰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들을 수호하기로 결의했고 우리의 헌법이 바로 그 증거다.

우리가 합의한 원칙들을 그동안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기에, 그래서 안일주의에 빠져 그 원칙들의 의미나 그 소중함을 잊어버렸기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근래에 방영되고 있는 이 거대한 '아내의 유혹'이, 잊고 있던 헌법의 기본 원칙들의 의미와 소중함을 되새겨보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선 점수를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아예 대놓고 헌법원칙을 무시하는 이 한 편의 '막장드라마'가 그러한 원칙 자체의 근간을 허물어 버리고 말 위험성이 훨씬 더 커보인다.
젠장, 시청률은 또 왜 그리 높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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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9 12:44 2009/03/09 12:44
  1. 가넷
    2009/03/17 23:23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어지럽히는 이적단체로서 조중동을 고발한다.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 용인될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아오. 열받어)
    • onecent
      2009/03/20 18:52
      정말..이번 신영철 대법관 사건이 저한테는 한계였던 것 같습니다.
      이건 진짜 아니잖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앞으론 '보지 말라'고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냥 '난 안 본다'에 그쳤다면.







굿나잇, 굿럭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9/03/04 22:49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지 클루니가 연출하고 탄탄한 조연으로 연기까지 한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은, 2005년에 헐리웃에서 제작했고 1950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 그러나 2009년 지금의 대한민국, 즉 행정부와 여당이 방송법 개정을 시도하자 이에 언론계가 반발하고, 사이버모욕죄 도입 여부를 놓고 첨예한 의견대립립이 계속되고 있는 등 '언론의 자유와 그 제한'이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 오늘의 우리 사회에 매우 시의적절한 영화다.

이 영화는 언론의 자유와 관련한 주요 문제를 모두 던져놓는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처벌하고, 그러한 다른 생각은 표현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숨막히는 괴로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일단 그렇게 숨막히는 사회가 되고 나면 그러한 억압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범인에게는 쉽사리 기대할 수 없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
일단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결국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못하는, 논쟁에서 이기지 못하는 부당한 억압은 설득력 있는 말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표현의 자유'란 방패는 그 아래에 한 사람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주는 해로운 독설까지도 보호하고 만다는 것.

말은 분명 양날의 검이다.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는 것도 말이요, 거짓을 꾸며내고 나약한 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것도 말이다.
잘 드는 칼일수록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적절한 사용법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적절한 사용법을 알아내는 것 또한 말로써만 가능하리라는 점이다.
자유가 원칙인 사회에서는 말에 의한 자기치유 가능성이 존재한다. 제한이 원칙인 사회는 자기치유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자유'가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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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4 22:49 2009/03/04 22:49







원피스 구매 결정

日常 Posted at 2009/03/04 22:13

강릉에 머물던 때 만화 좋아하는 가형이 원피스 신간 51권을 잽싸게 빌려왔다.
원피스야 재밌게 보던 터라 그 자리에서 읽어봤는데..
그리고는 전권 구매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_-; 아무리 봐도 이거 진짜 대작이야..



현재는 1권부터 20권까지, 그리고 48권부터 51권까지 모아 놓은 상황.
이거 정말로 백권까지 갈 분위기던데. 책장 한 칸 혼자 다 잡아먹겠구만.

이로써 전권 소장(하기로 마음먹거나)한 만화책은 네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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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4 22:13 2009/03/04 22:13







강릉지원 시보들

日常 Posted at 2009/02/27 09:55


여유가 넘치던, 물 맑고(고기는 없고) 공기 좋은 강릉에서 두 달을 함께한 시보들.
사법연수생실을 정리하면서 시원섭섭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지워보고자 기념촬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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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7 09:55 2009/02/27 09:55
  1. onecent
    2009/02/27 09:57
    앉고 보니 나이순이다-_-;
  2. lonelysole
    2009/02/28 13:39
    ㅋㅋ 그래도 니가 젤 어려보이는군.
  3. 비밀방문자
    2009/03/03 09:03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강릉 생활도 이제 막바지

日常 Posted at 2009/02/25 18:13
두 달간의 강릉 생활이 어느덧 다 끝나간다.
방 계약하고 들어와 짐 푼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다시 짐을 꾸려야 할 시간이다.

어제는 형님들과 낚시를 했다.
낚싯대 드리우고 바위에 걸터앉아 고요한 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온몸으로 여유를 만끽하는 기분이 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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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가 잡히기는커녕 입질도 오지 않았다. 형들 말이 낚시 인생 최악의 날이었단다.
고기도 사람을 탄다는데 내가 어지간히도 싫었나 보다.
내딴에는 '잡히면 사진만 찍고 풀어줘야지'라고 온화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형들 말마따나
강릉이 헤어지는 마당에 정 떼고 가라고 냉정하게 구는 걸지도 모르겠다.
두 달 내내 내가 있을 동안엔 화창하기만 하고 비 한방울 제대로 안 뿌리더니만 지금은 추적추적 비까지 뿌린다. 우산도 없는데.
진짜 정 떼라고 이러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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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18:13 2009/02/25 18:13







괴벨스가 떠오른다.

스크랩 Posted at 2009/02/24 14:54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7476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7358

괴벨스의 이름이 자꾸 머리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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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4 14:54 2009/02/24 14:54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23095149&section=01

조국 교수님 단단히 찍힌 모양이다.
'대통령과의 원탁대화' 안 봤는데, 한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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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3 15:18 2009/02/23 15:1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221722165&code=210000

정부수립 이후 우리는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통해 시장을 창출하고, 이어 국가와 시장이 시민사회를 성장시키고, 다시 시민사회가 권위주의 국가를 전복하며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관계의 발전을 보여왔습니다. 위로부터 근대화의 전형적인 순환경로였지요. 문제는 민주화를 이룬 지금 이 3자간의 상호 균형과 견제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민주화가 시장과 기득권 세력의 자유화로 연결되면서 우리는 시민-민주-공화국가가 아니라 기업-시장-경제국가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내면은 보편적 경로를 이탈하고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사회·평등·복지성의 완전한 일탈입니다. 1인당 GDP 2만달러라는 동일시점에서 공적사회지출 비율을 보면 OECD 국가의 평균은 19.9%였습니다. 그러나 한국(2004)은 OECD 평균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6.3%였습니다. 이것이 지난날 좌파정부라 공격받던 한국 민주주의의 참담한 내면입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최악의 공공성, 사회성조차 외면하고 더욱 탈공공화, 시장화, 친기업화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선진화와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하는 보수담론들이 이토록 명백한 반선진화, 반글로벌 비교통계는 왜 준거로 삼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 비율은 한국이 각각 2.8%(91), 3.5%(95), 6.3%(99), 5.7%(2003)에 불과하나 같은 시기 OECD 평균은 19, 19.9, 19.7, 20.7%입니다. EU 15개국 평균은 각각 22.8, 23.9, 23, 23.9%이고요. 80년의 OECD 평균이 15.0%였음을 고려하면 2분의 1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한 한국사회가 어디에 서 있는지 분명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복지예산’이라는 비판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연간 평균 노동시간 역시 세계 최장입니다. 자살률은 OECD 2배에 달하고, 출산율은 세계 최악입니다. 복지파탄과 육아·교육문제로 인해 출산율은 매년 세계 최저 기록을 경신했지요. 이것이 한국 사회의 삶의 피폐성과 불안정성의 정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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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3 12:02 2009/02/23 12:0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191805165&code=9403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191925451&code=940100


판결에 대한 보도는 판결문 인용이 불완전한 데다가 그나마 인용되는 부분 또한 법리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을 비껴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판결문 전문, 더 나아가 사건 기록을 보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 보도만을 두고 판결문에 대해 논평을 가하는 것은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두 번째로 인용한 기사에 실려 있는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번 유죄판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광고중단을 요구하며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은, 당연히 적법하다. 이는 정당한 소비자의 권리행사이고 넓게 보면 표현의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이 터졌을 당시 검찰측에서 '이차적 불매운동은 그 자체로 위법'하다고 주장한 것은 옳지 않다. 이차적이냐 일차적이냐는, 불매운동이 업무방해행위로서 범죄가 되느냐 마느냐와 무관하다.

그러나 불매운동이라고 해도 그 구체적인 실현방법에 따라 범죄행위가 될 수 있다. 이 사건에서도 문제된 것처럼,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할 정도로 항의전화를 넣는다든지, 가게에 쳐들어가 물건을 파괴한다든지 하는 행위라면 그러한 행위가 공익을 위한 불매운동이라는 정당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 한들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물론 언제나 목적의 정당성과 수단의 위법성 사이를 형량해서 위법성을 조각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따라서 만약 이번에 형사처벌된 사람들이 정말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업무방해행위(협박전화를 무수히 건다든지 하는 행위)를 직접 행하거나 교사한 사람들이라면, 이번 판결에는 잘못이 없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유사 불매운동 사례 가운데 유독 이들만을 수사해 기소한 검찰의 잘못이 사라지지는 않을 터다). 그러나 피고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들은 단지 불매운동 까페를 만들고, 불매운동을 벌일 기업체들이 어디어디인지 알려주고, 불매운동을 홍보하여 회원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뿐이었다면 이들은 무죄다. 피고인들 중 한 명이 말했듯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불매운동을 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기까지 했다면 그야말로 무죄임이 틀림없다. 그러한 방법 외에 대체 어떤 방법으로 불매운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행위만으로 업무방해행위를 공모했다고 볼 수 있는가(내가 보기엔 이번에도 몹쓸 '공모공동정범' 이론은 위력을 발휘했다. 공동실행이 없는 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수만 명의 회원의 세를 이용한 것'을 위력이라고 봤다면 - 다시 말하지만 언론보도만을 보고 논평하는 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 그건 진짜 코메디다. 까페 개설과 까페 운영과 같은 활동이 다수의 세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형태의 대중행동도 형사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에서 가장 큰 문제는 비슷한 형태의 행위에 대해 선별적으로 발동되는 검찰의 수사권/기소권일지도 모른다. 이런 판결이든 저런 판결이든, 형사판결을 끄집어 내는 최초의 행위는 검찰만이 할 수 있다. 그런데 검찰은 기소권을 그야말로 편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거기서 많은 부정의가 발생한다. 난 사시공부할 때부터 기소편의주의는 잘못된 제도라고 생각했다. 연수원 공부를 하면서는 기소유예 제도가 못내 마음에 안 들었다. 다시금 그런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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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9 22:00 2009/02/19 22:00
  1. lonelysole
    2009/02/20 00:23
    요즘 검찰이 기소하는 정치적 사건들이나 그에 발맞추는 법원의 정치적 판결들을 보면, 불의에 분연히 맞서 싸울 용기가 부족한 나같은 사람은 검찰이나 법원에 가지 않은 것이 정말 잘한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로펌에서 지나친 사익의 대변으로 공익을 침해하는 일에 일조하지 않을까 고민했었지만, 실제로 업무를 하다보면 그런 일은, 적어도 내가 하는 업무 분야에서는 거의 없는 것 같아. 오히려 검찰과 법원에서 개개인에게 입신양명과 양심의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 같군.

    소위 법조인이라는 사람들이 권력에 빌붙어 떡고물을 받아 먹으면서 그 알량한 전문성을 무기로 탄압의 도구가 되어 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막상 그러한 일이 이렇게 금방 목격하게 되니 기분이 참 씁쓸하지...

    법비들과 오직 자기가 보는 언론에 나오는 것이 진실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듯. 정말로 본인이 희생자가 되기 전까지는 인식의 틀을 깨기가 너무 힘든 것인가하는 생각이 드네...







앞으로 5주

日常 Posted at 2009/02/10 18:25


5주 남았다.
이걸 풀 때쯤이면 왼손 젓가락질도 능숙해졌을 테고
왼손 양치질은 물론이요 한 손으로 머리 손질하기도 문제없을 터.
잘만 하면 왼손 타자도 200타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팔에 새하얀 캔버스를 달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평소 문신 해보고 싶던 욕망을 마음껏 펼쳐 볼 때인데, 얄궂게도 오른팔을 다치는 바람에 그림은 고사하고 글씨도 제대로 못 쓰는 왼손으로 문신을 새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뜻 이것저것 그려볼 엄두가 안 난다.
며칠 전에 (몹시도)끙끙대면서 한 줄 그려넣어 보긴 했는데, 문제는 너무 손끝에 가까운 지점부터 시작해서 셔츠 소매로 다 가려지지가 않는다는 거다. 조정 들어갈 때마다 당사자들이 그러잖아도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라고 업수이 여길까 걱정되는데 오른팔에 낙서 덕지덕지 해 놓은 석고붕대까지 하고 앉아 있으니 거 참 모양새가 안 산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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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0 18:25 2009/02/10 18:25







향수병

日常 Posted at 2009/01/26 15:40

집 떠나 외지 생활을 한지가 지난해 말부터니까 벌써 한 달 남짓 되었다.
슬슬 집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향수병인가보다.

아침에 일어나 기계적으로 아이팟을 꽂고 음악을 틀어놓던 말미잘 스피커도 그립고.
화장실에서 이 닦고 씻을 때 거울에 붙어서 지켜보던 슈퍼맨도 그립고.
벽에 붙어 있던 다크나이트 포스터도 그립고.

쉬는 날 낮이면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조그만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스탠드를 머리 위로 끌어다 놓고 신문이며 주간지며 읽다 말다 읽다 말다 해서 어디까지 읽어 놨는지도 까먹어 버린 책이며 손에 잡히는 대로 붙들고 읽던 것
그리고 그러다 졸음에 빠지고
졸다 일어나서는 깨야겠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 웨돔에서 커피 한잔 사들고 들어와서
다시 소파에 웅크리고 앉던 것
그것도 그립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밤에 돌아와 아이비를 안주삼아 맥주를 마시며 밀린 스타중계를 보던 것도 그립고.

집에 빨리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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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6 15:40 2009/01/26 15:40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91


기가 차는 일들이 마구 일어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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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5 13:22 2009/01/05 13:22
  1. lonelysole
    2009/01/05 23:33
    요즘 참 기가 찬 일들이 횡행하고 있지. 정말 열심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거나 각색된 매체를 통해 엉뚱하게 사태파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다수인 듯.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말했던 것이 최장집 교수였던가...그런 논의 자체가 사치가 되어버린 현실이야...
    • onecent
      2009/01/13 10:07
      정말이야. 요새 신문 보면 우울한 이야기들뿐이지.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해도 벅찬데 이스라엘에서 전쟁까지 나고...이래저래..

      이런 때일수록 눈을 부릅뜨고 세상 돌아가는 걸 지켜봐야겠어. 그리고 할 말이 있으면 입도 열어야겠지..
    • onecent
      2009/01/14 16:56
      아래 '이스라엘에서' 를 '팔레스타인에서'로 바꿔야겠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폴 크루그먼은 '경제적 불평등'을 화두로 삼아 1920년대 이후의 미국의 정치지형도를 분석해 나간다. 그는 20세기 이후 미국의 역사를 크게 세 시대로 나눈다. 경제적 불평등의 폭이 컸던 1920년대, 불평등의 정도가 급격히 감소하고 그 상태가 오래도록(30여년간) 유지되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뉴딜 정책의 시대, 그리고 다시 불평등의 정도가 1920년대 수준으로 심화된 197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레이건과 부시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의 시대가 그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의 역사를 분석하면서 크루그먼이 내리는 결론은, 경제학자보다는 정치학자가 내릴 법한 것이다(그 스스로도 처음에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리라고 생각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불평등의 부침은 외부적 시장경제적 요인이 아닌 정치적 요인에 의해서 일어났다. 일련의 정책에 의해 뉴딜 시대의 소득의 (상대적)균등과 그에 따른 탄탄한 중산층 사회의 형성이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1970년대 이후 우경화한 공화당과 그들의 집권에 따른 정책변화가 오늘날의 양극화를 낳았다. 다시 말해, 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는 시장경제의 흐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적 활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역으로, 우리의 정치적 활동에 의해 현재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은 완화될 수 있다. 외부의 경제적인 요인이 불평등을 해소해 주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새로운 뉴딜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크루그먼이 진보주의자(Progressive : 그는 이 책에서 'progressive'를 '행동하는 리버럴 liberal'이라고 정의한다)로서 미국 사회에 전하는 메세지다.

잠깐 용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난 아직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liberal'이라는 단어를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저 단어의 본뜻대로 '자유주의자'라고 번역해서는 저 단어가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냉전의 시대를 극심하게 겪은 미국에서 '좌(the left)'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인상 때문에 미국에서는 좌우(left/right)라는 보다는 'liberal/conservative'라는 말로 정치적 성향을 구분한다. 한국전쟁을 통해 북한과 그들이 대변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형성하게 된 우리나라에서 '좌/우'가 아닌 '진보/보수'라는 말을 널리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흥미롭게도 크루그먼은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연이은 보수의 공격으로 'liberal'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되었음을 이야기하며 그 대안으로 'progressive'라는 말이 떠오르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물론 그 스스로는 'progressive'라는 말을 앞서 본 것처럼 'liberal'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어떤 한 단어에 부정적인 인상을 심기 위해 노력하고, 나중에는 그 단어 자체를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가령 반정부적 정책이면 모조리 '좌파' 또는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정치적 공격방법을 생각해 보라)은 미국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말' 자체가 아닌 그 말이 지칭하는 실질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린 껍데기 때문에 실질을 너무 쉽게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크루그먼은 행동하는 리버럴(마땅한 번역어를 못 찾겠으므로 부득이 소리나는 그대로 쓰겠다)로서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 전하는 메세지를 이 책에 담았다. 그러나 그의 메세지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유효하게 먹힌다. 오늘날의 미국 사회와 미국의 정치지형도가 우리 나라와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보자.

"21세기 초반 미국 사회의 모순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를 리버럴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중요한 측면에서 [오히려]보수적이고, 스스로를 보수(conservative)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개 매우 급진적이라는 것이다. ...리버럴들은 우리의 민주주의 원칙들과 법치주의를 존중하고자 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보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독재자의 권력을 갖기를 바라며 부시 행정부가 혐의도 없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는 것에 박수를 보내 왔다."
크루그먼이 보기에 오늘날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보다는 권위주의와 과두정을 선호하는 집단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경제적인 측면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방향으로 투표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 또한 한국 사회와 많이 닮았다. 크루그먼은 그와 같은 투표양상이 나타나는 이유를 공화당이 '인종'이라는 요소를 끌어들여서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없는(빈부격차를 심화하고, 소수의 이익을 위하는) 자신들의 정책을 감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즉, 미국의 정치지형을 가르고 있는 것은 경제와 함께 인종이라는 두 개의 구별되는 축인데, 이 두 개의 축 사이의 구분을 흐트러뜨림으로써 경제적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일치하는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종'을 '북한'으로 치환하면 정확하게 한국 사회의 모습이 되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최장집 교수가 제기한 것과 동일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이 책은 오로지 미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아직도 미국이라면 덮어놓고 신 떠받들듯 하는 분위기가 잔존해 있는 우리나라인만큼 미국 사회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2008년 가기 전에 사서 읽자.

"I believe in a relatively equal society, supported by institutions that limit extremes of wealth and poverty. I believe in democracy, civil liberties, and the rule of law. That makes me a liberal, and I'm proud of it."

[나는 부와 빈곤의 양극단을 제한하는 제도들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비교적 평등한 사회를 믿는다. 나는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법치주의를 믿는다. 따라서 나는 리버럴인 셈이고, 나는 그게 자랑스럽다.]

맨 마지막 문장은 인용부호 밖으로 빼 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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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4 17:13 2008/12/24 17:13
  1. 가넷
    2009/01/16 08:23
    이 책 라디오에서 소개하는 걸 들었는데
    한 구절 한 구절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일부분만 들었는데도 정말 우리나라와 똑같다는 걸 느꼈지.
    맨 마지막 문장은 나도 동감!!
    • onecent
      2009/01/21 20:06
      저도 읽는 내내 우리나라와 어쩌면 이렇게 상황이 비슷할까 놀랐죠; 그래서 더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교사로 삼기 좋더라구요.







사법연수지에 실린, 이 블로그에 먼저 쓰고 뒤에 연수지 글마당에 응모했던 [다크나이트]에 관한 글을 모처럼 다시 읽어보았다.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이 떠올라서 적어두려고 한다.

고담시의 법질서와의 관계에서 배트맨은 그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배트맨은 법질서를 수호하려고 하지만, 그는 스스로 법질서를 어기면서 그 법질서를 수호한다. 그에게 적법절차 따위는 없다. 공권력이 부여된 사법기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범죄자들을 두들겨패고, 자기 멋대로 단죄하고,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범죄인인도조약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며 외국으로 도피한 범죄자를 납치해 온다.
다시 말해 고담시의 법질서는 무법자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그렇기 때문에 배트맨의 역할은 숨겨져야 한다. 법을 어기는 녀석에 의해서만 법질서가 존속할 수 있다는 모순점은 감춰져야 한다. 그래야 법질서가 '질서'정연한 체계로서 성립할 수 있기 때문(또는 그러하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고담시의 법질서 속에서 배트맨이 갖는 위상은 민법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이 차지하는 위상과 똑같다. 신의성실은 민법 제2조에 규정되어 있어서, 다른 여러 조문에 규정되어 있는 민법의 다른 원칙들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민법에 규정되어 있는 다른 모든 원칙들이 상황에 따라서는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내용의 원칙이다.

이런 식이다: 민법에 규정된 대로라면 갑이 소유권을 갖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 소유권을 행사하는 것이 신의칙에 반한다. 따라서 갑의 소유권행사는 부정된다.

즉, 신의성실의 원칙은 민법을 어기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법원칙이다. 배트맨과 똑같은 모순덩어리다.

그리고 법학자들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대하는 태도 또한 고담시 시민들이 배트맨을 대하는 태도와 똑같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나쁜 놈' 취급을 받는다. 그 역할은 언제나 필요최소한도로 제한되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신의칙은 결코 남용되어서는 안된다, 모든 문제를 신의칙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된다. 어느 민법교과서를 봐도 이런 이야기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신의성실의 원칙이 있기에 민법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신의칙이 없다면 일견 정치해 보이는 민법은 복잡다양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만 죽은 글자들의 집합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법 문언대로만 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법에 의해' 이러이러한 결론이 나온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신의칙이다. 신의칙에 의해 법개념들은 확장과 축소를 거듭할 수 있고, 법은 신의칙에 의해 비로소 규범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칙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면, 민법 제2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규정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법의 체계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신의칙을 위험한 놈이라고 생각한다/해야만 한다.
그래서 오늘도 고담시의 경찰은 배트맨을 쫓는다/쫓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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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1 12:18 2008/12/21 12:18







호기심에 대한 찬양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8/10/27 00:05

얼마 전부터 만화 ‘마스터 키튼’을 사 모으고 있다. 한 권 한 권씩 포장비닐을 뜯어 읽고 나서 책장에 차곡차곡 꽂아 넣으니, 만화가 재미있는 건 물론이요, 일산에 이사 오면서 새로 산 책장 한 칸이 조금씩 채워져 나가는 걸 보는 재미도 만화 못지않게 쏠쏠하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만화 가운데서는 ‘마스터 키튼’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 여러 개의 짤막한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잠깐 보고 금방 책을 덮을 수 있어서 좋고,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점이 무엇보다 좋다. 게다가 우라사와 나오키 특유의 둥글둥글하고 오버하지 않는, 설득력 있는 그림체가 그 내용과 잘 어울린다(만약 이 만화의 그림체가 수박만한 눈동자에 종이가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콧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순정만화 그림체였으면 이 만화는 부조리 그 자체가 되어 버렸을 거다).

‘마스터 키튼’ 3권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곧 폐교될 처지에 놓인 한 사회교육원의 마지막 강의의 마지막 시간, 강의를 맡은 주인공 키튼이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학교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계속 공부해 달라는 겁니다. 사실 저는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자신감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지내던 중에 깨달았습니다. 공부할 정열이 있는 한…강의할 학교를 잃더라도 공부를 계속해 갈 겁니다.

인간은 왜 공부해야 하는 걸까요?
인간은 평생 계속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직책을 위하여나, 출세해서 장관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 왜 공부해야 할까요? …그게 인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느 때처럼 연수원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독서실에 갈 채비를 마치고 잠깐 만화나 보자는 생각에 책을 집어든 거였는데, 이 대목에서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질 못했다. 인간은 왜 공부해야 할까? 나는 대체 왜 그놈의 ‘공부’를 하러 이리도 급히 낑낑대며 독서실에 가야 하는 것일까?

난 키튼이 마지막에 제시한 저 답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게 무슨 인간의 ‘사명’인 건 아니다. 게다가 ‘왜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게 사명이니까’라고 대답해 봐야 그건 ‘해야만 하니까 해야만 한다’라고 순환논법으로 대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다’라는 저 말이야말로 가슴에 와 닿는다. 호기심, 아는 기쁨. 그것이야말로 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까.

호기심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활기 넘치게 하는지. 우리는 그걸 너무 잊고 산다.

사는 데가 바로 그 근처인지라 웨스턴돔 분수광장을 뻔질나게 왔다갔다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늘 보게 되는 건 분수를 보며 깔깔대면서 분수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이다. 일산으로 이사 오기 전, 신림동에 살면서는 주변에 온통 고시생, 대학생뿐이었지 어린아이들을 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일산에는 엄마아빠 손잡고 나들이 나온 아이들이 많은데, 아이들은 분수광장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대체 저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쉴새없이 뛰어다니고 숨 넘어갈 듯 깔깔대는데도 애들은 마냥 분수가 즐겁기만 하다. 보는 어른들이 먼저 지칠 지경이다. 내 친구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애들은 어른들 에너지를 다 빨아먹는다’라고. 그렇다. 어른들은 애들 노는 거 쫓아다니는 것도 힘들다. 애들은 아무리 해도 안 지치고 어른들만 지쳐가니, 어떻게 보면 정말 아이들이 어른들 에너지를 빨아먹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냥 어리니까, 더 젊으니까 에너지가 더 많은 걸까? 그렇지만 근력, 근지구력 어느 것 하나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훨씬 더 센데?

어린아이들은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 아닐까. 주변에 온통 처음 보는 것들, 새로운 것들 뿐이니까, 신기한 것들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하면서 매 순간 ‘아는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는 신기한 게 점점 줄어든다. 어차피 어디선가 본 거고, 들어본 거고, 해본 거다. 매사에 신기할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냉소다. ‘피, 그까짓 것’, ‘원래 그런거야’, ‘당연히 그런거지’ 라고 내뱉는 경우가 늘어갈수록, 우리는 호기심을 버리고 그 자리에 냉소를 채워넣는다. 그리고 냉소가 늘어갈수록 우리 삶의 에너지는 사라진다. 매사에 시큰둥, 신기할 것도 없고 흥미로울 것도 없으니 굳이 몸을 움직여 보고 느끼고 하고 싶은 생각이 생기질 않는 것이다. 어느새 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렇게 종일 침대에 누워 있으면 휴식 덕에 에너지가 충전이 돼야 할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누워 있을수록 더 기력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냉소는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 녀석은 무기력을 데리고 온다.

2004년, 대학에서 양창수 교수님의 채권각론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께서 어느 날인가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라는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 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미국의 천재(이자 괴짜) 물리학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쓴 일종의 수필집이었다.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 그러나 브라질의 리오 카니발이 좋아서 매년 브라질을 찾는 사람, 거기서 북 치는 법을 배워가지고는 수준급 연주자가 되기도 하는 사람. ‘물리학을 가지고 노는’ 사람. 기인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파인만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삶이 에너지로 가득차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정말 장난꾸러기 어린애 같았고 무엇보다 그는 호기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나 계속해서 등장하는 문구는 “그건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었다!!”는 그의 감탄사다. 난 바로 그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파인만에게 세상은 신기한 것들로 북적대는, 매 순간 아는 기쁨을 주는 거대한 놀이터였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런 건 몰라도 돼’라거나 ‘그런 건 필요없어’ 라는 말을 너무나 손쉽게 내뱉으면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알아야만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만 몸을 억지로 억지로 움직인다. 그렇게 ‘알아야만 하는 것’만 간신히 알아두고, ‘필요한 것’을 꼭 필요한 만큼만 하면서 산다. 꼭 알야아만 하는 것만 알고 꼭 필요한 것만 하는데도 삶이 그렇게 지치고 힘들 수가 없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뒤집어 보자. 알아야만 하는 것만 알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삶이 지치고 활력이 없어지는 것 아닐까? ‘그런 건 몰라도 돼’라는 냉소적인 태도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의 분류다. 그리고 그 분류의 기준은 저 멀리 어딘가에 놓여있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목표다. 대학입학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기 위해서, ‘임관’을 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이렇게 미래의 목표를 기준으로 앎의 대상을 분류하는 순간, 그 앎의 대상 자체가 갖는 매력은 증발한다. ‘아는 기쁨’ 따위는 싹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현재, 지금 이 순간 내가 머리를 싸매고 하고 있는 ‘공부’는 한같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수단으로 전락할 때, 아는 기쁨 대신 남는 것은 무기력과 억지로 이 순간을 버티며 핑계거리로 내세우는 ‘인내’뿐이다.

얼마 전, 38기 연수생들은 4학기 민사재판실무 시험을 치르고, 39기 연수생들은 민사재판실무 기록을 붙들고 씨름을 하던 날이었다. 친구 몇과 함께 독서실 세미나실에 모여앉아 되도 않는 주장 되는 주장 가리지 않고 대여섯 개나 항변(등)을 퍼부어 놓은 피고를 원망하며 끙끙거리다가,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한 친구 녀석이 잠깐 밖에 나갔다 오더니만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들여다보니 38기 민사재판실무 수시평가 자료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만, 어떤 사람이 독서실 폐휴지함에 38기 민사재판실무 기록더미 전체를 버리고 갔더라는 것이었다.

그 38기 연수생분의 심정은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4학기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는 안도감, 앞으로 지긋지긋한 저 기록더미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가득했을 것일 테다. 슬몃 부러움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찝찝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람에게 그 민사재판실무 기록더미는 시험을 보기 위한 수단 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 이름 모를 연수생 분은 기록뭉치에 적혀 있는 깨알같은 글자들을 졸음을 참으며, 눈을 비비며 들여다보고 밑줄을 치고 별표를 그려넣으며 보냈던 그 많은 시간들이 시험을 본 날 이후로는 다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음을 자인한 꼴이 되어 버린 것 아닌가.

그렇게 쏟은 지나간 시간들이 시험을 본 다음 날 이후까지도, 나아가 영원히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쏟는 매 순간 순간을 미래의 무엇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 자체를 위해서 써야 한다. 그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 물론 복잡하고 난해한 기록을 보면서 대체 뭐가 어떻게 즐거울 수 있냐고 당장에 반론이 들어오겠지만, 키튼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누구나 아는 기쁨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에는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새로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것은 그 앎의 대상이 분수의 물줄기가 되었든, 사법시험에서 나를 괴롭혔던 어음법이 되었든, 판결문 주문 쓰는 법이 되었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되었든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냉소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이 삶에서 진지함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재의 상황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면 그 자연스런 결과로 그 현재의 상황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게 된다.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라는 냉소적인 태도는 결국 현재에 온 힘을 다하지 않게 만든다.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진정한 성취감도 없고 진정한 아쉬움도 없다. 일이 잘 돼도 요행일 여지가 크니 진심으로 성취의 기쁨을 느끼지도 못하고, 못 돼도 언제나 변명거리가 남아있으니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도 없다. 무덤덤하고 그만큼 무기력한 삶의 연속일 뿐이다. 요즈음 팽배한 정치적 냉소주의 역시 이와 비슷한 결과를 불러오고 있다. 내가 찍질 않았으니 국회에 가서 앉아 있는 사람이 잘 해도 그건 어쩌다 그렇게 된 것 뿐이라서 정치적 성취감이 없고, 못 해도 그땐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냉소적 거리두기 탓에 비판과 개선의 노력은 자라날 틈이 없어진다.

호기심이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눈(또는 ‘프레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면, 냉소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냉소로 가득찬 사람은 의문을 품지 않고,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다.

대법원의 판례를 대하는 태도를 예로 들어 보자. 대법원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제기된 의문에 반론을 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문을 제기한다는 사실 자체에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난 이런 사람도 실제로 보았다), 의문을 제기하든 말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대법원의 판례도 여러 가능한 해석론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제기된 의문에 반론을 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의문을 가질 줄 모르는 사람은 그에 대해 반대 견해를 피력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데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네 번째 부류의 사람보다는 낫다. 화를 낸다는 건 최소한 판례의 태도에 대해 진지한 애정은 있다는 걸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아예 의문이 있든 말든 신경을 안 쓰는 사람, 즉 냉소적인 사람은 그 최소한의 진지함마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 부류의 사람에게 건전한 비판을 통해 발전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네 번째 부류의 냉소적인 사람에게는 그 가능성마저도 없다. 냉소는 무비판적 수용을 부르고, 무비판적 수용이 유행할 때에는 어떠한 발전도 없다. 만연한 냉소는 결국 영구적 답보상태만을 낳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연수원의 교육과정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는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험과 평가, 그리고 그에 따른 성적부여라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가시적인 미래의 목표가 놓여있는 탓에 아무리 애를 써도 현재의 시간은 그를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고 마는 구조적인 문제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해야 한다’에서 벗어나서 ‘왜 그런가’ 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 볼 기회 자체가 별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못내 아쉽다(검찰 사례연구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보라’고, 직접적으로 호기심에 문을 열어 준 과제가 나왔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

다시 ‘마스터 키튼’ 이야기를 하자면, 한 권 한 권 읽으면 읽을수록 이 만화는 ‘아는 기쁨’이 주는 생명력과 삶의 활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키튼은 ‘저는 아직 알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살인을 결심한 어느 학생은 동급생인 키튼이 학교 벽에서 화석을 발견하고 눈을 빛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광경에서 감화를 받아 살인을 포기한다. 어쩌면 현재를 아직 오지 않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에 담보잡히지 않고 현재 그 자체로서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가장 훌륭한 원동력이 바로 호기심이 아닐까.

거울을 바라보고 서서 스스로를 들여다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냉소란 녀석이 마음 한켠을 잠식해 들어와서는 어느새 그 그림자를 크게 드리우고 있었다.

마음 속에 들어와 앉은 냉소를 털어버려야겠다.
그러면 그 녀석과 함께 스리슬쩍 찾아와 자리잡고 앉아 있던 무기력도 함께 나갈 것이다.

빈 자리는 호기심으로 채우자.
그러면 ‘아는 기쁨’이 덩달아 찾아들 것이다. 틀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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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7 00:05 2008/10/27 00:05
  1. Gun Kim
    2008/11/03 13:54
    마스터 키튼을 주제로 이렇게 길고 철학적인 이야기꺼리를 끄집어내다니...^^

    삐뚤어진 열정은 냉소보다도 해롭지만, 기본적으로 삶에서 호기심 - 난 이것을 '열정'이라고 보는데 - 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는 호기심 또는 열정에의 동경은 있는데 게을러서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듯~
    • onecent
      2008/11/14 01:08
      살아가는 데 열정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싶어 요새는 진짜.
      열정을 잃으면 곧 늙어버렸다는 것과 다름없겠지.
      뭐든지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야겠어. 열심히 실패하고 열심히 좌절하는 게 어영부영 물타기하면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을테니까..

      나도 게을러서 탈이야. 이렇게 글 쓰면서 스스로 돌아보고 하는수밖에 없는듯.
  2. Suryo
    2008/11/11 20:14
    안녕하세요. 사법시험 공부 중인 학생입니다. 신림에서 집이 있는 일산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어 독서실을 검색하던 중에 님의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연수원생이신 분의 글이라는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지만 읽는 도중 저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멋진 글이네요. 멋진 생각이고요. ^^

    말씀하신 대로 냉소는 나이를 먹으면서 무기력과 함께 저도 모르는 사이 젖어드는 것 같습니다. 아무 의문도 가질 필요 없고 그러니 자신의 한계를 절감할 필요도, 노력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게 만들어주는 편리한 태도지요. 덕택에 저도 시험을 위한 공부라는 생각에 최소한의 의문조차 떨쳐버린, 무기력한 암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onecent
      2008/11/14 01:11
      안녕하세요.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사법시험 공부란 게 지극히 목적적이라..공부 자체에 흥미를 갖고 해 나가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특히나 암기에 치우치게 되는 1차 시험이 더한 것 같구요(저 같은 경우는 2차 시험준비가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지루한 공부를 하고 계신다니 진심으로 건투를 빌겠습니다.
      제가 글에서 쓰진 않았지만 연수원은, 시험의 압박이 큰 건 틀림없지만 꽤나 재미있는 곳입니다. 꼭 합격하셔서 연수원생활도 재밌게 하시길.
  3. hy
    2008/12/15 10:18
    이렇게해도 알아?ㅋㅋ다들 실명안쓰니까 나도 따라해봤어.
    어제 감동받아서 여기 와서 예전에 읽었던 글들 다시 보면서 혼자 새삼 감동받고 있어.(그럼 공부는 언제?;;;;;)
    그치만 이런 시간으로 인해서 마음속에 잠시 덮어놓았던 불꽃이 조금씩 다시 생겨나면 그게 더 좋은거겠지?(라고 위로를..ㅠ)
    히히. 진짜 좋은 친구야. 넌.
    너도 주위사람들에게 열정.을 전염시키는 사람이야^-^
    • onecent
      2008/12/21 11:57
      쉴 때 쉬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해야 공부도 잘 되는거지. 쉴때 너무 죄책감 느낄 필요 없다고 봐 난.ㅎㅎ

      열정을 전염시키는 사람이라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과찬이구나. 나도 분발해야겠어.
  4. 가넷
    2009/01/16 09:15
    고맙다. 나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
    열정 바이러스의 숙주. 맞구만. ^^
    너도 그런 마음 늘 잊지 말고.
    언제 시간 날 때 만났음 좋겠네.
    (실제로 보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서먹할 듯)
    요즘 무척 추운데 건강하고~
    • onecent
      2009/01/21 20:08
      열정 바이러스의 숙주. 멋있는 표현인데요.ㅎㅎ
      물론 아직 저한테 어울리는 말 같진 않습니다만;

      저도 언제고 한 번 뵜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오프라인에서 보는 건 처음 아닌가요?
      형하고는 온라인상으로밖에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사포동 시절에는 오프모임에 거의 안 나갔었거든요;







조커와 배트맨. 그들은 서로 정 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들에게 비슷한 점이라곤 눈에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다.

배트맨이 입고 있는 건 검은색뿐이다(금빛을 띠는 벨트만 제외한다면). 그리고 그 검은색 전투복은 치밀하게 계산되고 디자인된 최첨단 기술의 산물이다. 쭉 뻗은 직선과 늘씬하게 뻗은 곡선이 어우러진 배트맨의 망토와 전투복은 딱 보기에도 멋지다. 우리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황금비율, 비례. 그런 것들을 배트맨의 전투복은 잘 갖추고 있다. 잡티 하나 안 보이는 말쑥한 검은색 또한 엄숙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이 세상 모든 색깔을 섞으면 결국 검은색이 된다고 했던가. 조커는 검은색 속에 감춰져 있던 화려한 색깔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 같은 모습이다. 머리카락에선 초록빛이 돌고, 얼굴엔 새하얀 분칠을 하고 그 위에다 시뻘건 원색으로 커다랗게 비뚤비뚤한 입술을 양 볼에 죽죽 그어 놓았다. 그뿐인가. 입고 있는 옷은 원색에 가까운 보라색이고, 행여나 노란색이 자기만 빼놨다고 서운해할까 싶어서 이빨은 온통 누렇게 칠해 놓았다(칠한 건지, 안 닦아서 상한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배트맨은 고담시의 질서를 상징한다. 그는 부패와 범죄로 가득찬 무법지 고담시에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한다. 나쁜 놈은 잡아 가두고, 나쁜 놈한테 당하는 좋은 놈은 구해 주고.
인간 세계에서 법질서를 엄정하게 확립하는 데 있어 언제나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 집행자 또한 감정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아픈 어머니 병원비를 대려면 어쩔 수 없이 경찰도 갱단과 뒷거래를 하고(라미레즈 형사처럼), 그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법적 절차 같은건 무시하고 사람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협박하고 하게 되는 것이다(하비 덴트처럼).

그러나 배트맨은 사람이 아니다. 진정으로 법질서를 확립시키는 존재가 되려면 배트맨은 사람이 아니어야만 한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이미 이 점을 간파했다. 그는 말했다 : 악당들이 그 이름만 듣고 두려워할 존재가 되어야 한다 - 상징(symbol)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부패시킬 수 있고, 죽일 수 있고,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상징은 부패되지 않는다. 죽지도 않는다. 그 어떤 녀석도 상징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래서 브루스 웨인은 자기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가면을 뒤집어쓰고 정체를 숨긴 '박쥐'라는 상징으로서 범죄와 싸우기로 한다.

중요한 건 그렇게 인간성을 탈피한 상징이 된다는 것이지, 그 상징으로 뭘 택할지가 아니다. [비긴즈]에서 알프레드는 묻는다. "왜 하필 박쥐입니까"라고. 브루스 웨인의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박쥐들을 무서워하니까. 이제 내 적들도 내 공포를 함께 느낄 때다." 굳이 그 상징이 박쥐가 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거미라도 좋고 잠자리여도 그만이다. 중요한 건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법질서 그 자체, 악에 대항하는 선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에 반해 조커는 무질서 그 자체다. 그의 움직임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뭘 할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는 수수께끼다. 영화 내내 조커는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우리를 놀래키고, 반대로 우리는 그 녀석이 언제 튀어나올 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영화가 시작하는 은행강도 장면을 떠올려 보자. 조커에 의해 고용된 사람인줄만 알고 있던 가면쓴 녀석들 중 한 명이 갑자기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모두....날 더 이상하게 만든다"고 내뱉으면서 가면을 벗고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자 조커의 그 기괴하게 생긴 얼굴, 그 섬뜩한 웃음 - 사실 언제나 웃고 있는 얼굴이긴 하지만 - 이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운다. 이처럼 첫 등장에서부터 그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왔다.

고담시 시장이 하비 덴트와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창밖을 내다본 순간, 갑자기 배트맨 옷을 입은 사람의 시체가 창문에 쿵 하고 와서 부딪친다. 공포영화 보는 것처럼 관객의 심장은 떨어진다. (나와 같이 영화를 보던 친구는 심지어 두 번째 보는 것이었으면서도 이 때 의자에서 떨어질 뻔하더라ㅋ)

하비 덴트를 태운 호송차가 감옥을 향해 가는 도중, 웬 거대한 트럭 하나가 길에서 빵빵댄다. 단속을 위해 경찰관이 창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조수석에서 조커가 장총을 들고 튀어나와 경찰을 쏴 버린다.
모두가 탈출한 병원 안. 경찰관 하나가 남은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간다. 뒤돌아 서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돌리며 갑자기 경찰을 총으로 쏜다. 마스크를 벗으니 그 간호사 또한 조커였다.

조커의 등장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는 영화 내내 갑자기 나타나 관객을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도 고담시 전체를 언제나 놀라게 한다. 그 누구도 그가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에겐 규칙이 없다. 그에겐 어떠한 규범도 없다. 조커 스스로가 자신을 칭하는 것처럼, 그는 '혼돈의 사자(Agent of Chaos)'다.

질서의 사자 배트맨. 혼돈의 사자 조커.
질서 대 혼돈. 그 치열한 대결을 그린 것이 [다크나이트]일까? 조커는 체포되었고 배트맨은 어쨌든 힘겹게나마 살아남았으니, 혼돈을 없애고 질서가 승리한 것일까?

나는 [다크나이트]가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질서의 사자 배트맨, 혼돈의 사자 조커. 그리고 그 둘의 대결.
여기까지는 그렇게까지 흥미로운 구석이 없다. 나쁜놈하고 착한놈하고 싸우는 영화 한두 개 봤나 뭐. 여기서 끝이라면 [다크나이트]는 [배트맨 비긴즈]나 [슈퍼맨 리턴즈], [스파이더맨]과 다를 게 없다.

[다크나이트]가 흥미로워지는 건 바로 질서와 혼돈 사이의 관계, 즉 배트맨과 조커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부터다.

조커가 처음 갱단 두목들의 회합장소에 불쑥 나타나서 '배트맨을 죽이자'고 제안했을 때까지만 해도, 배트맨은 물론이고 관객들 모두 그것이 진짜 조커가 원하는 바인줄 안다. 다른 갱단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조커도 배트맨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다들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조커는 배트맨을 없앨 생각이 전혀 없다. 배트맨과 경찰 취조실에서 대면했을 때, 배트맨이 "날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조커는 낄낄거리며, 예의 그 광기어린 파안대소를 퍼부으며 이야기한다. "널 죽이다니?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아마도 Where would I be without you? 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 조커는 배트맨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트맨이 계속 살아 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자신과 계속 놀아 줬으면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처음 방송국에 보낸 협박 영상 - 배트맨 흉내를 내던 사람을 살해하는 동영상 - 에서 조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배트맨 때문에 고담시 시민들이 어떻게 됐는지 봐. (그리고는 카메라를 돌려 자신의 얼굴을 화면에 보여준다) 이렇게 미쳐가고 있잖아."

이 협박 영상을 보고 난 뒤 브루스 웨인과 알프레드가 나누는 대사는 더 의미심장하다.
"이건 도가 지나쳐. 갱단 녀석들이 선을 넘었어."
"주인님께서 먼저 선을 넘었지요. 저들을 너무 압박하고 코너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러자 절박해진 저들이 그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끌어들인 겁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배트맨 때문에 조커가 나타났다.
고담시에 배트맨이 나타나기 전에는 조커 또한 없었다. 조커는 배트맨의 필연적인 부산물이다.
상징화는 언제나 상징으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잔여물을 남긴다. 일견 완전해 보이는 질서체계는 언제나 그 가장 근원적인 지점에 균열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생각해 보라).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와 그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언어가 가장 대표적이다) 사이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가 '책상'이라는 말로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을 지칭할 때, 그 사물과 '책상'이라는 기호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불일치가 발생한다('책상'이라는 말은, 모든 단어가 그렇듯이, 일반개념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책상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인 것이다). 또, 내가 '책상'이라고 하면서 떠올리는 의미와 다른 사람들이 '책상'이라는 기호를 통해 떠올리는 의미는 절대로 똑같지 않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를 언어를 통해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그 언어를 가지고 완벽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더 불가능하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자신의 인식에 근거해서 조종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수많은 개념들을 통해 정치하게 짜여진 법질서를 통해 인간은 세계를 조종하려고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교과서를 통해 민법이나 형법의 해석론을 볼 때는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다가도, 실제 사례에 법을 적용할 때는 언제나 애매하고 어딘지 잘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 드는 것을 떠올려 보라).

그렇다면 우리가 질서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우리가 기호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가는 것, 하나의 체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바로 그 질서가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성을 잊음으로써, 그것을 외면함으로써이다. '책상'이라는 말로 서로 떠올리는 의미는 같지 않지만, 그 대강의 뜻은 통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차이를 잊는다(외면한다). '책상'이라는 말에는 고정된 하나의 의미만이 있는 것이라고 믿어 버린다. 그런 외면, 그런 거짓말을 통해 체계는 비로소 성립할 수 있다.

정치한 질서라 함은 곧 그러한 불완전성이 아주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 사람들이 불완전성을 너무도 잘 잊고 있는, 모두들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질서를 말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계의 불완전성, 질서 속의 균열을 언제까지고 감출 수 없다. 질서의 성립 저편에 감추어져야만 했던 잔여물들, 질서 속에 포섭되지 못한 채 남아있던 나머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생긴다. 그 잔여물들은 말 그대로 질서의 바깥에 있는 것들이기에 질서체계 속에서 그것들은 인식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음이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질서 속에 서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잔여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규칙이나 합리성을 거부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끔찍하게 공포스러운 것으로 다가온다. 바로 '혼돈 그 자체'인 것이다.

배트맨이라는 무자비하게 엄격하고 정치한 질서가 출현했다. 부패경찰은 점점 없어져 가고, 뒷골목을 주름잡던 범법자들은 이제 밤을 두려워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부패시킬 수도, 죽일 수도, 쓰러뜨릴 수도 없는 완벽한 질서가 나타난 것이다. 고담시에는 배트맨과 함께 안정된 질서가 확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한 질서체계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질서가 포섭하지 못하고 남겨둔 잔여물이 그동안 감춰져 있던 모습을 마침내 드러내고야 말았다. 언뜻 보기에 너무나도 완전해 보이는 질서체계였기에 그 균열이 나타나면서 일으킨 충격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띠끌 하나 안 보이는 완벽한 검은색 저편에 남겨져 있던 초록색하얀색빨간색노란색보라색 - 바로 조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시 말해 배트맨이 없다면 조커는 존재할 수 없다. 거꾸로 조커 없이 배트맨 또한 존재하지 못한다. 질서 체계는 일정한 잔여물을 남길 수밖에 없고 동시에 그 잔여물을 남겨야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커는 배트맨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죽일래야 죽일 수가 없다. 그리고 배트맨 또한 조커를 죽이지 못한다.

이러한 둘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바로 배트맨이 오토바이를 타고 전속력으로 조커에게 돌진해 가는 장면이다. 어느 한쪽 없이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두 존재가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날 들이받아! 날 들이받아봐!" 라고 외치는 조커를 끝내 배트맨은 오토바이로 들이받지 못한다. 마치 무슨 초자연적인 힘에 이끌린 것처럼, N극과 N극이 서로 부딪치는 것처럼 배트맨의 오토바이는 마지막 순간에 조커를 비껴가고 만다.

배트맨은 거기서 조커를 피해갈 수밖에 없다.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어길 수 없으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배트맨은 분노에 찬 신음을 흘리며 조커를 죽여 버릴지를 고민하지만, 그 때 고민하는 것은 질서의 상징 박쥐가 아니라 가면 뒤에 있는 인간 브루스 웨인이다. 감정을 사상해 낸 법질서 그 자체로서의 배트맨으로서는 그 순간 조커를 죽이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영화 마지막의 대결에서 조커를 건물에서 스스로 집어던져 놓고도 끝내 그의 발을 붙잡아 끌어올릴 수밖에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것이 배트맨과 조커의 숙명이자, 질서와 혼돈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다. 거꾸로 매달린 조커가 이야기하지 않던가.

"아마 너하고 나는 이 짓을 평생동안 계속하게 될거야..."


이처럼 배트맨이 있는 곳에 언제나 필연적으로 조커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고담시는 어찌 되는건가? 괜히 애꿎은 사람들만 계속해서 조커의 테러에 죽어나가야 하는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도무지 예측할 수도 없는 이 혼돈을 어떻게 감당해 내란 말인가? 실제로 영화에서 조커의 테러행각에 고담시는 전체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인다. 공포는 무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돈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럽다. 알프레드가 말한 것처럼, 조커는 "타협할 수도 없고, 윽박지를 수도 없고, 매수할 수도 없는 사람", "그냥 세계가 불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커'라는 혼돈은 혀를 날름거리며 고담시 전체의 질서를 뒤엎어버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질서의 '성립'이 필연적으로 혼돈을 수반한다면, 질서의 '유지'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 혼돈을 잊어버림으로써만 가능해진다. 포섭되지 못한 균열, 혼돈의 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은폐되어야 한다. 즉, 우리에겐 우리의 질서가 완전하다는 환상, 일종의 거짓말이 필요하다.

이건 비단 사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존재양식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의 행동을 낳는 욕망 체계는 실상 그 한가운데 본질적인 균열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균열은 환상에 의해 지탱된다. 사람들은 그 본질적 균열, 그 공허를 잊기 위해 뭔가 하나의 대상을 붙들고 그 대상만 쟁취하면 우리 욕망은 만족되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입학 시험만 합격하면 된다. 사시만 붙으면 된다. 취업만 하면 된다. 저 사람의 사랑만 얻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경험을 통해 알듯이, 그 어떤 대상도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대학 합격했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사시 붙었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다. 취업하면 그때부터 또 첩첩산중이다. 그 사람의 사랑을 얻었다고 해서 내 공허함이 메워지지는 않는다. 우리 삶의 근본적 무의미성은 끝내 완전히 채워지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가슴 한가운데 뻥 뚫린 구멍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하나의 목표를 붙들고 그 목표를 달성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행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대입시험이, 사법시험이 또는 취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라고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양식이 거짓말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 것이 바로 [다크나이트]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의 전작 [메멘토]였다. [메멘토]의 충격적인 결말에서, 우리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레너드가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의 삶의 전부는 바로 자신의 아내를 죽인 살인자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 살인자는 이미 잡혔으며 아내는 사실 자신이 실수로 죽였다는 것이 진실임을 레너드는 깨닫게 된다. 감당하기 힘든 진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공허와 대면한 레너드는 그 순간 자신의 단기 기억상실증을 이용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엉뚱한 사람이 살인자라고 메모를 해 둔 것이다. 그리고는 말한다. '거짓말을 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이제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인 레너드는 조금전까지 있었던 일은 다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해 둔 메모를 보고는 정말 그 사람이 살인자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렇게 레너드는 영원히 환상 속의 살인자를 쫓아가며 살아갈 것이다(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크나이트]로 돌아와 보자. 레이첼이 죽고 난 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브루스 웨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다. 알프레드가 아침식사를 들고 다가온다. 아침식사를 담은 그릇에는 레이첼이 미리 써 둔, 브루스 웨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놓여 있다. 편지에서 레이첼은 브루스 웨인을 떠나겠다고, 배트맨이 없어진다 해도 그에게 가지는 않겠다고 써 놓았다. 알프레드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브루스 웨인이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뭐에 홀린 사람처럼 내뱉는다. "레이첼이 기다려준다고 했었는데..."라고. 그 순간 알프레드는 편지를 도로 가져간다. 그리고 그 편지를 불태워 버린다.

이것이 바로 브루스 웨인에게 필요한 거짓말이다. 레이첼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언젠가 배트맨을 그만두면 사랑하는 레이첼과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는 것.
이는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어야 브루스 웨인은 계속해서 가면을 쓰고 배트맨 짓을 할 수 있다. 브루스 웨인이 바라는 것은 배트맨 없는 '정상적인 삶'이다. 그런 정상적인 삶이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야만 힘든 배트맨 생활을 하루하루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미 브루스 웨인에게 배트맨을 그만두고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건 불가능할 지 모른다(레이첼 역시 영화에서 그 점을 지적했다). 고담시에 배트맨은 영원히 필요하다. 브루스 웨인에게 다시는 정상적인 삶이란 없다. 그러나 그 점을 깨닫는 순간 브루스 웨인은 삶의 의미를 잃고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레드는 편지를 태워버려야만 했다. '정상적인 삶'이 손 닿을 거리에 있다는 거짓말이 브루스 웨인에게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고담시 사람들에게는 영웅 하비 덴트라는 거짓말이 필요하다. '하비 덴트는 죽는 순간까지 타락하지 않고 악에 맞선 영웅이었다. 나쁜 놈은 배트맨이다. 그녀석 때문에 일이 다 잘못됐다.'라는 것짓말, 바로 이 거짓말 때문에 조커라는 혼돈을 은폐하고 비로소 고담시의 질서는 유지될 수 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것은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다(고담시 사람들이 왜 조커를 탓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조커가 바로 혼돈 그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는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배트맨은 다르다. 그는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자,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녀석이다. 게다가 아무도 그의 실제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 그는 그냥 상징에 불과하기 때문에 - 거꾸로 그 녀석에게 뭐든지 덮어씌울 수 있다. '이게 다 배트맨 때문이다'라고. 마지막 장면에서 배트맨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난 고담시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될 수 있다."

마지막 장면, 배트맨은 자기 탓이라고 거짓말을 하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만으론 부족하다. 때론 사람들에겐 진실 이상이 필요하다..." 그렇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선 진실이 아닌 진실 이상, 환상이 필요한 것이다. 비난을 감수하기로 결심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함으로써 배트맨은 자기 몸으로 조커가 열어 놓은 균열을 틀어막으면서 고담시의 환상을 완성시킨다.

이제 비로소 고담시 사람들은 패닉상태에서 벗어나 질서 속에서(비록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해도)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질서의 불안전성이 잠깐잠깐 드러나는 순간은 계속 있을 것이다. 범죄는 여전히 발생할 것이고,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고담시가 혼란의 도가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다 배트맨 때문이다'라며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으니까. 배트맨만 잡으면 된다고 믿을 테니까.

(그러나 우리는 고든 경찰청장이 결코 배트맨을 잡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고든은 배트맨을 잡지 않아야만 한다. 배트맨이 체포되는 순간 고담시의 환상 또한 깨져버리니까. 배트맨은 영원히 도망다니면서,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고담시의 모든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뒤집어써 줘야 한다.)

고담시의 질서 그 자체인 배트맨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 질서를 파괴하는 무법자인 것처럼 거짓말을 해야만 고담시의 질서를 유지시킬 수 있다. 그래야만 질서에 대한 근원적이며 해결 불가능한 위협인 조커를 은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배트맨은 결코 '백기사'가 될 수 없다. 그는 고담시를 지탱해 주는 기사지만, 스스로 모습을 숨김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사, 바로 '암흑의 기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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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3 17:55 2008/08/23 17:55
  1. 김이슬
    2008/08/25 23:58
    아, 고정닉을 더 이상 고수하기엔
    내가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어...;

    난 오히려 배트맨도 조커 류의 잔여물, 실재라고 생각했었는데
    저렇게 생각하는게 좀 더 아귀가 맞아떨어지겠네.
    • onecent
      2008/08/27 00:40
      나는 아직 고정닉을 고수하지 못할 만큼 세상을 알지는 못하니까 그냥 이대로 쓰겠다..ㅎ

      메멘토도 그렇고 이번 다크나이트도 그렇고.
      크리스토퍼 놀런(또는 그와 두 작품 스토리를 같이 쓴 동생 조너선 놀런)은 정신분석의 세계관을 알고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단 말이야.. 어쨌든 이래저래 놀라운 영화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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