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허위채무부담과 가등기의 종류
   허위채무를 부담하고 가등기를 경료하여 주는 경우, 부담하는 허위채무의 종류에 따라서 경료되는 가등기의 법적 성질이 달라진다. 허위로 부동산에 관한 매매계약을 가장하여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부담하는 경우에는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 보전을 위한 가등기(이하 ‘보전가등기’라 한다)를 경료하게 될 것이고, 허위로 금전채무를 부담하는 경우에는 채무 담보를 위한 가등기(이하 ‘담보가등기’라 한다)를 경료하게 될 것이다.


2. 가등기 경료행위가 ‘허위양도’에 해당하는지 여부

허위로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그에 따른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을 보전하기 위하여 보전가등기를 경료한 경우, 본등기가 경료되지 않은 이상 부동산의 ‘양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가등기를 경료하는 행위는 강제집행면탈죄에서 말하는 ‘허위양도’에 해당할 여지는 없으며 오로지 ‘허위의 채무 부담’에 해당할 뿐이다. 따라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가등기 경료행위가 아니라 가등기의 등기원인이 되는 허위채무부담행위이다.


3. 허위채무부담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를 구성하기 위한 요건

그런데 허위로 채무를 부담하는 행위가 언제나 강제집행면탈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재산을 은닉, 손괴, 허위양도 또는 허위의 채무를 부담하여 채권자를 해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즉, 허위로 채무를 부담하는 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허위채무부담행위가 실제로 채권자의 강제집행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허위채무부담행위가 채권자의 강제집행에 해를 끼치는지 여부는 부담하는 허위채무의 종류와 채권자의 채권의 종류에 따라서 달라진다.

즉, 만약 채권자의 권리가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인 경우, 채무자가 허위로 금전채무를 부담하고 이를 담보하기 위하여 담보가등기를 경료하여 주었다고 하더라도, 채권자의 권리는 이전등기청구권이며 금전채권이 아니므로 채무자가 허위의 금전채무를 부담한 사실만으로는 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어떠한 침해가 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대법원 1982. 5. 25. 선고 81도3136 판결 참조).

결국 허위채무부담행위(그리고 가등기를 경료하는 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를 구성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채권자의 권리와 허위로 부담한 채무의 종류에 따라 발생하는 네 가지 경우의 수를 구분하여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4. 유형별 검토

가. 채권자의 권리가 금전채권인 경우

  (1)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한 경우(보전가등기 경료)

    (가) 판례 : 없음

    (나) 검토

단순히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한 것만으로는 금전채권의 강제집행에 어떠한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없다(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해 주기까지 한다면 채무자의 책임재산을 감소시켜 강제집행에 실질적인 해를 끼치게 될 것이나, 이 경우는 허위양도에 의한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므로 처벌이 가능하다). 그러나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보전을 위한 보전가등기까지 경료한 경우에는 금전채권의 강제집행에 장애를 발생시킨다고 할 수 있다. 보전가등기가 경료된 이후에 강제경매 개시등기가 이루어지고 경매절차가 진행되는 경우, 보전가등기는 경매로 부동산을 취득한 매수인이 인수하는 부담이 되고, 따라서 보전가등기의 존재는 경매목적물의 가격을 산정하는 데 있어서도 고려된다. 그러므로 보전가등기가 존재하는 경우 경매절차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매수를 꺼리게 되고, 결국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서 경매가 이루어지는 결과가 되어 채권자들이 채권의 만족을 제대로 얻지 못하게 될 위험이 크다.

문제는 이처럼 허위채무를 부담하는 행위와 그에 따라 가등기까지 경료하는 행위를 달리 취급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인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보전가등기가 경료되었는지 여부에 따라서 금전채권의 강제집행에 미치는 효과가 현저히 다르므로 양자를 구별해서 취급하는 것이 충분히 설득력을 얻는다. 대법원 또한 “피고인이 위 판시와 같은 허위의 금전채무를 부담한 사실만으로는 위 채권자들의 지분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어떠한 침해가 된다고 볼 수 없다. 다만 위 허위채무부담에 따라 경료한 가등기가 위 채권자들의 권리실현에 장애가 된다면 별문제이나…”라고 설시하여 단순 허위채무부담행위와 허위채무부담에 이은 가등기 경료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의 성립여부와 관련하여 달리 취급될 수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채권자의 권리가 금전채권인 경우, 허위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부담하는 행위만으로는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으나, 소유권이전등기를 허위로 부담하고 그 보전을 위하여 가등기까지 경료한 때에는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한다고 보아야 한다.


(2) 금전채무를 허위로 부담한 경우(담보가등기 경료)

  (가) 판례 :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한다.

대법원 1996. 1. 26. 선고 95도2526 판결, 대법원 2008. 6. 26. 선고 2008도3184 판결.

  (나) 검토

금전채권에 의한 강제집행은 채무자의 재산에 대한 강제경매 등의 환가절차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채무자에 대한 다른 채권자들도 경매절차에 참여하여 배당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므로 허위로 금전채무를 부담할 경우 결과적으로는 정당한 채권자가 배당받을 금액이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허위로 금전채무를 부담하는 행위는 금전채권의 채권자의 강제집행을 해할 위험이 발생한다. 만약 허위의 금전채무부담행위에 더하여 그 채무를 담보하기 위한 담보가등기까지 설정하는 경우, 담보가등기는 저당권과 마찬가지로 우선변제권이 인정되기 때문에 채권자의 강제집행에 해를 끼치는 정도가 더 크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허위채무부담’ 요건과 ‘채권자를 해할 것’의 요건이 모두 충족되므로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한다.


나. 채권자의 권리가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인 경우


  (1)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한 경우(보전가등기 경료)

    (가) 판례 :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 위 판시중의 가등기는 그것이 비록 그 판시와 같은 통모에 의하여 가장한 매매예약을 원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할지라도 … 위 가등기에 순위보전의 효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술 매매예약상의 청구권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던 만큼 이를 직접적으로 甲(채권자)의 그 판시와 같은 청구권에 기한 강제집행을 불능케 하는 사유에 해당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바이니…” (대법원 1967. 12. 18. 선고 67도1166 판결)

    (나) 검토

소유권이전등기의무의 강제집행을 면탈하기 위하여 타인에게 부동산을 허위로 매도하고(이중매매 상황이 된다) 그 타인에게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 보전을 위한 가등기를 경료하여 주었다고 하더라도, 본래의 채권자는 자신의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에 기한 강제집행을 완료할 수 있다. 즉, 채권자는 소유권이전등기청구소송에서 승소확정판결을 받아 그 판결을 이용하여 단독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할 수 있으며, 타인 명의로 보전가등기가 경료되어 있는지 여부는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허위채무부담’ 요건은 충족되나 ‘채권자를 해할 것’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이후에 가등기에 기한 본등기가 경료된다면 채권자 명의의 소유권이전등기는 직권 말소되겠지만, 그 경우에는 본등기 경료행위를 허위양도에 의한 강제집행면탈죄로 처벌하면 될 것이다.


  (2) 금전채무를 허위로 부담한 경우(담보가등기 경료)

    (가) 판례 :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채권자인 소외 甲의 권리는 이 사건 토지의 1382/3951 지분에 대한 이전등기청구권이며 금전채권이 아니므로 피고인이 위 판시와 같은 허위의 금전채무를 부담한 사실만으로는 위 채권자들의 지분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어떠한 침해가 된다고 볼 수 없다. 다만 위 허위채무부담에 따라 경료한 가등기가 위 채권자들의 권리실현에 장애가 된다면 별문제이나 가등기는 본래 본등기를 위한 순위보전의 효력밖에 없는 것이므로 가등기가 경료된 것만으로는 위 채권자들의 지분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대법원 1982. 5. 25. 선고 81도3136 판결)

    (나) 검토

위 대법원 판결의 설시와 같이, 채권자의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에 대한 강제집행은 채권자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하는 것으로 완료되므로 채무자가 허위의 금전채무를 아무리 부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의 강제집행에 대한 장애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채권자를 해할 것’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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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11:22 2009/05/27 11:22
  1. onecent
    2009/05/27 11:23
    검찰에서 이런 것만 하면 즐겁게 출근할텐데 말이야..







헌재 2004. 12. 16., 2003헌가12, 판례집 제16권 2집 하, 446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제3조 제2항 위헌제청


"...특정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의 필요성이 아무리 높고 범죄행위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고조된 상태라 하더라도 형법의 기본원칙인 죄형의 균형성을 무시하면서까지 형량을 높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형벌이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잔인하면 일시적으로는 범죄 억지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중벌에 대해 면역성과 무감각이 생기게 될 뿐이고, 나아가 범죄예방과 법질서 수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법질서의 영속성과 안정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뿐이다."


"일찍이 몽테스키외는 “모든 이완의 원인을 살펴보면 이완은 범죄를 처벌하지 않았던 것의 결과이지 형벌을 경감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형벌을 받아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폭정의 결과이다. 폭정은 악당에 대해서나 정직한 사람에 대해서나 동일한 형벌을 과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잔혹한 형에 의해서 사람들이 억압되어 있는 나라가 있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대부분 정부의 폭력의 결과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한 정부는 이런 형을 가벼운 죄에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중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는 규범준수를 담보할 것으로 기대되는 요소로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제재의 양 내지 강도”(Sanktionshöhe)가 아니라 “제재의 개연성 내지 가능성”(Sanktionswahrscheinlichkeit)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즉, 규범을 위반한 경우에 제재가 가해질 개연성 내지 가능성이 높을수록 규범준수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형사특별법은 형법전이 미처 범죄로 파악하지 못했던 신종 범죄의 신속한 규율이라든가 일정 영역에 있어서 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인 규정을 둘 필요성이 있는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제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법률의 철저한 집행을 통하여 범죄를 억지하는 것이 아니라 중형을 규정한 법률의 제정을 국민들에게 홍보함으로써 위하를 통한 범죄의 억지를 꾀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는 폭처법을 포함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형사특별법이 일반법인 형법에 규정된 범죄의 형가중만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중벌주의가 언제나 부정적인 효과만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중벌주의에만 의존하는 형사정책은 문제가 있다. 폭처법의 경우 범죄발생시간이나 장소, 수단, 전과, 상습성 등에 따른 형벌가중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에 대하여 가중처벌하는 것이 반드시 특별법 제정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차이는 그 차이가 중대하지 않는 한 법정형의 범위내에서 해결할 수 있고, 만일 법정형이 이들 범죄의 다양한 유형을 차별화하여 적용하기에 한계가 있다면 법정형을 강화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멋진 글이다.
헌법재판소 실무수습 과제를 하면서 찾아 본 결정문인데, 읽다가 감동해버렸다.
헌재 결정문을 읽으면서 감동한 건 행정수도특별조치법사건(관습헌법사건)에서 전효숙 재판관이 쓴 반대의견 이후로 처음이다.
앞으로 감동적인 결정문이 많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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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7 21:55 2009/04/07 21:55







http://onecent.x-y.net/trennungstheorie.pdf

행정법연습 발표문으로 작성한 것.

발표문 데드라인이 화요일 오후 세시였는데, 우리는 일요일 오후가 돼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월요일, 화요일 모두 아침부터 4층 법전 사무실에 앉아서 점심은 라면으로 때우고, 저녁은 시켜먹으며 스무장을 써냈다.

분리이론의 비밀을 푼 느낌이다. 비록 우리의 억측(;)에 기반한 것이긴 하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가 작업실로 썼던 4층 법전 사무실. 여길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감에 쫓겨서 미친듯이 글을 써야 할 때는 도스토예프스키 옷을 입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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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3 22:03 2007/11/13 22:03
  1. nature
    2007/11/13 23:20
    태그에 도스토예프스키가 빠졌잖아..ㅋㅋㅋ
    • onecent
      2007/11/15 01:02
      도스토예프스키로 검색한 사람한테 이걸 보여주긴 곤란하잖아; 안그래?







형사소송의 심판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두고 견해가 나뉘는데, 다수설과 판례(의 주류)는 '잠재적 심판의 대상'과 '현실적 심판의 대상'을 구분하는 이른바 이원설을 취한다. 그리고 공소제기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의 사실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범죄사실대상설, 구성요건에 대입하여 재구성된 사실을 의미하는 소인(count) 개념을 도입하여 소인이 심판 대상이라고 보는 소인대상설, 현실적 심판의 대상은 소인이고 공소사실은 잠재적 심판의 대상이라고 보는 절충설이 주장된다.

일본 형사소송법상의 소인 개념을 형사소송법의 해석에 도입할 이유는 전혀 없다. 소인을 '법적 구성요건에 대입하여 재구성된 사실'이라고 보는 이상, 이는 형사소송법상 '공소사실'(엄밀히 말하면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 개념과 동일한 의미이다. 소인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용어만 증가시켜 불필요하게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소인 개념을 전제로 하는 절충설과 소인대상설은 (판례가 흔히 쓰는 표현을 빌자면) '취할 바 못된다.'

이원설과 범죄사실대상설 중에서는 어떤 견해가 타당한가?
두 학설의 차이는, '현실적 심판 대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이원설에서 말하는 '잠재적 심판의 대상'은 범죄사실대상설에서 말하는 '범죄사실'과 동일한 개념이기 때문에, 결국 심판 대상을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으로 나누는지 여부만이 두 학설의 차이점이다.

나는 '현실적 심판 대상'이라는 개념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원설을 지지하는 이재상 교수의 설명을 보자.
"법원의 현실적 심판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이고 그 공소사실과 동일성이 인정되는 사실은 공소장변경이 있을 때에 비로소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에서 잠재적 심판의 대상에 불과하다.." (형사소송법(제6판), p.382 25행 이하)

그러나 이러한 이원설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수긍할 수 없다.

1. 심판의 대상(소송물)이라는 개념을 설정하는 취지 자체에 반한다. 소송물의 범위를 확정하는 것의 실천적 의미는, 그것이 이중기소가 금지되는 범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고 기판력이 미치는 범위를 결정하는 기준도 된다는 데 있다. 법원이 그 사실에 대해 심판하였기 때문에 판결이 확정된 뒤 다시 공소를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고(기판력), 법원이 그 사실을 이미 심판하고 있기 때문에 중복해서 심판을 청구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이다(이중기소). 이원설은 기판력의 범위와 이중기소가 금지되는 범위를 '잠재적 심판의 대상'의 범위와 동일하게 설정하는데, 그렇다면 '잠재적 심판의 대상'만이 본래 소송법 이론에서 말하는 '소송물(=심판의 대상)'인 것이다. 심판의 대상과 기판력이 미치는 범위, 이중기소가 금지되는 범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미 소송물 개념을 해체시켜 버리는 것이다.

2. 법률의 규정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법원은 심리의 경과에 비추어 상당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공소사실 또는 적용법조의 추가 또는 변경을 요구하여야 한다(형사소송법 제298조 제2항). 만약 이원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잠재적 심판의 대상'에 대해서는 공소장 변경이 있기 전까지는 법원이 심리를 할 수 없다고 본다면, 대체 무슨 수로 법원이 "심리의 경과에 비추어" 공소장을 변경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제298조 제2항은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 이외의 사실에 대해 법원이 심리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규정이다.

3. 공소장변경 없이 공소사실과 다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공소장 변경이 없어도 (1)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불이익을 미치지 않는다면 (2) 공소사실의 동일성이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과 다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 일관된 판례 법리인데, 이 역시 '공소사실과 동일성이 인정되는 범위 내의 사실', 즉 '잠재적 심판의 대상'에 대해 법원의 심리가 가능함을 전제로 할 때에만 나올 수 있는 결론이다. 다수설은 이 문제를 이른바 "축소사실의 인정"이라는 이름하에 논함으로써 마치 공소사실에 완전히 포섭되는 "축소사실"인 경우에만 공소장변경필요성이 없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그래야 '현실적 심판 대상'의 범위 안에서 법원이 심리판단하는 이원설과 들어맞기 때문에), 대법원의 판시내용으로부터는 결코 축소사실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법리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


지난 일주일간 쌓인 울화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이재상 교수의 범죄사실대상설에 대한 비판 부분을 조목조목 뜯어보기로 하자.

"공소사실대상설(=범죄사실대상설)도 심판의 범위를 공소사실과 동일성이 인정되는 모든 사실에 확대하는 결과 피고인의 방어권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형사소송법이 특히 공소장변경제도를 인정한 취지를 무의미하게 한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공소사실대상설은 공소불가분의 원칙에 관한 형사소송법 제247조 제2항에 치중한 나머지 같은 법 제254조와 제298조를 완전히 무시한 이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p.382)

범죄사실대상설에 따르면, 이른바 '현실적 심판의 대상'보다 심판의 범위가 확대되는 것은 사실이고, 그에 따라 피고인의 방어권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 제298조의 공소장변경 제도가 필수불가결한 것이 된다. 법원이 심판하는 범위는 전법률적, 사회적 관점에서 파악된 사실(즉 '범죄사실')이지만, 공소장에 검사가 기재한 공소사실만을 인정할 수 있음이 원칙이다. 즉, 검사가 적용을 구한 범죄구성요건이 아닌 다른 구성요건이 충족됨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피고인의 예상을 깨는 재판을 하지 않기 위해 공소장변경 절차를 거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민사소송법 제136조 제4항의 법적 관점 시사의무와 구조가 완전히 동일하다)

그러므로 범죄사실대상설은 "형사소송법이 특히 공소장변경제도를 인정한 취지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사소송법이 왜 '특히' 공소장변경제도를 두어야만 했는지를 적절하게 설명해 주는 학설이다. 그리고 법 제254조와 제298조는 피고인 방어권 보호를 위한 필수적인 장치로서 그 중요성이 한층 강조되는 것이지, 이들 조문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원설 측에서 범죄사실대상설에 가하는 비판은 어느 하나 타당한 것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덧붙이자면, 형사소송법의 소송물을 '범죄사실', 즉 전법률적,사회적 관점에서 파악된 사실이라고 규정하고 나면, 민사소송과 형사소송, 행정소송(항고소송)을 관통하는 통일적 소송물 개념을 정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바로 [전법률적,사회적 사실관계]를 그 핵심으로 삼는 소송물 개념으로서, 민사소송에서는 이른바 이원설의 입장과 맞아떨어지고, 항고소송의 경우 처분사유 추가변경의 한계와 관련해서 논의되는 '기본적 사실관계' 와도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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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4 01:10 2006/12/24 01:10







형사소송법

제229조 (배우자의 고소)
제1항 형법 제241조의 경우에는 혼인이 해소되거나 이혼소송을 제기한 후가 아니면 고소할 수 없다.
제2항 전항의 경우에 다시 혼인을 하거나 이혼소송을 취하한 때에는 고소는 취소된 것으로 간주한다.

제232조 (고소의 취소)
제2항 고소를 취소한 자는 다시 고소하지 못한다.

이혼소송의 소장이 각하된 경우에도 제229조 제2항의 "이혼소송을 취하한 때"에 포함되는지를 놓고 학설은 대립한다. 포함된다고 보는 게 다수설이고,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가 소수설이다. 판례는 다수설과 같은 입장이라고 하는 게 일반적이다. 소수설은, 자신의 의사로 이혼소송을 취하한 것이 아닌 소장각하의 경우를 취하 또는 취하간주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다수설과 판례를 비판한다.

이렇게만 보면, 소수설의 견해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간통죄의 고소의 효력을 혼인의 해소 또는 이혼소송 계속과 결합시켜 놓은 것은, 혼인관계가 계속되는 이상 일방 배우자가 타방을 형사처벌하는 결과는 법이 허용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따라서 혼인을 해소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표명하지 않는 이상 간통죄를 범한 배우자의 처벌을 구할 수 없고, 이혼소송 중에 그 소를 취하함으로써 혼인 해소의 의사를 철회하였다면 고소 역시 취소한 것으로 의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혼 소장의 각하만으로는, 소 취하나 취하 간주와 비교해 볼 때 혼인관계 지속의 의사를 표명했다고 보기 힘들다. 재판장의 소장 보정명령에 응하지 않은 것이나 공판기일에 불출석함으로써 취하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나 원고의 귀책사유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일단 적법하게 계속된 소송의 변론기일에 의도적으로 불출석하는 것(그것도 취하간주를 위해서는 쌍방 당사자가 불출석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과, 소장을 제출함으로써 혼인관계 해소의 의사를 명백히 표시하였지만 소장의 형식적 잘못으로 인해 각하명령을 받는 것은, '혼인관계 해소의 의사 존부'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실질적 차이가 존재한다.

이상의 내용을 압축해서 답안지에 써 주고, 그러므로 소수설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 주면 깔끔하게 논점 하나 해결될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렇지가 않다.

문제는 대법원의 입장이다.
정말로 대법원이 다수설과 마찬가지로 이혼소장이 각하된 경우를 취하 또는 취하간주와 같이 보는가?

이 문제에 대한 판례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빠지지 않고 인용하는 95도477 판결의 판결문을 꼼꼼히 살펴보자. (직접 링크를 타고 가서 한번 들여다 보자. 특히 참조조문 부분을)

형사소송법(이하 법이라고만 한다) 제229조 제1항은 간통에 대한 고소는 혼인이 해소되거나 이혼의 소를 제기한 후가 아니면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위 고소는 혼인관계의 부존재 또는 이혼소송의 계속을 그 유효조건으로 하고 있다 할 것인바, 위 고소 당시 이혼의 소를 제기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소장이 각하된 경우에는 처음부터 이혼의 소를 제기하지 아니한 것과 같아, 그 고소는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고 할 것이다. (95도477)

대법원은 이혼소장이 각하된 경우 고소의 효력을 부인하는 근거를 제229조 제1항 에서 찾고 있지, 제229조 제2항 을 적용하고 있지 않다(참조조문으로 제1항이 명시되어 있다).
교과서들에서 말하듯이 이혼소장 각하를 취하와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 관한 한 대법원의 입장은 다수설과 같지 않으며, 그에 대한 소수설의 비판은 판례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

제229조를 살펴보면, 제2항이 없더라도 이혼소송에서 소를 취하하거나 취하간주된 경우 고소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제1항이 있는 한, 이혼소송의 계속이 어떤 이유로든(소장 각하든, 소각하판결이든, 취하든 간에) 소멸되면 그에 따라 고소의 효력 역시 소멸된다.
그런데도 굳이 제2항을 둔 것은, 제232조 제2항의 재고소 제한의 효과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이재상 교수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p.192 14-16행)

정리하자면, 이혼소송의 계속이 (사유 여하를 막론하고) 소멸하면 제229조 제1항에 의해 고소의 효력도 소멸한다.(학설은 소급효냐 비소급효냐를 놓고 다투는데, 이 논의는 내가 보기엔 전혀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그리고 소송계속의 소멸이 소 취하와 취하간주에 의한 경우에는(그리고 그 경우에만), 제229조 제2항이 적용되어 고소취소로 간주되고, 그 결과 제232조 제2항의 적용을 받아 다시 고소하는 것이 금지된다.

이렇게 해석하면, 소장각하의 경우에는 제229조 제1항에 의해 고소의 효력이 소멸하고 일단 간통죄 사건은 공소기각판결로(이 경우는 제327조 제2호에 의한 기각판결이다. 고소취소간주규정의 적용이 없으므로 제5호가 적용되지 않는다) 종료될 것이다. 그러나 제232조 제2항이 적용되지 않는 결과, 고소인은 다시 이혼청구의 소를 제기하고 다시 고소를 해서 처벌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소장 각하의 경우 일단 제229조 제2항이 아닌 제1항을 적용하면 이와 같은 결론이 나오는 게 논리적이지만, 아쉽게도 대법원은 첫 단추는 제대로 꿰 놓고 길을 잘못 들고 만다. 95도477 판결의 두 번째 판시사항을 보자.

그런데 법 제232조 제2항은 고소를 취소한 자는 다시 고소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혼소장이 각하된 경우에도 위와 같이 고소가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고소를 취소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는 이상, 이 경우에도 역시 위 규정에 따라 다시 고소하지 못한다고 봄이 위에 본 형사소송법의 각 규정의 입법취지에 비추어 상당하고 이와 달리 오로지 고소를 취소한 경우에 한하여 위 규정이 적용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 (95도477

"이혼소장이 각하된 경우에도 위와 같이 고소가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고소를 취소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는 논리로 대법원은, 제229조 제2항이 아닌 제1항이 적용되는 경우인데도 제232조 제2항을 적용하고 있다. 이는 법률 규정상 근거가 없을 뿐더러, 취하와 취하간주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그 경우만을 특별히 취급하는 제229조 제2항의 존재의의를 간과한 해석이다. 이혼소장이 각하된 경우는, 대법원 말처럼 고소가 효력을 상실한다는 점에서는 고소취소와 같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고소취소에만 부여되는 법적 효과가 소장 각하에도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제229조 제2항과 같은 조문을 '일부러' 두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대법원의 입장은, 학설이 지적하는 것처럼 소장 각하를 취하와 동일하게 취급하기 때문에 잘못인 것이 아니라, 근거 없이 제232조 제2항의 적용범위를 확대하고 있기 때문에 부당한 것이다.



...물론, 가장 심각한 문제는 대법원의 잘못된 해석론도 아니요 대법원의 입장을 오해한 학설도 아니고, 이걸 도저히 답안지에 다 쓰고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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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4 00:16 2006/12/24 00:16
  1. ch2
    2007/10/11 05:35
    와, 님 대단하시네여

    저는 지금 형소법 시작하는 공무원 수험생인데, 이혼소장이 각하되면 다시 재고소를 하는 방법이 안나와있길래 끙끙 앓다가 혼자 찾고 있던 중이였거든여. 전 아직 결혼은 안했지만 만약 단지 소장각하라는 이유만으로 재고소를 못하고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그런경우는 없어야 한다는 정의감에 불타서여 ㅋㅋ

    근데 님이 적어놓은 글 보고 감탄했습니다^^;; 절차위반으로 해서 공소기각판결이 남으로써 소장을 다시 쓸수 있게됐군여 ㅋㅋ

    와,속시원하다 잘읽고 갑니다
  2. guna
    2007/10/12 09:45
    와, 님 대단하시네여

    초시때라면-_-이것만 물고 늘어져서 열변을 토하면 과락은 면하게 해줄지도? -_-ㅋ
  3. KCG
    2009/01/19 22:30
    지대로네요~ 지대로야..화이팅하소서







분리이론

쿵푸(工夫) Posted at 2006/10/29 02:01
분리이론은, 제23조 제3항(독일기본법 제14조 제3항)의 직접효력성을 전제로, 그 적용을 배제하기 위한 이론이다. 즉 분리이론은 직접효력설을 전제로 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제23조 제1항,제2항과 제3항을 분리하고, 이러이러한 경우는 제3항은 적용되지 않고, 제1항과 제2항이 적용될 뿐이라고 하면, 재산권 제한을 당한 사람은 법원에 직접 보상청구를 할 수 없게 된다. 보상 어쩌구 하는 문언이 담겨 있는 건 제3항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1항,제2항이 적용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비례의 원칙 위반으로 해당 법률이 위헌무효일 수는 있다. 그런 경우는 취소소송을 통해 처분의 취소를 구하든지 아니면 위헌법률에 근거한 처분임을 이유로 국가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헌법재판소가 분리이론을 수용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직접효력설이 학계의 다수설임을 의식한 것일까?

(이 부분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_-; 우리 헌법재판소가 분리이론을 수용한 이유에 대한 추측으로는 타당할지 모르나, 분리이론의 원산지인 독일의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 설명이다. 독일연방헌재가 분리이론을 도입한 실천적 의의가 무엇이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2006.12.24. 수정)

개발제한구역을 지정하여 그 안에서는 건축물의 건축 등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는 도시계획법 제21조는 헌법 제23조 제1항, 제2항에 따라 토지재산권에 관한 권리와 의무를 일반·추상적으로 확정하는 규정으로서 재산권을 형성하는 규정인 동시에 공익적 요청에 따른 재산권의 사회적 제약을 구체화하는 규정인바, 토지재산권은 강한 사회성, 공공성을 지니고 있어 이에 대하여는 다른 재산권에 비하여 보다 강한 제한과 의무를 부과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기본권을 제한하는 입법과 마찬가지로 비례성원칙을 준수하여야 하고, 재산권의 본질적 내용인 사용·수익권과 처분권을 부인하여서는 아니된다.  [1998.2.4, 89헌마214]

헌법 제23조에 의하여 재산권을 제한하는 형태에는, 제1항 및 제2항에 근거하여 재산권의 내용과 한계를 정하는 것과, 제3항에 따른 수용·사용 또는 제한을 하는 것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전자는 입법자가 장래에 있어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형식으로 재산권의 내용을 형성하고 확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국가가 구체적인 공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미 형성된 구체적인 재산적 권리를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박탈하거나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1999.4.9, 94헌바37]


그리고 89헌마214 판례의 아래 밑줄친 부분의 설시는, 분리이론/경계이론 문제와는 상관이 없고, 다만 헌법불합치 결정의 효력 때문에 인정되는 것이다. (행정법 볼때부터 저 판례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던지 -_-)

도시계획법 제21조에 규정된 개발제한구역제도 그 자체는 원칙적으로 합헌적인 규정인데, 다만 개발제한구역의 지정으로 말미암아 일부 토지소유자에게 사회적 제약의 범위를 넘는 가혹한 부담이 발생하는 예외적인 경우에 대하여 보상규정을 두지 않은 것에 위헌성이 있는 것이고, 보상의 구체적 기준과 방법은 헌법재판소가 결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입법형성권을 가진 입법자가 입법정책적으로 정할 사항이므로, 입법자가 보상입법을 마련함으로써 위헌적인 상태를 제거할 때까지 위 조항을 형식적으로 존속케 하기 위하여 헌법불합치결정을 하는 것인바, 입법자는 되도록 빠른 시일내에 보상입법을 하여 위헌적 상태를 제거할 의무가 있고, 행정청은 보상입법이 마련되기 전에는 새로 개발제한구역을 지정하여서는 아니되며, 토지소유자는 보상입법을 기다려 그에 따른 권리행사를 할 수 있을 뿐 개발제한구역의 지정이나 그에 따른 토지재산권의 제한 그 자체의 효력을 다투거나 위 조항에 위반하여 행한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 [1998.2.4, 89헌마214]


[+] 분리이론에 대해서는 행정법연습 수업 때 발표를 맡은 걸 계기로 글을 하나 쓰게 되었다. 분리이론의 비밀을 풀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_-;
발표문은
http://onecent.x-y.net/tt/entry/분리이론의-수용가능성과-보상규정-없는-공용침해의-구제방법 참조. (2007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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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9 02:01 2006/10/29 02:01
  1. GS.
    2006/10/30 20:19
    제목을 보자마자 튀어나오는 욕 ㅅㅄㄴ.
    이거 너무 싫어..







어음법에 관한 단상들

쿵푸(工夫) Posted at 2006/10/29 01:18

1. 어음법은 수학과 비슷하다.

'돈을 억지로 받아낼 수 있는 힘'을 '권리'라고 추상화하고, 그것을 종이에 쓴 몇글자로 다시 物化시켜 놓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전제로 했던 채권이 그 자체로 완전히 독립되어 둥둥 떠다닐 수 있게 되는 셈인데, 그것만으로도 고도의 추상적 사고를 요하는데다가 사람들 손을 거쳐가면서 종이에 싸인이 늘어날 때마다 물화되는 권리도 덩달아 늘어나는 게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엄격한 형식성과 그 때문에 나타나는 논리성이 수학과 닮았다.

당장 밥벌어먹고 사는 데 별로 도움이 안되고, 지적 유희에 가깝다는 점 또한 비슷하다.
(지적 유희이기 때문에 어음법이 유독 내 흥미를 끄는지도 모른다)


...물론 수학은 근대 세계의 가장 밑바닥을 닦은 주춧돌인 반면, 어음에 관한 법리는 법학의 기초라기보단 채권법이 갈 데까지 간 최종 결과물 정도일 뿐이다.


2. 어음법을 이해하는 지름길은, 어음은 '물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권리가 화체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권리'에 주목해서는 정상적/비정상적인 배서를 거치면서 얽히고 섥힌 권리관계의 늪에 빠져버리고 만다.

어음은, 그 이전에 있어서는 사실상 동산과 같다. 그러기에 선의취득도 인정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음상 권리'의 취득"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는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아직 확실히 결론을 내린 건 아니지만, 현재 내 생각으론 아예 '틀린' 표현이다) 오해의 소지가 큰 표현이다. '어음상 권리의 취득'이 아닌 '어음의 취득'이라고 하는 게 낫다(또는 그래야 한다).

승계취득/선의취득을 따질 때는, "어음을 누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느냐" 만이 문제가 된다. 그 종이 위에 무슨 권리가 담겨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어음법 제16조 제2항에서는 분명히 "...어음의 소지인이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그 권리를 증명한 때에는 그 어음을 반환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다)

누가 어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느냐(법상의 표현을 빌자면, 누가 '적법한 소지인'인가)가 정해지면, 그 어음에 어떠한 권리가 화체되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이는 서명날인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해결된다.

결국, 교과서들이 언급은 하지만 상세히 검토하지는 않는, '교부행위와 서명날인을 분리하고, 권리의 이전은 교부행위에 의해, 채무부담은 서명날인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는, 일본에 있다는 학설'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라 생각된다.

어음위조의 입증책임에 관한 판례로 유명한 다음의 전원합의체판결 역시 이 점을 (어렴풋하게나마) 설시하고 있다. ('권리'의 귀속 운운한 걸로 봐서는 여전히 '권리의 화체'라는 관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듯하다)

"배서의 자격수여적 효력에 관하여 규정한 어음법 제16조 제1항은 어음상의 청구권이 적법하게 발생한 것을 전제로 그 권리의 귀속을 추정하는 규정일 뿐, 그 권리의 발생 자체를 추정하는 규정은 아니라고 해석되므로, 위 법조항에 규정된 "적법한 소지인으로 추정한다"는 취지는 피위조자를 제외한 어음채무자에 대하여 어음상의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자로 추정된다는 뜻에 지나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기명날인이 위조된 것임을 주장하는 사람에 대하여까지도 어음채무의 발생을 추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대법원 1993.8.24. 선고 93다4151 전원합의체 판결]

이처럼 '어음의 귀속'과 '어음상 권리의 발생유무(존재유무)'를 구분하는 것은, 어음행위의 표현대리 문제, 이른바 '어음의 효력발생시기'의 문제 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열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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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9 01:18 2006/10/29 01:18
  1. 가넷
    2006/11/09 02:07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네가 법대에 들어갔다는 걸 알고는 상당히 의외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어음수표법을 재미있어했던 이유가 수학과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걸 네 덕분에 뒤늦게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 수학이 어려워서(그리고 주변의 권유로) 문과를 택하긴 했다만 수학은 어려워하면서도 상당히 재미있어했던 기억이 난다.
    어음법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것 같다. (지금은 거의 다 잊었지만...)
    재미있지? ^^
    • onecent
      2006/12/24 00:20
      음..의외이셨다니. 역시 전 법대 타입이 아니었던 것일까요.ㅎ

      어음법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이번학기 성적을 받아놓고 나니 참 심란해지는게..;

      ㅎㅎ 뭐. 재미있고 마음에 들지만 실력은 안좋은거.
      저한테 정말 수학하고 어음법은 똑같군요.
  2. 동현.
    2007/08/13 01:44
    어수 1순환에 들어선 수험생 입장으로서 굉장히 흥미롭구나.ㅎㅎ;
    언제 이에 대해서 웅재의 강의를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
    • onecent
      2007/08/14 02:12
      저 판례에서 진짜로 중요한 건 저 부분인 것 같은데 별로 강조가 안되더라구요...

      어음법은 지금 생각해도 진짜 흥미롭고, 그러면서 어려운 과목인듯.ㅎㅎ 아무리 봐도 학설대립이 기억이 안난다는..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를 대비시키면서 좋음과 나쁨, 그리고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가치체계를 설명한다. 강한 자와 약한 자에 관련된 논의는 특히 제 1논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니체에 따르면, 선과 악의 가치체계는 원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이는 약한 자들의 도덕, 즉 노예의 도덕이다. 반면에 강한 자들은 선과 악이라는 기준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이라는 기준에 의해 판단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14(KGW VI 2)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pp.351~391. 특히 제10절과 제11절 참조.]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본질적 차이점은 그들의 행위가 능동적인 것인지, 아니면 수동적인 것인지에 있다. 물리적인 차원의 강함은 강한 자의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다. 육체적인 근력의 강인함이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권력 등이 물리적인 차원의 강함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러한 강함은 ‘도덕의 계보학’에서 니체가 언급하는 강함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 곳곳에서 강한 자를 묘사하면서 육체적·물질적인 힘의 발현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강한 자들을 ‘금발의 야수’ 혹은 ‘커다란 맹금류’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제압과 압박, 파괴와 승리를 강한 자들과 결부시킨다. [Ibid., pp.373~374, p.377 참조.] 폭력적인 요소를 연상시키게 하는 이러한 묘사를 단순하게 받아들인다면, 강한 자는 글자 그대로 다른 사람들보다 강한 물리적 힘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그래서 약한 자를 짓밟는 사람이라고 정의될 것이다. 반대로 약한 자들은 힘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강자의 폭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강한 것에게 강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요구하고, 그것이 압박욕, 제압욕, 지배욕, 적대욕, 저항욕, 승리욕이 아니기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약한 것에게 강한 것으로 나타나기를 요구하는 것만큼 불합리” [Ibid., p.377.]한 것이다. 어떤 활동이나 작용의 배후에서 이를 자유롭게 제어하는 ‘주체’ 따위는 없다. ‘강자가 원하기만 한다면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관념은 약한 자들이 강한 자들에게 책임을 지우기 위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하다. 약한 자들은 이러한 환상을 통해서 자신들의 약함을 스스로 의욕한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강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어서 자신들의 속성을 ‘선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다. [Ibid., 제1논문의 제13절, 제14절 참조.]

만약 강함이라는 것이 물리적인 힘을 의미하고, 강한 자들이 강함을 드러내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필연적이라면, 이는 결국 강자의 무자비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변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논리를 극단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면 결국 가장 냉혹한 적자생존의 법칙에 이르고 만다. 가장 힘이 강한 자만이 그보다 약한 자를 모두 제압하고 살아남게 될 것이고,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화될 것이다. 니체의 사상이 파시스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 [마크 네오클레우스, 파시즘, 이후, 2002, pp.26~29 참조.]은 바로 그의 글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되어, 무제한의 폭력 행사를 정당화하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함에 대한 니체의 주장을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강함 개념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해에 불과하다. ‘강한 자’와 ‘약한 자’는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물리적 힘의 강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는 누구보다도 강한 육체적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능동성을 갖추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바로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 [프리드리히 니체, Op.Cit., p.367.]에서 고귀한 모든 도덕이 생겨난다. 반면에 약한 자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긍정이 아닌 부정이다. “노예 도덕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대립하는 어떤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 … 노예 도덕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반작용” [Ibid.]인 것이다. 약한 자는 외부의 것을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확립한다. 약한 자에게 있어서 ‘나’는 ‘타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강한 자’는 거꾸로 ‘타인’을 ‘내가 아닌 것’으로 규정한다.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의 이러한 차이 때문에 두 존재양식의 행위 양태는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폭력성과 잔인성은 강한 자들의 행위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현상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강한 자들은 결코 타인에 대한 폭력성과 잔인성 그 자체를 목적으로서 추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강한 자들은 타인을 짓밟을지는 몰라도, 짓밟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짓밟으려고 한다’라는 말 자체가 벌써 배후에 존재하는 의도를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언어의 유혹’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한 자들의 폭력성과 잔인성은 그들의 소박한 무지, 혹은 “고삐 풀린 맹수”의 순진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다.

폭력성과 잔인성은 강한 자에게 있어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약한 자 역시 얼마든지 폭력성과 잔인성을 표출할 수 있다. 오히려, 약한 자야말로 타인을 짓밟고 폭력을 가하려고 하는 사람, 그러한 폭력적 행위를 목적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타인을 짓밟는 행위는 이미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이와 같은 폭력적 행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타인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만족이다. 이렇게 일그러진 형태로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가장 약한 자들의 힘을 향한 의지가 발현되는 모습이다. [Ibid., pp.488~489 참조.]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관계를 의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행위는 아무리 물리적으로 강한 힘을 동반한다고 해도 반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짓밟으려고 하는 자는 그 누군가를 끊임없이 ‘곁눈질’할 수밖에 없다.

강한 자들은 구태여 다른 사람을 일부러 괴롭히려고 하지 않는다. 원한과 증오는 부정에 바탕을 둔, 약한 자들의 감정이며, 이러한 감정은 강한 자들에게는 없다. 강한 자는 행위를 함에 있어서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의 행위의 원천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강한 자는 ‘곁눈질’하지 않기 때문에, 즉 타인을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될 수는 있을망정, 폭력 행사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한 자들에 대한 강한 자들의 감정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에 가까운 것이 된다. 타인의 존재가 자기 자신의 규정이나 스스로의 행위에 전제가 되지 않는 진정한 능동성을 갖춘 상태에서 바로 ‘거리의 파토스’의 출현이 가능해진다.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지 않는 능동성,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각종 부정적 영향을 ‘소화’해 내는 ‘망각의 힘’을 갖춘 사람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강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묘사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능동적 인간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여 주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설명을 믿는다면, 카이사르에게서는 ‘거리의 파토스’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카이사르 개인의 사전에는 복수라는 낱말이 없다. 복수심에 불타는 쪽과 복수의 대상이 되는 쪽이 같은 수준에 있지 않으면 복수심은 성립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4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한길사, 1996, p.359.]

“‘갈리아 전쟁기’와는 달리, ‘내전기’에는 적에 대한 카이사르의 경멸감이 주조음을 이루고 있다. 자기가 상대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증오도 원한도 복수심도 초월할 수 있다. 증오나 원한이나 복수심은 경멸에 자리를 양보한다.” [Ibid., p.501.]


반면, 루쉰의 소설 ‘아Q정전’에 등장하는 아Q는 능동성을 갖추지 못한 약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아Q의 이른바 ‘정신적 승리법’은 자신이 당한 굴욕과 고통을,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둔갑시켜서 자기만족을 얻는, 약한 자들의 자기기만이다. 더 나아가 그는, 스스로를 경멸하고 따귀를 때림으로써 쌓인 원한을 해소하려고까지 하는데, 이는 원한에 기초한 행동양식 뿐만 아니라 그 원한의 방향을 스스로에게 되돌리는 모습까지도 보여 주고 있다. [루쉰, 아Q정전·광인일기, 혜원출판사, 1997, pp.60~65 참조.]

결국 ‘도덕의 계보학’에서 능동성은 강함의 본질적 요소이며, 그 둘은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니체가 말하는 강한 자는 스스로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능동성을 갖춘 사람이다. 니체는 이러한 능동성을 바탕으로 “인간 유형이 스스로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강력함과 화려함” [프리드리히 니체, Op.Cit., p.345.]에 이르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타인에게 얽매여 반작용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실현하지 못한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계속해서 곁눈질하며 움츠러드는 약한 자들로 가득찬 오늘날, 스스로를 실현하는 충만한 능동성을 바탕으로 외부 세계의 영향까지도 자신 안에서 긍정하고, 그러한 긍정하는 에너지를 더 확장시켜 궁극적으로는 외부 세계에 의지를 관철시키는 인간형을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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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1 02:33 2004/12/21 02:33
  1. onecent
    2004/12/21 02:34
    꽤나 공들여 쓴 과제.
  2. ^^
    2005/01/04 18:48
    타인에게 자유로울수 있는 사람은 정말 강한것 같아요..
    2005년에는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는데,,
    (오빠 말고요, 저요.ㅋ)
  3. onecent
    2005/01/08 00:42
    사실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건 있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몰라. 니체는 불가능한 이상을 이야기한 것일지도.

    좀 더 단단한 사람이라. ㅎ
    나도 좀더 단단해져야 하는데. 쩝.
    새해엔 너나 나나 더 단단해져야겠다.
  4. 이재학
    2005/07/27 01:13
    니체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가득차 있는 것 같아..ㅎㅎㅎ



    한 가닥 빛이 떠올랐다. 이제는 길동무가, 내 어디를 가든 업고 갈수밖에 없는 그런 죽어 있는 길동무나 송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길동무가 있어야겠다.

    스스로가 원하여 내 가는 곳으로 나를 따라가려는, 살아 있는 그런 길동무가.

    한 가닥 빛이 떠올랐다. 이제 나는 군중이 아니라 나의 길동무들에게 말하련다! 내가 고작 가축 떼나 돌보는 목자나 개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여기 가축 떼로부터 많은 가축을 꾀어내기 위해 왔다. 군중과 가축들은 내게 화를 내리라. 나는 목자들로부터 도둑이라 불리기를 바라노라.

    나는 저들을 목자라고 부르지만 저들은 저들 자신을 선한 자, 의로운 자라고 부른다. 나는 저들을 목자라고 부르지만 저들은 저들 자신을 참신앙의 신도라고 부른다.

    저들, 선하다는 자와 의롭다는 자들을 보라! 저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저들은 저들이 지금까지 떠받들어온 가치관을 파괴하는 사람. 바로 파괴자, 범죄자를 가장 미워한다. 그러나 이같은 사람이야말로 창조하는 자인 것을.

    저들 온갖 신앙의 신도들을 보라! 저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저들이 떠받들어온 가치를 파괴하는 사람, 바로 파괴자, 범죄자가 아닌가. 그러나 이같은 사람이야말로 창조하는 자인 것을.

    창조하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은 송장이 아니라 길동무다. 무리나 추종자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더불어 창조할 자,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판에 써넣을 길동무를 찾고 있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그리고 더불어 추수할 자를 찾는다. 모든 것이 무르익어 수확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백 개의 낫이 부족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삭을 손으로 뽑아내며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자신의 낫을 갈 줄 아는 자들을 찾는다.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파괴자, 선과 악을 경멸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리라. 그러나 그런 자들이야말로 추수하는 자요 축제를 벌이는 자인 것을.

    나는 나와 더불어 창조할 자를, 더불어 추수하고 더불어 즐겁게 축제를 벌일 자를 찾고 있다. 가축의 무리와 목자 그리고 송장과 더불어 내가 무엇을 도모하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5. 이재학
    2005/07/27 01:18
    그리고.. 괜히 하나 더


    < 男兒當自强 >


    傲氣面對萬重浪,
    패기는 만근의 파도에 맞서고


    熱血像那紅日光.
    끓는 피는 저 붉은 태양과 같이 빛나니


    膽似鐵打, 骨如精鋼,
    담력은 단련된 무쇠, 뼈는 정련한 강철


    胸襟百千丈, 眼光萬里長.
    가슴엔 거대한 포부, 눈빛은 끝없이 멀리


    我發奮圖强, 做好漢.
    나는 온 마음으로 사나이가 되리라


    做個好漢字, 每天要自强.
    사나이라면, 매일 스스로 강해져야 하고


    熱血男兒漢, 比太陽更光.
    열혈남아는 태양보다 빛나야 하는 법


    讓海天爲我聚能量, 去開天闢地,
    천지여, 내게 힘을 모아주소서 내가 천지를 개벽하리라


    爲我理想去闖看,
    내 이상을 위해 뛰어들리라


    看碧波高壯, 又看碧空廣闊浩氣揚,
    푸른 파도의 웅장함을 보면서, 그리고 푸른 창공의 광할함을 보면서 호연지기를 키우노라


    我是男兒當自强.
    나는 마땅히 스스로 강해지는 사나이 대장부


    昻步挺胸大家作棟梁, 做好漢.
    늠름한 걸음으로 가슴을 쫙 펴고 모두의 기둥으로써 멋진 사나이가 되리라


    用我百點熱, 耀出千分光.
    나의 들끓는 열정으로 온 세상에 빛을 밝히리라


    做個好漢字, 熱血熱腸熱, 比太陽更光.
    사나이가 되리라, 온몸의 뜨거운 피로.. 태양보다 더 빛나리라.







프로이트는 만족을 얻지 못하고 무의식으로 억압된 욕망이 억압을 피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증상이라고 보았다. 성적 충동의 에너지인 리비도는, 금지에 부딪치고 욕망의 충족이 좌절될 경우 에너지를 배출시킬 수 있는 어떤 다른 출구를 찾아야만 한다. 증상은 결국 깊숙이 감추어진 것에 대한 일종의 대용물[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 강의, 열린책들, 2002, pp.380~381 참조.]인 것이다. 신체의 일부가 갑자기 마비되거나, 다른 모든 신체기능은 정상인데 유독 언어 장애만 나타난다거나 하는 등의, 이른바 히스테리 증상의 원인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규명되었다. 따라서 감추어져 있는 것, 억압되어 있는 욕망을 환자로 하여금 드러내게 함으로써 증상은 해소될 수 있었다.

초기에 프로이트는, 증상 형성이 환자의 어린 시절의 체험과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점을 임상 경험을 통해 확인하고, 어린 시절의 외상적 체험, 이른바 ‘원초적 장면’이 증상을 형성하는 원인이 된다는 가설을 세웠다. 유아기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거세위협, 부모로부터 유혹당한 경험 등이 무의식 속에 자리를 잡은 채 증상형성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임상 사례를 통해 프로이트는 그러한 외상적 체험이 많은 경우 실제로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그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는 ‘원초적 장면’은 환자들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초적 장면’이 실제로 일어났었는지 아니면 단지 환상에 불과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심리적 결과물 역시 일종의 현실성을 지니는 것이며, 이는 한 개인에게는 실제 체험, 즉 물리적 실재보다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심리적 실재[자끄 라깡의 ‘환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라는 말은 심리적 실재가 갖는 중요성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로서 받아들여진다. “신경증의 세계에서는 심리적 실재가 결정적”인 것이 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Op.Cit., pp.495~506 참조.]
[엄밀히 말한다면, 어떠한 기억도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지 않다. 모든 기억은 왜곡의 산물이다. 역사적 사건은 그 사건을 경험한 주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왜곡되어 머릿속에 저장되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은 같은 사건을 겪은 여러 사람들의 기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거세공포증은, 아버지가 실제로 아이에게 어머니에 대한 욕망의 단념을 요구하며 거세 위협을 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어느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에게 그와 같은 위협을 직접적으로 할 수 있겠는가? 별다른 의도 없이 한 말 한마디, 혹은 어떤 일상적인 사건 하나가 어린 아이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으며, 이러한 인상이 환상 속에서 부풀려지고 변형되어 ‘진정한 거세위협의 체험’으로 구성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꼬마 한스의 사례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스의 엄마는 결코 한스에게 진정으로 위협을 가한 적이 없다. 그저 ‘만지지 마라’ 정도의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이 한스에게는 거세공포증, 나중에는 말에 대한 공포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영향을 미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꼬마 한스와 도라, 열린책들, 2002 참조.]

호프만의 소설 ‘모래사나이’에서 주인공 나타니엘이 겪은 어린 시절의 사건 역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소설 전반에 걸쳐 신비스러운 요소가 산재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히나 도입부에 등장하는 나타니엘의 편지글은 비현실적인 점이 너무 많아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시커먼 구멍만 남은 사람의 얼굴이 나타난다거나, 코펠리우스가 어린 나타니엘의 눈에 새빨간 재를 뿌리려고 했다거나, 나타니엘의 손과 발을 떼었다가 다시 붙여놓았다거나 하는 등의 묘사[E. T. A. Hoffmann, Tales of Hoffmann, Penguin Books, 1982, pp.91~92 참조.]가 갖는 비현실성은 명백하다. 게다가 객관적 관찰자의 시점에서가 아닌, 나타니엘 자신의 시점에서 쓰여진 편지글을 통해 이러한 내용이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이와 같은 사건이 나타니엘의 환상의 산물이라는 프로이트의 지적[Sigmund Freud, "The Uncanny"(1919), SE 17, pp.227~228 참조.]이 매우 설득력을 갖는다.

프로이트가 분석한 것처럼[Ibid., pp.227~232 참조.], 나타니엘은 유모가 이야기해 준, 어린아이들의 눈알을 뽑아 간다는 모래사나이의 이야기에서 심한 충격을 받았고, 나타니엘의 거세공포증은 이 이야기와 결합해서 형성되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눈알이 뽑힐지도 모른다’는 관념이 나타니엘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끊임없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음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타니엘이 스스로 써 놓고도 ‘이게 대체 누구의 끔찍한 목소리인가!’라고 놀라움을 표시한(그럼으로써 무의식의 작용을 의미심장하게 암시한) 시에도 눈이 뽑히는 모티프가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나타니엘은 코폴라가 내 ‘좋은 눈! 좋은 눈!’이라고 외쳤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는 반응을 보이고, 급기야 올림피아의 눈알이 뽑힌 것을 보고는 미쳐버리고 만다. 망루 위에서 돌연 나타니엘을 발작하게 한 것 역시 망원경을 통해 무엇인가를 본 행위였다. 결국 나타니엘이 첫 번째 편지글에서 이야기한 사건이야말로 나타니엘의 ‘원초적 장면’인 것이다. 그리고 코펠리우스는 아버지의 나쁜 측면, 즉 자신에게 거세 위협을 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징한다. [Ibid., p.232.]

그러나 이와 같은 프로이트의 설명에 동의한다고 하면, 중대한 의문점이 떠오르게 된다. 나타니엘은 대체 왜 이러한 환상을 만들어냈는가? 이는 심리적 실재 개념을 인정할 경우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의문이기도 하다. 사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세위협을 환상 속에서 만들어내고, 이로 인해 거세공포증 속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왜 신경증자는 환상을 통해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거세위협을 있었던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신경증자가 거세위협을 환상을 통해 만들어내는 이유는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어머니와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와 동시에 어머니로부터 분리하고자 한다.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가로막는 아버지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의 구조 속에 완전히 매몰되어 자신의 욕망을 갖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완전한 만족을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어머니와의 결합 역시 근본적으로 결핍된 주체를 채워줄 수 없다. 아버지가 나를 거세하려고 한다는 환상,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와 경쟁하고 있다는 환상이야말로 완전한 충족을 줄 수 있는 욕망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다. 주체에게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거세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결핍에 대한 인정이다. [페터 비트머(홍준기·이승미 옮김), 욕망의 전복, 한울아카데미, 1998, pp.138~161 참조.] “상징적 거세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아버지의 금지명령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 더 편하다.” [Jacques Lacan, Le Séminaire VII, p.354. (Ibid., p.160에서 재인용.)]

나타니엘은 아버지의 금지명령을 필요로 했고, 그렇기 때문에 거세위협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나타니엘의 아버지는, 비록 그에 대한 묘사는 소설 속에서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매일 저녁 아이들을 불러 앉혀놓고 기묘한 이야기를 해 주는 데 열을 올리는, 자상한 성격의 사람이다. 게다가 저녁때가 아니고는 아버지는 일 때문에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약간의 대담함을 무릅쓴다면, 나타니엘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너무 잘해주는’ 아버지였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타니엘에게 금지명령을 내리고 나타니엘을 그 유아적 욕망의 대상인 어머니로부터 분리할 수 있게끔 하는 역할을 나타니엘의 아버지는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타니엘은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위협을 코펠리우스라는, 원래부터 매우 불쾌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사람으로부터 찾았다. 모래사나이 이야기로부터 얻은 충격과 코펠리우스에 대한 불쾌감과 두려움이 결합하면서, 나타니엘의 환상 속에서 코펠리우스는 아버지가 하지 못한 아버지의 역할을 떠맡는 대체물이 된 것이다. [나타니엘의 공포증은 꼬마 한스의 경우와 유사한 점이 많다. 한스는 말에 대한 공포증에 시달렸는데, 라깡은 이와 같은 공포증의 원인은, 한스가 말을 아버지의 대체물로 생각한 데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스 아빠는 한스와 엄마를 분리하지 못함으로써 한스의 불안을 증폭시켰고, 이는 한스의 말 공포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브루스 핑크(맹정현 옮김), 라캉과 정신의학, 민음사, pp.282~283 참조.]

비록 그의 거세공포증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고, 그가 의욕한 것이었다고까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니엘은 그와 같은 공포증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된다. 나타니엘의 분리는 끝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여 정신병적인 이자관계를 벗어나 상징계에 진입하여 삼자관계를 이루는 것이 ‘정상적인’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라깡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나타니엘은 아버지의 금지를 거세위협의 형태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타니엘은 완전한 만족을 주는 대상을 찾고 그것에 집착하는, 정신병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클라라와 올림피아를 대하는 나타니엘의 태도는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클라라는 욕망을 가진 주체이다. 따라서 그녀는 나타니엘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나타니엘의 신비주의적 성향을 차갑게 비웃기도 하고, 그가 생각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타니엘 역시 그녀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욕망의 구조를 가진 주체들간의 만남은 언제나 이렇게 일정한 불협화음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들 사이에는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그와 같은 상황을 참지 못한다. 그는 완전한 합일을 원하고, 자신의 욕망이 전부 채워지길 바란다. 그런 그에게 있어 올림피아는 완벽한 만족을 줄 수 있는 대상이었다. 올림피아는 욕망을 가진 주체가 아니다. 그녀는 아무 의미도 없는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타니엘은 정확하게 자기가 원하는 바를 올림피아 안에 투사해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다. 나타니엘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는 올림피아,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E. T. A. Hoffmann, Op.Cit., p.118.]인 올림피아는, 사실상 자기 자신에 불과하다.

결여된 주체에게 완전한 만족, 결핍의 제거는 불가능하다. 타인의 욕망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형성하고, 무의식에 의해 분열되어 있는 주체는 서로간의 결핍을 인정하면서 부분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완전한 만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코펠리우스 같은 악마를 만들어 내면서까지 외면하고 싶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외면이 도를 지나쳐 올림피아와 같은 인형에 리비도를 투사해서 완전한 만족에 집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으로 자신의 빈 곳을 채우려고 하는 헛된 노력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남는 것은 나타니엘과 같은 파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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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0 23:44 2004/11/10 23:44
  1. onecent
    2004/11/10 23:45
    이것 역시 숙제로 써낸 글.
    왠지 블로그가 점점 과제 저장소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_-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나간 짓이다. 단 몇 분에 걸쳐 말로 완벽하게 표현해 보일 수 있는 어떤 생각을 500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어뜨리는 짓. 보다 나은 방법은 이미 그러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책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하나의 코멘트, 즉 그것들의 요약을 제시하는 척하는 것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민음사, 1994, p.16.


<리비도>라는 명칭은 에로스의 힘의 발현을 죽음 충동(원래의 번역본은 '본능'이라고 번역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엄연히 본능(Instinkt)과 충동(Trieb)을 구별했다. 원어 Todestrieb는 '죽음 충동'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이하에서도 '본능'을 '충동'으로 모두 고쳐서 인용했다)의 에너지와 구별하여 가리킬 때에도 사용할 수 있다. ... 우리가 죽음 충동과 에로스의 관계 및 그 충동의 본질을 가장 뚜렷이 통찰할 수 있는 것은 사디즘에서다. 사디즘에서는 죽음 충동이 고유한 의미에서의 성적 목적을 왜곡하면서도 성 충동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그러나 사디즘이 성적 목적과는 관계없이 맹목적인 파괴성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 충동의 만족이 강렬한 나르시시즘적 쾌락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파괴 충동을 만족시키는 것은 전능에 대한 자아의 오랜 원망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2003, pp.300-301.


내 인생에서 일어나곤 했던 굉장히 치욕적이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며 비열하고, 무엇보다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라면 뭐든 간에, 언제나 내게서 한량없는 격노와 더불어 무궁무진한 쾌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흡사 범죄의 순간처럼,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도, 만약 내가 뭐든 훔쳤다면, 나는 훔치는 일을 수행하면서도 나 자신의 저열함의 깊이를 의식하는 데서 나오는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한 것은 이 저열함이 아니라 (그 순간에도 나의 의식은 전적으로 온전했다), 저열함에 대한 고통스러운 의식에서 나오는 환희가 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다 그랬지만, 결투선에 서서 적수의 일격을 기다리고 있을 때면 나는 꼭 그와 같은 치욕적이고 광포한 감각을 느끼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는 그 느낌이 굉장히 강했다. 자인하건대, 그것이 내겐 이와 같은 종류의 그 어떤 것보다더 더 강렬한 것이었기 때문에 내 쪽에서 그것을 추구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악령(하), 열린책들, 2002, p.1065.


- 이것은 여기에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절해나가는 무의식적 본능의 완벽한 기능의 확실성이나, 심지어는 위험이든 적이든 무모하게 돌진하는 것 같은 어떤 어리석음이, 아니면 그 어떤 시대에도 고귀한 영혼이 스스로를 다시금 인지하게 되었던 분노, 사랑, 경외, 감사, 복수 등을 열광적으로 순간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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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7 23:59 2004/10/07 23:59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강의’에서 자신이 정신분석이라고 이름붙인 심리학적 연구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에 비견될 만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지동설로 인해 “인류는 우리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그 크기가 전혀 상상 불가능한 우주 체계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고, 진화론은 “인간이 창조에 관한 특권을 지닌다는 생각을 파괴”해 버렸다. 이렇게 두 번씩이나 상처입은 인류의 자존심은 뒤이어 정신분석학에 의해 “가장 민감한 모욕”을 당하게 된다. “자아가 자신의 집안에서도 더 이상 주인일 수 없으며, 자신의 정신생활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대해서 오직 초라한 정보들만을 접하고, 이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정신분석학이 보여 준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 강의, 열린책들, 2004, p.388 참조.]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선언한 이래 인간은 의식적 사유의 힘을 의심치 않았다. 명료한 의식은 나의 행위를 가능케 했고, 곧 내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의식은 곧 나의 존재 그 자체라고까지 받아들여졌다. 의식의 확고함에 기대어 인간은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고, ‘아는 것이 힘이다’고 당당히 외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인간의 오만함에 일침을 놓았다. 의식되지 않는 것, 무의식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인간 삶의 동력원으로서 무의식에 주목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을 취한다면, 내가 의식하는 것이 더 이상 나의 전부가 아니게 된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크 라깡은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틀어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표현한다. Jacques Lacan, Ecrits, Paris: Seuil, 1966, p.571. (김상환, “라깡과 데까르트”,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비평사, 2002, p.163에서 재인용)]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확고한 자기의식’이라는 환상이 주는 안정감과 평온함을 버리고, 알지 못하는 무지의 영역과 대면하는 불안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프로이트의 이론이 거센 저항에 부딪쳤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이 소개되고 받아들여지기까지의 과정은, 저항을 극복하고 억압된 진실을 드러내는 정신분석의 과정과 구조적 유사성을 띠고 있다. 무의식의 존재는 받아들이기 싫은, 따라서 억압된 고통스러운 진실이었고, 프로이트에게 쏟아졌던 온갖 비난과 논박은 분석을 거부하는 저항의 일종이었던 셈이다.

프로이트는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을 해석하면서, 작품 속에서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의 살해자일 뿐만 아니라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과정이 정신분석의 과정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Sigmund Freud,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 pp.261-262.] 역병이 창궐하여 고통받는 테베를 구하기 위해 라이오스를 죽인 사람을 자신이 반드시 찾아내리라고 선언하는 순간부터, 자기가 찾으려던 그 사람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음을 마침내 알게 되는 때까지, 오이디푸스는 사실상 자기분석의 과정을 거치게 되며, ‘오이디푸스 왕’은 이러한 자기분석의 과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억압되어 있는 진실, 분석의 대상이 되는 진실은 바로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의 살해자이며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오이디푸스가 행하는 자기분석이 끝나기 전까지 이러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뿐인데, 그는 “진실은 그것을 아는 자에게는 고통일 뿐”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거듭된 추궁 끝에 테이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에게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 주자, 오이디푸스는 격노하여 그와 같은 사실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는 크레온이 테이레시아스와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석 과정에서 피분석자는 계속해서 집요하게 분석가에게 저항한다. 저항은 분석가가 제시한 사실에 대해 단순히 격렬히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합리적인 논변을 통해서 그에 대해 반박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 강의, 열린책들, 2004, pp.390-394.] 분석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일반적 현상은 ‘오이디푸스 왕’에서 역시 그대로 나타난다. 테이레시아스를 통해 처음 진실과 대면하자 오이디푸스는 강하게 이를 부정(denial)함으로써 진실로부터 도망친다. 이는 분석을 통한 진실의 폭로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저항이다. 테이레시아스와의 대화에서 오이디푸스는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있으며, 그가 보이는 격렬한 감정의 표출은 부자연스럽다. 오이디푸스가 누구인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를 구한 자, 논리적 추론능력을 보유한 자,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따라갈 사람이 없는 자” 아닌가? 그렇게 합리적이고 현명한 사람이 뜬금없이 크레온을 끌어들이며 음모론을 내세우는 모습은 흡사 어두운 비밀을 들킨 사람이 황급히 진실을 부정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분석의 과정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점점 더 진실이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오이디푸스의 저항은 맹목적인 부정에서 합리적인 논변의 형태로 바뀐다.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던 보루는 “하나는 여럿일 수 없다” 는 명제였다. 논리적 규칙에 의거한, 일견 견고해 보이는 이 명제가 오이디푸스가 분석에 저항하기 위해 사용한 무기였다.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와의 대화에서 그의 부모와 관련된 저주를 언급할 뿐 아니라 그의 결혼에 무언가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내비치기까지 한다. 이오카스테는 라이오스의 인상착의를 묘사해 줄 뿐만 아니라, 라이오스가 세 갈래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도 알려 준다. 이만큼이나 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이디푸스는 누군가로부터 폴리부스와 메로페가 자신의 부모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의심을 거두지 못해 신탁에까지 찾아갔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그 신탁에서 자신의 생부와 생모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고, 대신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만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이오카스테가 묘사한 것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세 갈래 길이 만나는 곳에서 죽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의 연속이라고 보기엔 지나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토록 현명한 오이디푸스가 고작 ‘하나는 여럿이 아니다’라는 이유 때문에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오카스테의 이야기를 듣고도 여전히 그 사건의 목격자를 만나야지만 진실을 알 수 있으리라고 하는 오이디푸스는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분석 과정에서 진실을 어떻게 해서든 한사코 부인하고 끝까지 저항하려는 피분석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오이디푸스는 이 작품에서 피분석자인 동시에 분석가의 역할도 하고 있다. 피분석자로서 그는 억압된 진실과의 대면을 한사코 피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분석가로서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자기 손으로 잡고자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찾는 범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오이디푸스는 ‘내가 모르는 나’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나의 존재를 이루고 있으나 내게 의식되지는 않는 부분, 즉 자신의 무의식을 발견하기 위한 자기분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오스를 죽인 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기 위한 오이디푸스의 여정은, 종국에 가서는 자신의 출생에 관한 의문,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 결합하면서 끝나게 된다. 오이디푸스가 찾아 나선 것은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작품 속에서 오이디푸스는 지혜로운 자, 수수께끼를 잘 푸는 자로 등장한다. 그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만만하다. 테이레시아스를 꾸짖는 장면에서 오이디푸스는 바로 자신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음을 당당하게 외치고, 예언자의 무지를 조롱한다. 테레시아스가 ‘눈이 먼’ 반면에, 오이디푸스는 ‘잘 보는’ 사람인 것이다. 보는 것은 결국 아는 것,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며, 눈이 멀었다는 것은 곧 무지함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눈멈’과 ‘봄’의 대비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그 상징적 의미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눈이 먼 테이레시아스이고, 자신의 현명함을 뽐내는, 두 눈으로 사물을 똑똑히 볼 수 있는 오이디푸스는 오히려 진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여기서도 의식의 힘을 과신하는 인간에 대한 프로이트의 지적은 유효하다. 인간의 인식능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정신분석학은 의식되지 않는 영역이 있음을 입증함과 동시에 바로 그 영역에 더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무의식이야말로 의식의 조그만 영역을 포함하는 더 큰 영역이다.” [Sigmund Freud,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405.] 오이디푸스의 삶의 진실은 바로 의식되지 않고 억압되어 있던 내용, 즉 그가 라이오스의 아들이며, 이오카스테의 아들이자 남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이전에 의식하고 있던 내용, 즉 그가 폴리부스와 메로페의 아들이라는 것은 허구에 불과했다. 진정으로 그의 삶을 지배했던 내용은 은폐되고 억압되어 있었다.

억압되었던 진실과 대면하는 순간에 오이디푸스가 보이는 반응은 이오카스테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오카스테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끝까지 철저히 외면했다. 그녀는 진실이 밝혀지려고 하자 그 자리에서 도망쳤으며,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알지 못하는 것, 의식할 수 없는 그것(Es)과의 공포스러운 대면을 이오카스테는 거부했다. 진실을 분명히 인정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와는 달리 오이디푸스는 그것(Es)과 대면했고, ‘내가 모르는 나’를 인정했다. 분석 과정 내내 도망치고 저항하던 오이디푸스였지만, 분석의 끝에서 그는 용감하게 대응했다. 역설적이게도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이 멀게 되어서야 진실을 볼 수 있게 된 셈이다. 자기 분석 과정을 거쳐 마침내 무의식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그의 반쪽짜리 정신세계는 비로소 완전해졌고, 오이디푸스는 진정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자신의 두 눈을 찌름으로써 ‘내가 모르는 나’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벌을 내리고 책임을 짊어졌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받아들였다. 분석가 오이디푸스는 저항을 극복하고 억압된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 남은 시커먼 구멍은, 파악되지 않는 그 무엇, 그 심연의 존재를 영원히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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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3 22:05 2004/10/03 22:05
  1. NeoAger
    2004/10/04 00:50
    비극 오이디푸스를 읽는 것인가요?? 이렇게 보니까 또 완전 새롭다는.. ㅋ
  2. onecent
    2004/10/07 22:47
    이건 수업 숙제로 낸 글입니다. ㅎ







마르트 로베르 (이재형 옮김), 정신분석 혁명 : 프로이트의 삶과 저작, 문예출판사, 2000

나는 정신분석을 라깡을 배우면서 처음 접했다. 정신분석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창조해 낸 사람은 라깡이 아닌 프로이트라는 점, 게다가 라깡이 자신의 이론적 작업을 '프로이트로의 복귀'라고 지칭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프로이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라깡의 이론을 먼저 접하게 된 것은 앞뒤가 뒤바뀐, 기형적인 접근이었던 셈이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순서로 따지면 당연히 프로이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라깡의 사상으로 가기 위한 선결조건임은 물론이다. 라깡 이론에 대한 오해를 피하고,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그의 작업의 모태가 되는 프로이트를 공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게다가, 프로이트를 라깡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수단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부당한 일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된 정신분석 운동은 여러 가지 갈래로 나뉘었고, 라깡은 그 중 하나의 지류를 차지하고 있다. 라깡과는 프로이트의 사상 이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는 자아심리학 역시 하나의 지류를 이룬다. 프로이트의 사상을, 라깡을 통해서 보지 않고 직접 접함으로써 오히려 라깡의 견해가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라고 판단하게 될지도 모른다(현재 내 상황에서 과연 그렇게 될지에 대해선 지극히 회의적이지만).

위에서 떠들어댄 이유는 사실 모두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프로이트는 그 자체로서 충분히 공부해보고 싶을만큼 매력이 있다.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리오.

어쨌든, 프로이트에 대해 좀더 잘 알고 싶었던 까닭에, 그와 관련된 수업을 이번학기에는 두개나 수강해 놓은 상태다. 로베르의 책은 그 중 한 수업에서 선생님께서 프로이트 입문서로 추천하신 책이다.

이 책은 프로이트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을 균형있게 그려내고 있는 전기서다.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에 의해 탄생하였으며, 초기 정신분석 이론이 변화하고 발달해 온 역사는 곧 프로이트의 삶의 궤적과 행보를 같이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프로이트의 삶, 프로이트 사상의 변천과정, (초기)정신분석학의 역사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낸다.

이 책의 내용은 원래 라디오로 방송되었다고 하는데, 그런만큼 평이한 문체로 쓰여져 있으며 따라서 읽어나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군데군데 읽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는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자연스러움 탓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프로이트의 원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용어의 번역에 좀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이드(Id)의 번역을 '그것'이라고 한 것은 부자연스럽다(물론 프랑스어를 병기해 놓긴 했다). 물론 프로이트가 사용한 용어는 das Es이고, 이는 독일어로 it, 즉 그것을 의미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Id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서 통용되었고(열린책들에서 나온 프로이트 전집에서도 '이드'라고 번역했다), '그것'이라고 글자 뜻 그대로 번역해서는 글을 읽으면서 이해하기도 매우 힘들다. 예를 들어 451페이지에 있는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를 인용해 놓은 부분을 살펴보자.

그것(ça)은 우리 인격의 어둡고 불가해한 부분으로서, 우리는 꿈의 가공과 신경증 징후의 형성을 연구함으로써 그것에 대하여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다. 게다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이 약간의 지식은 부정적인 특징을 띠고 있으며, 오직 자아와의 대조를 통해서만 기술될 수가 있다. 오직 어떤 비교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에 관해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며, 우리는 그것을 끓어오르는 감정으로 가득 찬 냄비인 혼돈이라 부른다. (p.451)

위에 인용된 부분에는 '그것'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각각의 '그것'이 과연 무의식을 지칭하는 '그것(Id)'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대명사 '그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이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냥 '이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혼란의 배경에는, 국내에 아직 프로이트가 사용한 용어들에 대한 번역의 표준이 마련되지 못한 사정이 자리잡고 있다. 프로이트의 개념에 대한 우리말 번역의 표준이 하루빨리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프로이트의 사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이 변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기존 생각이 오류였다는 확신이 서면, 주저하지 않고 기존의 견해를 폐기하고 자신의 이론을 변경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가장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야말로 진실이다'라는 것이 정신분석의 한 원리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프로이트는 스스로 자신의 이론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프로이트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의 저서를 풍부하게 직접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프로이트 사상의 변천을 개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깊이있는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디까지나 프로이트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이고, 그 목적은 훌륭하게 만족시키고 있다.

별로 어렵게 쓰여진 책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난 이 책을 그리 술술 읽지 못했다. 문체가 화려한 것도 아니요, 논리구성이 복잡한 것도 아닌 것은 분명한데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아마도 책을 읽을 당시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이 책을 통해 전체적인 틀을 조망했으니, 이제는 프로이트의 원전을 읽으며 더 공부를 할 차례다.

[+] 덧붙여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인용한다.
매일매일의 기분과 두려움과 근심이 스쳐 지나가는 이 편지들을 읽노라면 우리는 그걸 쓴 사람의 두 가지 얼굴이 뚜렷이 떠오르는 걸 보게 된다. 즉 그 중 하나는 어둡고 열정적이고 고뇌하고 맹목적인 집착을 보이고 때로는 감상적이라고 해야 될 정도로 민감하며 유머 기질을 타고난, 간단히 말하자면 후일 거기서 토마스 만이 낭만주의자들과의 형제 관계를 인정했던 그런 분위기를 가진 얼굴이다. 또 하나는, 합리적이고 약간 추론적이며 누군가 지적해주기만 하면 언제라도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고, 모든 것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는 경향이 있으며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얼굴이다.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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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8 21:29 2004/09/28 21:29
  1. 이지스
    2004/09/29 02:20
    예전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뭐? 그리 복잡한 내용인지... 머리아픈 책입니다. ㅡㅡ^
  2. onecent
    2004/10/03 22:08
    이지스/ 읽으신 책이 정확하게 어떤 글인지 잘 모르겠네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진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다른 제목의 글을 제목만 바꿔서 펴낸 것 같군요.

    아주 복잡하다고 느끼셨다면 번역이 매끄럽게 되지 않았을 탓이 크다고 봅니다. 저도 독일어를 못하는지라 프로이트 원문을 읽을 수는 없지만, 프로이트는 일상언어로 아주 글을 잘 썼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혹시라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열린책들에서 나온 프로이트 전집 중 '정신분석 강의' 나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 를 읽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강의 내용을 적은거라 구어체로 쓰여 있을 뿐더러, 입문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난해하지 않죠.







1. 가짜를 진짜로 만드는 가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단편소설집 ‘픽션들’에서 여러 가지 독특한 소설쓰기 기법을 사용한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을 쓰는 기법일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다. 그 소설에서 화자는 삐에르 메나르라는 작가가 남긴 작품들을 정리하면서, 그 중에서 화자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돈키호테’라는 작품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사실 삐에르 메나르라는 작가는 허구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당연히 메나르가 썼다고 하는 모든 작품들 역시 보르헤스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는 정말로 삐에르 메나르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메나르가 정말로 ‘돈키호테’를 비롯해 소설 속에 언급되는 수많은 작품들을 쓴 것처럼 믿게끔 만든다.

소설은 원래 허구를 다루는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자체는 소설이라면 당연히 가지게 되는 특징이고, 일견 전혀 독특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 속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루는 사실주의 문학이라고 해도 인물과 사건은 모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개연성을 희생하면서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환상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환타지 문학도 널리 읽히고 있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소설을 일반적인 소설들과 차별화하는 것은, 그가 허구를 다루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허구를 다루는 방식이다. 보르헤스는 허구적인 것, 즉 존재하지 않는 것 그 자체를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평가, 그것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라는 소설이 이와 같은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보르헤스는 제목 그대로 허버트 쾌인이라는 사람이 쓴 작품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허버트 쾌인이라는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허버트 쾌인과 그가 쓴 작품이 허구임은 분명하지만, 보르헤스는 일반적인 소설이 하듯이 허버트 쾌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직접적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대신, 그 허구적 존재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서 간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바로 이러한 기법,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이 오히려 더 사실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해 듣는 이야기에 대해 인간이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신뢰성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의사소통 과정에서 많은 경우 ‘아무개에게 의하면…’이라던가, ‘무슨무슨 책에 써 있는 바에 의하면…’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에 신빙성을 부여하고 권위를 얻으려고 한다. 신뢰의 원천으로 끌어들이는 사람 혹은 책이 명성을 얻은 경우 이와 같은 신뢰성은 증폭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듣는 사람은 단지 전해진 이야기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더 높은 신뢰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보르헤스는 이와 같은 사람들의 경향성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그의 허구에 진실성을 불어넣는다. 그의 이야기는 수많은 인용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중요한 점은 이들 중 상당수가 허구적인 것, 즉 가짜 인용이라는 사실이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보르헤스는 메나르의 작품을 열거하면서 그 작품이 출판된 잡지와 출판 연도를 일일이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잡지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거나, 아니면 실제로 그런 이름의 잡지는 존재하지만 출판 연도는 맞지 않는다. 더 나아가 보르헤스는 본문에 대한 주석을 추가하면서도 허구적 내용으로 주석을 채워 넣기도 한다.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보르헤스가 다루고 있는 허구적인 것,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도리어 생명력을 얻는다. 독자는 삐에르 메나르에 대해 찬사 혹은 비난을 보낸 수많은 사람들이 언급되는 것을 읽으면서, 또 메나르의 작품이 정확한 출판 사실까지 거론되며 열거되는 것을 읽으면서 메나르의 존재를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가짜의 현실성을 가짜로 획득하는 아이러니를 보르헤스는 보여주고 있다.


2. 주석들이 조각조각 모여서 실체를 창조한다

큐브는 정말 무한한 생각거리를 담고 있는 영화다

앞서 언급한 보르헤스의 소설들에서, 연구 혹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인물 혹은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보르헤스가 쓴 이야기, 즉 그것에 대한 주석뿐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던 것이 주석에 의해서 현실이 되고, 마침내는 존재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보르헤스의 글쓰기 형식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의 글 속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는 작은 주석의 조각들이 모여서 결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실체로 자리잡게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 ‘큐브’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큐브 안에 갇힌 사람들 중 하나인 워스는, 실제로 큐브의 설계에 참여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단지 외부 프레임만을 설계했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가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도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부분이 할당되었고, 그 사람들은 자기가 맡은 한 조각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조각들이 모여서 마침내는 큐브가 형성되었다. 작은 조각들이 퍼즐처럼 모여서 괴물과도 같은 세계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보르헤스의 소설에서와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틀뢴은 허구, 단지 몇몇 사람들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관념의 산물이었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던 일단의 사람들이 비밀 결사대를 조직했고 그들은 틀뢴을 창조해 냈다. 그들은 틀뢴에 대한 주석서, 즉 백과사전을 만들었고 그러한 주석들은 조각조각 나뉘어져서 현실 세계의 백과사전에 삽입되었다. 소설 속에서 화자가 틀뢴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우연히 영미백과사전에 끼워 넣어져 있는 ‘우크바르’라는 항목 때문이었다. 이처럼 현실 곳곳에 틀뢴에 대한 주석의 편린이 발견되었다. 영미백과사전의 하나의 항목만 있던 것이 곧이어 ‘틀뢴의 백과사전’ 한 권이 추가되고, 틀뢴의 글자가 새겨진 나침반이 등장하는 등 틀뢴의 조각은 하나하나 발견되다가 급기야는 틀뢴에 대한 완전한 주석, 즉 ‘틀뢴의 백과사전’ 전체가 등장하자 틀뢴은 그 순간 현실이 되어 버렸다. 분명히 틀뢴은 허구의 세계이고,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틀뢴은 사람들에게 현실 세계가 되어 버렸다. 실체의 부존재로 인한 빈 공간은 그대로일지라도, 그것에 대한 주석들이 퍼즐처럼 모여들어서 그 빈 공간을 감싸는 외피를 이루어낸 것이다. 시각적으로 비유한다면, 속이 비어 있으면서 겉껍질이 퍼즐조각으로 이루어진 공과 같은 모습으로 틀뢴은 현실 속에서 실체성을 획득했다.

거의 순식간에 현실은 항복을 선언했다. … 10년 전 그 어떤 대칭도 ― 변증법적 유물론, 반유태주의, 나치즘 ― 외형적 질서만 가지고 있으면 쉽게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 누가 질서정연한 혹성이라는 정밀하고 방대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서도 틀뢴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인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민음사, 1994, pp.48-49.]

단편적인 것이 여러 개 모여서 모호한 모습으로 하나의 실체를 이루는 방식은, 틀뢴의 원초적 언어에 형상화되어 있다. 틀뢴의 원초적 언어에는 명사가 없다. 하나의 실체를 지칭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동사, 혹은 형용사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체계는, 매 순간 사물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으며, 따라서 결코 똑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생각[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것도 동일하게 유지될 수 없다는 생각은,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기억력이 극대화된 나머지 한 순간에 나타나는 모든 세세한 사실을 전부 지각하고 기억할 수 있는 푸네스라는 사람을 통해서, 보르헤스는 사람들이 흔히 의식하지 못하고 행하는 개념화와 일반화에 대해, 그리고 언어 기호가 갖는 본질적 추상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보르헤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들은 푸네스가 일반적인, 그러니까 플라톤적인 생각들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개>라는 종목별 기호가 다양한 크기와 형상들을 가진 수많은 하나하나의 개들을 포괄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 나는 그가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에는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밖에 없었다.” Ibid., pp.187-188.]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순간의 상태를 묘사함으로써 하나의 사물을 지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달’이라고 명사를 사용해서, 변화하는 속성을 과감히 무시하고 일반화하여 실체로서 표현하는 것을, 틀뢴에서는 ‘어둡고 둥그런 위에 있는 허공의 밝은’ 과 같이 여러 형용사의 집합으로 나타내게 된다. 비유를 무릅쓰고 표현한다면, 명사를 사용하는 우리의 언어 체계가 점 하나를 찍음으로써 실체를 표현하는 데 비해, 틀뢴의 언어 체계는 수많은 점들을 한데 모아서 속이 빈 원을 그려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틀뢴의 현실화한 과정과 동일한 방식, 즉 애초에는 부재하던 것을 작은 단편들이 모여서 형성해내는 방식이다.

결국 이는 달리 말해 사람들의 관념이 실체를 만들어낸다는 이야기와 같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 즉 실재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있어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관념 속에서 존재해야만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관념 속에서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실재하는지 여부는 무관하다고까지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3. 텍스트의 ‘원래의 의미’는 없다

앞서 언급한 단편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도 동일한 발상을 읽어낼 수 있다. 세르반테스가 쓴 텍스트와 메나르가 쓴 텍스트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삐에르 메나르의 것은 전자(세르반테스의 것)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 [Ibid., p.85.]”고 주장한다. 똑같은 문장이라고 해도 그것이 세르반테스가 쓴 것일 경우는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한 것이 되고, 메나르가 쓰면 ‘놀라운’ 것이 된다. 얼핏 생각하면 황당무계한 이와 같은 차이는, 세르반테스와 메나르가 같은 텍스트를 썼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메나르와 세르반테스는 서로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았고, 서로 다른 사상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에 만약 현 시대의 사람인 메나르가 세르반테스와 똑같은 문장을 구사했다면, 그것은 과거의 시대의 정신에 그토록 근접할 수 있었다는 위대한 업적이며 자신의 현재 상황을 뛰어넘는 생각을 해낸 놀라운 성과인 것이다.

작가가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결국 동일한 텍스트라고 해도 읽는 사람의 시대, 그가 놓여 있는 공간, 그리고 그가 겪은 수많은 다양한 경험에 의해 텍스트의 의미는 천차만별이 된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텍스트는 독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라는 결론에 그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시공간의 차이, 그리고 경험의 차이에 따라 텍스트가 결코 동일한 의미로 읽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애시당초 그 텍스트를 쓴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돈키호테를 쓸 때의 세르반테스는, 작품을 완성한 후 몇 년의 세월이 지난 세르반테스와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시간이 지난 후 세르반테스가 자기 자신의 작품의 독자가 되어 돈키호테를 읽는다면, 그는 그가 쓸 때와는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작품의 의미를 읽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글을 쓰는 순간 이미 글을 쓸 당시의 세르반테스는 사라져 버린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텍스트는 그것이 쓰여지는 순간 그 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된다. 텍스트에게서 ‘원래의 의미’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된다. 만약 ‘원래의 의미’라는 것이 작가가 글을 쓸 당시 생각했던 바를 말하는 것이라면, 원래의 의미는 결코 도달될 수 없는, 영원히 상실된 목표에 불과하다. 심지어 원작자 자신조차도 원래의 의미를 완전히 복원해낼 수 없다. 텍스트의 ‘원래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사후적으로,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수많은 독자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텍스트를 독해하고 자신만의 의미를 읽어낼 것이다. 독자들이 찾아낸 의미들, 천차만별인 것에서부터 어느 정도 유사성을 띠고 있는 것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수만큼 다양하게 존재하는 의미들이 모여서 텍스트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는 틀뢴에 대한 조각들이 모여서 실체를 이루는 과정, 틀뢴의 언어체계에서 형용사들의 집합이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게 되는 과정과 똑같은 것이다. 텍스트의 ‘원래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지만, 독자들이 해석해 낸 텍스트의 다양한 의미들이 모여서 의미를 구성해 낸다. 만약 텍스트에 ‘의미’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는 이처럼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조각들이 모인 모호하고 불안정한 형태, 언제라도 새로운 부분이 추가되거나 모양이 변형될 수 있는 형태, 가운데의 실체적 부분(‘원래의 의미’에 해당하는 부분)은 비어 있는 형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관점을 취한다면 문학 작품을 분석하면서 작가의 의도를 추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무의미한 작업이 되어 버린다.


4. 구성된 현실

결국 보르헤스 자신의 소설 기법, 그리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내용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만들어낸 현실’, 즉 ‘구성된 현실’의 개념이다. 구성된 현실의 차원에서는, 만들어낸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의 의미, 형태, 속성 등은 그것을 지각한 인간들의 저마다 다른 관념의 집합으로써 결정될 뿐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다. 사람들의 관념이 조각조각 모여서 부재를 실재로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는 점은, 틀뢴이 현실이 되는 모습에서 확인된다. 유의미하게 존재하는 것은 관념 속에서 존재하는 것뿐이다. [칸트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는 것(X)이라고 보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지각하여 관념 속에서 현상으로 인식한 때에만 의미 있는 것으로 존재한다는 현상존재론을 주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백종현, 서양근대철학, 철학과현실사, 2001, pp.107-130 참조.) 보르헤스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관념의 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현상존재론과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없어도 상관없다고까지 생각을 발전시킨다면(즉, X조차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칸트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실재가 공허에 불과하다는 관점은 슬라보예 지젝의 이론에서 나타난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 pp.337-346 참조.)] 그리고 관념 속에서 사람들은 존재를 스스로 창조해 낸다. 보르헤스는 관념의 힘을 중요시한다. ‘원형의 폐허들’에서는 순전히 관념의 힘으로 하나의 인간을 창조하는 모습이 묘사되는가 하면, ‘비밀의 기적’에서 주인공은 탄환이 발사되고 그것에 맞을 때까지의 찰나 동안 자신의 관념 속에서 1년에 달하는 시간의 삶을 누리기도 한다. 관념적인 것, 즉 상상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르헤스는 그의 문학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관념에 의해 창조된 현실만이 진짜라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환상과 현실의 경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보르헤스의 기법을 흔히 ‘환상적 사실주의’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상 이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보르헤스가 ‘구성해 낸’ 이야기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성해 낸 현실세계’를 새롭게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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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03 16:52 2004/07/03 16:52
  1. onecent
    2004/07/03 21:45
    이 무시무시하게 긴 글은.. 지난학기 수업 기말과제로 썼던 것. 쓰면서도 재미있었고, 책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게 뭔가 주절주절 늘어놓은 적도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올려놓는다.
  2. 비밀방문자
    2006/06/08 23:19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3. md factory
    2006/10/30 18:48
    이터널 선샤인 시공간 분석하다 참고로 읽고갑니다^-^;

    싸이에 출처남겨서 과제함에다 옮겨놓았는데 싫으시면 삭제할게요.
  4. md factory
    2006/10/30 18:54
    왕. 읽다보니까 재밌네여. 작년에 성석제 소설 분석 했을 때 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