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5일, 코엑스 메가박스 M관

해리포터 시리즈는 영화로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것이 더 재미있다. 4권부터 이미 두시간 남짓한 분량의 필름에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규모의 이야기가 되었고, 그 탓에 영화에는 빠지는 내용이 너무나 많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이야기가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영화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이유는 바로 배우들 때문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엠마 왓슨(!)이거나, 연기를 잘하거나 둘 중 하나다. 영국 배우들의 명예의 전당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배우진은 화려한 이름들로 가득차 있고, 그들은 모두 제 이름값을 해낸다. 이번 편에 새로 등장한 엄브릿지 역할의 배우도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고(보는 내가 다 패주고 싶더라), 4편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던 볼드모트(랄프 파인즈)는 다시 봐도 역시나 멋지다. 게다가 3편부터 줄곧, 5분여에 그치는 출연시간으로도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스네이프 교수까지. 이런 사람들 틈에서 수년째 현장지도를 받고 있으니 대니얼 래드클리프도 연기실력이 느는 게 당연하다.

이번 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엄브릿지에게 추궁당하던 스네이프, 그리고 포니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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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8 02:03 2007/08/08 02:03
  1. GUNA.
    2007/08/08 08:30
    오로지 포니테일..
  2. 리더
    2007/08/10 01:30
    엄브릿지는 미드 위기에 주부들 시즌 1 에서 교활한 중년과부역으로 나오는 여자인데 그런 역은 진짜 어울리는 것 같아
    • onecent
      2007/08/10 01:38
      아..거기도 나오나요?
      보니까 영화제에서 상도 타고 나름대로 유명한 배우인거 같던데; 저는 해리포터에서 처음 봤죠;

      ...앗. 그런데 이것은 실시간 리플? ㅎㅎ
  3. 하영
    2007/08/11 18:30
    포니테일이 그렇게 좋더냐ㅎㅎㅎ
  4. GUNA.
    2007/08/11 18:55
    우와 나 엄브릿지 분명 어디서 봤다고 생각했었는데
    데스퍼릿하우스와이브즈였구나 ㅎㅎ
    저 리더는 역시....나문희님?
  5. 승현
    2007/08/26 21:14
    추궁당하던 스네이프 교수ㅋㅋㅋㅋ 진짜 넘어갈 뻔했어요ㅎㅎ저도 젤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ㅋ
    • onecent
      2007/08/27 20:02
      스네이프 나오기만 하면 히트장면이야 ㅎㅎ
      이번 건 "페이지 쓰리 헌드렛 나인티 포~~어"에 버금갈 정도였지..ㅎ







트랜스포머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7/08/08 02:02
2007년 7월 10일, 코엑스 메가박스 M관

눈요기의 극치. 로봇들이 변신하는 모습은 끝장나게 멋지다.

그러나 그 뿐이다. 허점 많은 단순한 스토리라인, 유치한 선악대결구도(제발 밑도 끝도 없이 파괴만을 원하는 나쁜놈들은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는 아무리 단순오락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하다. 게다가 넘쳐흐르는 군사주의(마이클 베이는 [진주만]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물론 [아마겟돈]에서부터 냄새는 좀 풍겼지만, 군사주의적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야말로 거슬린다. 자막만으로는 알기 힘들지만, 등장하는 로봇들 특히 옵티머스 프라임을 필두로 한 착한 녀석들은 전부다 군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비록 로봇들이 등장하지만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전쟁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이 점이 '단순오락영화'라는 점과 결합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이 영화는 미국 등급분류상 PG-13 등급(13세 미만자는 관람시 보호자의 감독을 요하는 등급. 우리나라의 12세관람가 정도의 등급이다)을 받았다. 조금이라도 관객을 더 모아 보려는 생각이었겠지만, 그 덕택에 숱한 총 난사와 미사일, 폭발과 파괴에도 불구하고 정작 참혹하게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얼굴을 익힐 정도로 익숙해진 등장인물들은 전부 다 별다른 상처 없이 끝까지 살아남는다. CG로 만들어낸 로봇들까지 나오고 하니 이건 흡사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이렇게 애들 장난처럼 전쟁을 그리는 건 전쟁에 대한 잘못된 환상만을 심어 줄 위험이 있다. 그렇게 해서 자라난 환상이 낳는 결과는 영화처럼 산뜻하고 멋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눈요기도 정도껏이다. 두시간 반은 너무 길다. 한시간은 잘라냈어도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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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8 02:02 2007/08/08 02:02







2007년 6월 24일, 코엑스 메가박스 10관.

난 캐리비안의 해적 1편을 극장에서 두 번이나 봤다. 씩씩하게 아름다우신 키라 나이틀리. 영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 잭 스패로우. 그리고 모험으로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테마음악(요새 이 음악 티비에서 도용이 심하다). 캐리비안의 해적은 그해 여름 개봉한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들보다 홍보는 덜 요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성공한 영화가 되었다.

기대를 훌쩍 뛰어넘은 큰 성공을 발판으로 속편이 제작되었다. 하나도 아닌 두 편을, 매트릭스 시리즈처럼 한꺼번에 촬영한 뒤 두 편으로 나누어 개봉한다는 소식이었다. 속편 이야기가 들려올 때부터 불안했다. 잭 스패로우를 더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인기를 등에 업고 요란만 떤 속편들을, 그것도 하나로 족한 걸 억지로 두 편으로 늘려서 만들었던 매트릭스 시리즈의 실패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브룩하이머가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쏟아부었다느니, 브룩하이머와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한스 짐머가 음악을 담당하게 되었나느니 하는 이야기들도 위안을 주지 못했다. 영양가는 하나도 없고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한다는 명목으로 폭발의 규모와 CG사용 빈도만을 질릴 정도로 늘려 놓은 탓에 현실감은 도리어 상실한 대규모 액션장면이 계속되고, 그 때마다 장엄함을 가장한 배경음악이 흐르는, 그저 그런 블록버스터 영화가 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만 커질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캐리비안의 해적 2편은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우스꽝스러움과 번뜩이는 카리스마 사이를 절묘하게 줄타기하던 잭 스패로우는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인 개그캐릭터로 전락해 버렸다. 진정 잭 스패로우다운 모습이 나타난 건 크라켄에게 잡아먹히기 직전, "괴물아 안녕(Hello, beasty!)" 하고 씩 웃으며 한마디 내뱉는 장면 단 하나뿐이었다. 키라 나이틀리와 올랜도 블룸 역시 영화 내내 과장된 듯한 모습을 지우지 못했고, 화려하고 인상적인 액션장면(가령 돌아가는 물레바퀴 위에서의 전투장면이라거나)은 분명 있었으나 현실감과 진지함이 느껴지지 않아 어딘지 모르게 맥이 빠졌다.

게다가 악역이랍시고 등장한 녀석이 공교롭게도 [오만과 편견]에서 그 쪼다 역을 했던 배우라니. 그 녀석이 등장할 때마다 귀부인 앞에서 오줌을 지린 것처럼 엉거주춤한 포즈로 벌벌 떨던 [오만과 편견]의 장면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한스 짐머가 1편의 테마음악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물론 그렇다 해도 원곡이 더 낫다).

2편에 워낙 실망을 많이 했기 때문에, 3편은 애초부터 2편과 비슷하겠거니 하고 기대치를 낮추고 있었던 터라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보고 즐길 수 있었다. 잭 스패로우의 개그 일변도도 좀 줄어들어서 다행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주윤발이 맡은 인물은 대체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에 비해 법전(!) 들고 무게 팍팍 잡으며 등장한 잭 스패로우 아버지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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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8 02:02 2007/08/08 02:02
  1. matrix
    2007/08/09 01:16
    매트릭스 1, 2, 3 은 모두 최고였음.
    • onecent
      2007/08/10 01:33
      노. 매트릭스 2,3편은 안 찍어도 그만이었고, 굳이 찍어야 했더라도 두 개를 하나로 합쳐서 개봉하는 게 나았을 거야.

      캐리비안의 해적도 그 점에서는 똑같지.
  2. 하영
    2007/08/11 18:33
    나랑 보람이 이거 니 포인트로 봤어!!ㅋㅋㅋㅋ
    아, 그 사람 아버지였어?? 우리둘다 집중력고갈로 슬슬 이해못할 때 등장해서 누군가했는데...;;;ㅋ
    • onecent
      2007/08/12 19:41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 맞아.ㅎ
      해적들이 법전 앞에서 부들부들 떠는 게 참 어이가 없었지..;ㅎㅎ
  3. 승현
    2007/08/26 21:18
    개인적으로는 1편만 딱 찍고 끝났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스 짐머의 OST와 잭스패로우 캐릭터가 정말 대박이었는데. 요즘은 팀버튼 감독에 조니뎁과 알란릭맨(스네이프교수ㅋ)가 주연하는 '스위니 토드'가 얼른 보고 싶어요>_< /
    • onecent
      2007/08/27 20:17
      1편 OST는 한스짐머가 아니었어; 클라우스 바델트라는 사람이던데;; 요즘은 한스 짐머가 음악을 안 맡는게 오히려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더라고 ㅎ

      아아..나도 1편만 찍고 말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데는 백프로 공감.
      그렇지만 2편, 3편은 1편 성공 탓인지 돈은 엄청나게 벌어들였더라고. 영화사 입장에서는 돈 되는데 영화를 안 만들리가 없고...
      깔끔하게 하나로 끝내길 기대할 수는 없는걸까.

      [스위니 토드]는 꼭 챙겨봐야겠구나.
  4. J.
    2007/10/11 08:05
    키스 리처즈 만세!







별 생각없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영화평론가 정성일 인터뷰두 개 읽게 되었다.

씨네21과의 인터뷰가 좀 더 길고,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동진 기자와의 인터뷰에 있는 내용은, '시네마 디지털 서울 2007'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씨네21 인터뷰 내용과 상당 부분 겹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면 씨네21 인터뷰만 읽어봐도 무방할 듯하다.

"나는 이런 말을 인용하고 싶다. 차이밍량이 서울에 왔을 때 누군가 질문했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지. 차이밍량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나쁜 영화는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는 영화고 좋은 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다. 나는 거기에 진리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이전 시대에 대한 반작용'을 이야기하는 아래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롭다. 다만 그가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로 규정한 '실용주의'는 사실 90년대의 것이라기보다는 해방 이후 계속해서 형성되고 강화되어 왔던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봤다. 각각의 시대는 이전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70년대는 교양의 시대였다. 그때는 <사상계>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을 비롯한 많은 계간지가 나왔고, 지금과는 다르게 파워가 있었다. 그런데 교양과 지성의 단점은 입으로만 떠들지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반작용으로 80년대는 행동의 시대가 되었다. 모두가 실천으로 나갔다. 그런데 정치의 결정의 다른 판본은 도그마이므로, 90년대는 다양성의 시대를 요구했다. 90년대는 문화의 시대였다. 막시즘만 진보가 아니고 페미니즘과 이반과 수많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진보를 말했다. 이 문화의 시대의 약점은 실속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실용주의가 된 것 같다. 지금 사람들은 실용적인 게 아니면 견디지를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동산과 주식에 미친 것이다. 나는 이 실용주의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가 돗자리를 깔지 않았으니 모르겠지만(웃음), 새로운 대통령이 나오면 보일 것 같다. 실용주의 시대가 계속될지, 아니면 반작용이 나와 실용주의를 끝장내고 다른 시대를 불러올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것을 선점할 것인지 아니면 시대에 매달려 질질 끌려갈 것인지 지켜보아야 한다. 비평가는 예언하는 것이 직업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난 다음에 평하는 것이 직업이다. 비평이라는 것은 시대에서 가장 뒤에 오는 것이다."
'시네마 디지털 서울 2007'에는 한번 가봐야겠다. 딱히 그 영화제 상영작들에 흥미가 당긴다거나 해서가 아니라(나는 상영작들이 뭔지도 아직 모른다), 5분이면 터덜터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서 한다는데 안 가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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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7 02:18 2007/07/17 02:18







박하사탕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7/06/25 00:33

출처 : http://www.peppermintcandy.co.kr


[박하사탕].
너무나 가슴아픈 영화다.

그저 그 속에 그저 몸을 맡기고 가기만 해도 더러워지고 짓밟히고 뒤틀려서 괴물이 되어 버리고 마는 곳. 그게 우리 사회다.
그 속에 빠져있는 나는 20년 후에 어떤 모습의 괴물이 되어 있을까.



우리는 기찻길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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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5 00:33 2007/06/25 00:33







remember Penny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6/09/24 11:22


remember Penny Hardaway


..그의 이름은 내 아이디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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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4 11:22 2006/09/24 11:22







사무라이 참프루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6/08/27 14:32


[카우보이 비밥]을 만든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2004년작, [사무라이 참프루].
와타나베 신이치로는 이것저것 뒤섞어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 따라올 자가 없어 보인다. [비밥]에서는 우주SF에다가 카우보이와 재즈를 섞어내더니 이번에는 에도시대 사무라이에다 힙합을 버무려버렸다.

시대는 에도시대라는데, 칼자루를 마이크삼아 비트박스를 넣는 사무라이가 등장했다가, 페인트통과 붓을 들고 다니면서 단속을 피해 그래피티를 그려대는 사무라이도 나오는가 하면, 대포로 무장한 미국 배의 침공을 야구시합으로 이겨버리는 사무라이도 있는 식이다. 당장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무겐은 검술이라기보단 브레이크댄스에 가까운, 카포에라 비스무레한 신공을 보여준다.

흉내내기 어려운 센스. [비밥]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다. 엔딩에서도 딱 적당한 만큼만 여운을 남기는 게, 구질구질한 거 없이 깔끔하고 좋다.




... 자, 이제 남은 건 돈 모아서 디비디 사고 피겨 사고 하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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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7 14:32 2006/08/27 14:32
  1. 득희
    2006/09/07 04:00
    오옷 웅재형~
    이게 형이 말씀하신 에니메이션!
    정말 센스 있네요 하핫!
    • onecent
      2006/09/11 11:24
      아니 이게 누구야.ㅎ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오셨나; ㅎㅎ
      웰컴웰컴.

      사무라이 참프루는 진짜로 일부러 시간내서 볼만한 가치가 있어..
  2. 승현
    2006/09/17 23:05
    5화 정도까지 보다가 어찌어찌하여 다 못봤는데..다시 시도해보려구요ㅎ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봤는데 보자마자 와타나베씨 작품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어요; 정말 비밥에서의 스탈과 분위기 물씬-그러면서도 뭔가 다른.







돌아온 슈퍼맨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8/13 15:10

미션 임파서블 3편, 엑스멘 3편, 슈퍼맨 리턴즈, 캐리비안의 해적 2편 그리고 괴물까지. 이번 여름시즌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던 블록버스터들은 웬만큼 챙겨 보았다. 애초에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던 미션 임파서블은 그럭저럭 볼 만했지만, 기대가 컸던 엑스멘 3편은 힘이 부족했고 마찬가지로 고대했던 캐리비안의 해적은 턱없이 실망스러웠다(잭 스패로우와 키라 나이틀리가 무려 두시간 반동안 나와도 역부족이었으니, 할말 다 한거다). 돈 많이 들인 헐리웃 영화 중에선 그나마 슈퍼맨이 제일 나았다(그리고 괴물이 슈퍼맨보다 낫다).

어쩌다 보니 [슈퍼맨 리턴즈]는 두번이나 보게 되었다. 분명 만육천원씩이나 쓸 영화는 아니다. 그래도 연달아 보면서 브라이언 싱어가 영화를 잘 찍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

슈퍼맨 영화를 찍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해보자. 뭐가 가장 큰 문제일까?
스토리가 뻔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일 것이다. 악당이 아무리 그럴싸하게 음모를 꾸며도 결국은 영웅이 악당의 계획을 분쇄하고 정의를 바로세우는 전형적인 구도는 모든 슈퍼히어로 영화가 따를 수밖에 없는 틀이겠지만, 그 슈퍼히어로가 하필이면 슈퍼맨이기 때문이 일은 더 힘들어진다. 슈퍼맨은 너무 쎄기 때문이다. 빛보다 빠르고 총알보다 단단하며 지구를 거꾸로 돌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넘치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면, 아무리 화려한 특수효과를 사용해서 스펙터클한 영상을 보여 준다고 해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가 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슈퍼맨의 지나친 '슈퍼'함은 독이 된다. 미사일을 쏘면 공중에서 미사일을 잡아서 우주로 날려버리질 않나, 지진을 일으켰더니 지각을 파고 들어가서 어긋난 지층을 도로 맞춰놓질 않나, 핵폭탄을 정통으로 맞아도, 그냥 하늘로 올라가서 햇빛 좀 쬐고 나면 완벽하게 회복돼 버린다. 반짝반짝 빛나는 초록색 돌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관객은 슈퍼맨의 안전을 한순간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슈퍼맨이 가장 지키고 싶은 건 로이스 레인이고 그런 탓에 로이스가 주로 위험에 처하게 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로이스가 추락하는 비행기에 타고 있든, 침몰하는 배에 갇혀 있든 별로 걱정이 안된다. 추락하는 비행기는 도중에 잡아서 천천히 땅에 내려놓고, 침몰하는 배는 건져내면 된다. 슈퍼맨만이 사용할 수 있는, 구출방법의 무지막지함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비행기에서 로이스를 탈출시키는게 아니고, 배속에서 로이스를 구해내는게 아니다. 비행기 전체를 잡아서 내려놓으면 그 안에 탄 로이스도 자연히 사는거고, 귀찮게 선실 문 열고 로이스를 찾아서 뭍으로 끌고올라갈 거 없이 그냥 배를 들어올려 버리면 되는거다.

이정도 되면 대규모 재난을 로이스를 비롯한 메트로폴리스 사람들에게 아무리 많이 가해 봤자 영화는 삼십분 정도만 지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루해지고 만다. 슈퍼맨이 구해줄 게 뻔하니까. 어떻게든 긴장감을 줄 만한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 "뻔함"을 어떻게든 완화해야 한다.

more..(스포일러 주의!)

결말이 어차피 뻔하다면, 최소한 결말이 '어떻게' 나오는지는 가급적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야 재미있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슈퍼맨 리턴즈는 그런 점에서 도무지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그리고 볼거리만 물리도록 많은) 캐리비안의 해적이나 엑스멘보다는 확실히 나은 영화다. 물론 어느정도의 "뻔함"은 모든 슈퍼맨 영화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겠지만.


[+] 다만 [슈퍼맨 리턴즈]라는 이름은 한심하다. '돌아온 슈퍼맨'이라고 하면 안될게 뭔가? 그렇게 주어-동사 구조가 좋으면, '슈퍼맨, 돌아오다'라고 해버리면 될 것을. 쯧쯧.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6/08/13 15:10 2006/08/13 15:10
  1. ㅉㅉ
    2006/08/15 23:36
    나 누구게요? =_=
  2. ㅉㅉ
    2006/08/20 15:25
    그래서 누구란 거야 -_-
  3. 위에
    2006/12/17 22:34
    윤OO이 아니야??







침묵과 열광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6/07/30 12:37

강양구·김병수·한재각, 침묵과 열광 - 황우석 사태 7년의 기록, 후마니타스, 2006
이성주, 황우석의 나라, 바다출판사, 2006


[침묵과 열광]은 황우석 사태의 배후에 놓여 있는 사회구조적 원인으로 이른바 '과학기술동맹'을 지목하고,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황우석 사태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보여 주고자 한다.

"'황우석 사태'의 핵심에는 물론 황 교수의 과학 사기 사건이 자리잡고 있지만, 이 과학 사기 사건이 전 국민적 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전 세계적인 스캔들로 불거진 데는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탓이 크다. 정치권·정부·언론·재계·의학계·과학계의 권력층이 황 교수와 여러 형태의 이해 관계를 맺으면서 '황우석 사태'를 배태시키고 심화시킨 것이다."

황우석 사태를 배태시킨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과학기술동맹'이지만, 정부의 인사들은 문책이 되지 않은 채 여전히 정부의 정책을 결정하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기업들이 이 사태에서 수행한 역할은 아예 부각조차 되지 않았다.

"이번 사태를 황우석 교수라는 한 과학자 개인이…벌인 사기 사건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부정한다. '모두가 황우석에게 속았다'는 식의 평가는 드러난 객관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이번 사태를 책임져야 할 관련자들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불순하기조차 하다. 반성과 문책이 수반되지 않은 일은 다시 벌어지는 법이다."

한편에는, "좀처럼 존경할 만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던 한국 사회의 열등감과 공허감을 일거에 극복해 줄 영웅으로 인식"됐던 황우석에 대한 맹목적이고 "다분히 애국주의 색채를 띤" 열광이 있다.

논문 조작이 밝혀지고 '황우석 사태'가 이제 결말에 접어들고 있는 시점에서도, 황 교수에 대한 열광은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이제 그 애국주의적 열정에는 비장감마저 보인다.… '황우석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렇다. 황우석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것을 잉태시킨 사회구조적 원인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부와 기업, 그리고 과학기술은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다시 밀월관계를 맺을 테고, 그 과정에서 실험 과정의 투명성과 윤리성(난자 채취 문제가 제대로 거론되지도 못했던 점을 기억하라)은 짓밟힐 것이다. 거기다 한국의 대중은 '국익'이란 커튼으로 언제든지 모든 것을 덮어 버릴 태세가 되어 있다.

[황우석의 나라]의 저자 이성주는 동아일보 의학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는 황우석 사태를 지켜보다 언론의 행태에 환멸을 느껴 2006년 사직서를 내고 14년간의 기자생활을 접고 이 책을 썼다. 그런 탓에 언론사 내부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저자는 포퍼(K.Popper)에게서 영감을 얻어 황우석 사태를 낳은 언론과 과학계, 정치권의 문제점이 바로 '민주주의 시스템'의 부재라고 진단을 내리는데, 이는 어찌 보면 식상할 정도로 타당한(당연히 여기는 것이지만 그 당연한 것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지적이라 할 것이다.

황우석에 대한 열광은 한국의 대중을 움직이는 동인의 한 발현에 불과하다. (가령, 여길 한번  찬찬히 살펴보라. 그 이면에 깔린 심리는 황우석 사태에서 드러난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어째서 그런 열광이 가능한 것일까 하는 것이 바로 내가 가장 흥미가 있었던 점이었고 황우석 사태에 관련된 책을 찾은 이유이기도 했다. [침묵과 열광]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황우석의 나라]는 서문에서 "왜 우리는 황 교수에게 그렇게 열광을 했고…극단적인 행태를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현대 정신의학의 여러 이론을 통해 설명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본문 내용은 '왜' 그러한 열광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나타난 현상들을 "부인"이니 "투사"니 하는 전문용어로 포섭시키는 정도에 불과하다. 나의 의문점들에 대한 답은 아마도 대중심리학 책들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두 권을 굳이 다 읽을 필요는 없고, 보다 총체적인 관점과 다양한 문제제기, 그리고 깊이 있는 분석을 보여 주는 [침묵과 열광]을 꼼꼼히 읽어보면 될 듯하다. 황우석 사태는 이미 지나갔다. 그러나 그에 대한 치열한 반성은 반드시, 언제까지고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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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30 12:37 2006/07/30 12:37
  1. 재학
    2006/07/30 16:32
    허생이 말한 것처럼, 땅이 좁고 사람이 적어서 그래요..
  2. onecent
    2006/08/06 18:27
    사람이 적은거 같진 않아 딱히;;; ㅎㅎ

    그나저나 너 언제쯤 귀국하냐.







X-Men 3 : The Last Stand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7/16 18:15
2006년 6월 14일 수요일, 메가박스 1관, 조조(08:20)

기다리고 기다리던 엑스맨 시리즈의 마지막편. 1편과 2편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떠나고 브렛 래트너(러시 아워 시리즈의 감독이다)가 새로 연출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약간 불안해 했던 게 사실이다. 래트너는 원래부터 엑스맨 시리즈의 대단한 팬이라 열심히 영화를 만들었다는 소문이었지만, 슈퍼히어로 영화라고 해서 꼭 그 슈퍼히어로의 팬이 더 잘 만들 수 있는 건 아닌 법이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멘은 코믹북 시리즈의 영화화 붐에 불을 당긴,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정작 싱어 자신은 제의를 받고 나서부터 만화책을 찾아서 읽어보기 시작했다고 하고, 다 죽어가던 배트맨 시리즈를 기사회생시킨 크리스토퍼 놀런 역시 특별히 만화 배트맨에 심취해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영화 잘 찍는 감독(싱어의 대표작은 유주얼 서스펙트, 놀런은 메멘토)이 슈퍼히어로 영화든 뭐든 다 잘 찍는 거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찾아 본 예고편은 불안감을 어느 정도 없애 주었다. 비스트와 엔젤, 저거넛 등 그동안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캐릭터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 기대감을 갖게 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캐릭터인 갬빗은 이번에도 영화 진입에는 실패한 모양이었지만, 어차피 이미 나와 있는 인물들만으로도 러닝타임이 모자랄 정도니 어쩔 수 없다.

개봉일(14일) 전날 메가박스 상영시간표에 '엑스맨'이 떠 있는 것만 보고 허겁지겁 달려가서 헛물을 켜는 우여곡절(그날은 시사회였다. -_-; 시사회 표도 없이 시사회장에 난입하려 했던 셈이다) 끝에, 개봉일 조조로 볼 수 있었다.

뚜껑을 열어 본 결과... 내 불안감이 현실로 드러났다.

[엑스맨 3]는, 전편들을 능가하는 규모의 액션을 보여 준다. '최후의 전쟁'이라는 부제답게, 매그니토 편의 돌연변이들과 엑스멘의 전면전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매그니토가 그야말로 '엿가락처럼' 구부리는 인상적인 장면에서부터, 매그니토와 파이로가 합작해서 선보이는 불붙은 자동차 공격이랄지, 키티 프라이드와 저거넛의 추격장면 등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볼거리를 많이 제공한다고 해도 이번 엑스멘은 전편들에 비해 힘이 떨어진다. 전편보다 더 많은 캐릭터가 등장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너무나 많은 인물들이 별다른 활약 없이 버려지고 만다. 명실상부 주인공 자리를 꿰찬 울버린에게 비중이 실리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악당 우두머리인 매그니토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캐릭터들은 그야말로 눈요기거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스톰과 아이스맨, 파이로, 키티 프라이드나 비스트는 그래도 전투에서나마 자기 능력을 발휘했다지만(특히 아이스맨은, 잠깐이었지만 만화책에서의 모습 - 온몸이 얼음덩어리인 모습 - 을 보여 주었다), 매그니토 편에 서서 등장한 대부분의 캐릭터들, 그리고 특히 콜로서스와 엔젤은 전투씬에서조차 심하다 싶을 정도로 버림받았다. 그들의 만화책상의 비중을 생각한다면 아쉽기 짝이 없다.

날개 한번 제대로 못펴본 엔젤

전투장면에서 능력 보여주는 것도 제대로 안 되는 마당에, 각 캐릭터들의 갈등관계나 심리묘사가 가능할 리가 없다. 키티-아이스맨-로그의 삼각관계는 공감할 틈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고,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진(피닉스)의 자기분열 역시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진이 피닉스로 각성한 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영화 한 편에, 그것도 다른 스토리라인(큐어와 관련된 스토리)과 함께 밀어넣기에는 너무 대규모였을지 모른다. 감독은, 트릴로지의 마지막이라는 점 때문에 가능한 많은 것을 보여 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전편들에 비해 대사의 맛깔스러움이 많이 떨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짤막하지만 그러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기고,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대사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1편에서 울버린이 "그게(손톱이) 나올 때, 아픈가요?" 라는 로그의 질문에 단 한 마디로 "매번"이라고 내뱉는 장면이나, 2편에서 매그니토가 막무가내로 진입하겠다는 울버린을 비웃으며 "그래서 어쩔 텐가, 손톱으로 긁기라도 하려고?" 하고 조소하는 장면처럼 기억에 박히는 장면이 없었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체스판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매그니토가 나오는 장면만은 예외다) 그와 같은 강한 인상을 남겨야만 하는 순간 - 싸우러 가기를 주저하는 엑스멘을 울버린이 독려하는 장면 - 에서 3편은 맥없이 실패한다. (울버린의 말에 다들 독려가 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좀더 불평을 해 보자면, 울버린의 얼굴이 핀 게 마음에 안들었다. 울버린이 처음 스크린에 등장하던, 1편의 그 장면을 기억하는가? 철창 안에 갇혀서, 얼굴도 드러나지 않은 채 그림자에 묻혀서는 시가 연기를 내뿜는 게, 흡사 성난 맹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미간은 잔뜩 찌푸리고, 상처는 나는 족족 나으니 어디 아픈 데는 하나도 없을 게 분명한데도 마치 십년 동안 두통을 앓고 있었던 것 같은 표정에, 과연 이녀석이 우리편인지 적인지 도무지 모호한, 바로 그 절반쯤은 악마같은 얼굴이 울버린의 매력이었다.

그런데 3편의 울버린은 너무 표정이 밝다. 미간의 주름살도 거의 풀렸고, 심지어 짜증내는 사이클롭스를 차분히 달래주려고 하기까지 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머저리같은 놈, 짜증내려면 골방에 처박혀서 너 혼자 질질 짜라' 정도의 대사를, 그 특유의 '대꾸하면 머리에 바람구멍을 세 개 내 줄테다' 라는 표정으로 내뱉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영화를 보면서 '브라이언 싱어를 돌려줘!' 라고 생각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엑스멘을 버리고 간 브라이언 싱어지만, [슈퍼맨 리턴즈(!)]를 선사해 줬으니 또 뭐라고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엑스맨 3편은 분명 영화값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오락영화이긴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데는 미치지 못했다. 1편이나 2편은 기꺼이 두 번씩 보러 갈 정도였으니 이 차이는 꽤 크다. 트릴로지의 마무리가 약간 미진한 것 같아 못내 아쉽다. 그나마 마지막 장면에서는 신나게 해 줬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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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6 18:15 2006/07/16 18:15







2006년 5월 6일 토요일(사실은 7일 일요일 새벽), 메가박스 2관, 심야(0:20).

여름시즌의 첫 테이프를 화려하게 끊은 미션 임파서블 3. 사이언톨로지에 심취해 독특한 행태를 보이는데다 케이티 홈즈에 빠져서 보기 안 좋을 정도로 허우적대는 모습 때문에 미국에서는 탐 크루즈의 관객 동원력이 예전같지 못한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박스 오피스 성적이 신통찮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미국 이외의 나라들에서는 꽤나 흥행 성적이 좋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현지만큼 탐 크루즈에 대한 가십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탓일 듯하다.

1996년에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1편은 꽤나 재미있게 본 영화였다. 비록 스토리가 너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탓에 두 번째 볼 때서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제대로 알 수 있었지만.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인 얼굴 뜯어내기(;)가 신선했다. 잊을 때쯤이면 돌연 아래턱께를 붙잡고 부욱 하고 얼굴을 잡아뜯어 버리는 바람에 그 때마다 허를 찔리곤 했다. 처음 볼 당시에는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도 못 하고 있던 터였기에 막판에 범인의 정체가 드러날 때는 꽤나 충격을 먹었던 기억도 난다.

1편의 성공을 뒤에 업고 2000년에는 속편이 개봉했다. 탐 크루즈의 장발 헤어스타일, 그리고 오우삼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점이 화제를 끌었던 걸로 기억한다. 난 일찌감치 기대를 접고 극장까지 찾아가서 이 영화를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시 오우삼의 '대놓고 개폼잡는' 액션 스타일 - 날아오르는 흰 비둘기떼, 휘날리는 롱코트에 선글라스 등등 - 은 이미 식상해지고 있던 터였다. 97년의 [페이스오프]에서 헐리우드는 오우삼의 개폼잡기에 매료됐고, 99년의 매트릭스 1편에서 개폼잡기 액션은 정점에 오른다. 그 이후로 오우삼 스타일의 액션은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었고, 같은 스타일을 답습하면서 단지 액션의 스케일과 액션장면의 길이만을 늘린 영화들은 줄줄이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미션 임파서블 2는 그 대표적인 예고, 매트릭스 속편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나 다를까, 미션 임파서블은 예전 텔레비전 시리즈와는 동떨어진, 전형적인 오우삼 영화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탐 크루즈는 생김새만 다를 뿐이지 하는 짓이나 격투솜씨까지 사실상 주윤발이나 다름없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가운데, 롱코트 대신에 롱트를 휘날리며 권총을 쏴대고 공중을 가르며 날라차기를 해 대더니만, 급기야는 모래사장에서 단순한 발구르기 한번으로 땅에 놓여 있던 총을 튀어오르게 하는, 네오 수준의 사기 기술을 선보이기에 이른다. 이건 해도 너무했다. 난 나중에 티비로 이 영화를 봤는데, 예상했던 만큼,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만큼 엉망이었다.

그러다 5년 만에 세 번째 영화가 개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편보다는 훨씬 낫지만, 1편보다 월등히 나은지는 잘 모르겠다. 감독은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 [로스트]의 연출을 맡았던 J.J. 에이브럼스로, 영화 연출은 처음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정말 글자 그대로 '숨쉴 틈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는데, 완급조절에 좀 문제가 있다 싶을 정도다. ('급'만 있지 '완'은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영화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맨 처음에 배치하는 편집방식 때문에, 시작하는 순간부터 긴장의 연속이다. 한 사건이 해결됐나 싶으면 더 큰 사건이 터져 버리고, 가까스로 대처했나 싶으면 또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는 식이다.

1편이나 2편과 마찬가지로, 사건들이나 그 해결과정에 개연성은 별로 없다.  탐 크루즈는 주윤발 수준에서는 한 발 물러섰지만, 여전히 하는 짓들을 보면 엑스멘에서 스카웃 제의가 왜 안들어오나 싶을 정도다. (그러고 보면, 극중 크루즈의 역할인 이단 헌트의 능력치는 머리 길이와 깊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3편의 머리길이는, 1편보다는 조금 길고 2편보다는 많이 짧다) 머리가 길수록 무시무시한 파워가 나오는 건 아닐까? 대체 이녀석 정체가 뭔가? 삼손의 환생인가?

그러나 여름 블록버스터 영화, 그것도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액션영화에 그런 개연성을 기대하는 사람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신기하고 화려한 첨단장비(가면 만드는 기계가 신기함의 최고봉을 달린다)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보고 즐기면 그만이다. 거기다 별로 하는 일은 많지 않지만 소름 돋을 정도로 기분나쁜 악당(오웬 데이비언 역을 맡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알고보니 작년에 아카데미상을 탄 배우였다;)도 있겠다, 다리 위의 전투장면과 같은 멋있는 액션 장면이 중간중간 등장해 주니 이정도면 썩 괜찮은 셈이다. 어떻게 평범한 간호사인 이단 헌트 약혼녀가 그렇게 총을 잘 쏘느냐, 세상에 주먹으로 하는 인공호흡도 있느냐 하며 비웃기도 하는데, 어차피 주인공 죽을 리 없다는 건 표 사는 순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애교로 봐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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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2 15:36 2006/07/02 15:36
  1. 종현.
    2006/07/14 23:16
    그치만 난 이단이 죽는 줄 알았다고.
  2. 승현
    2006/07/21 23:21
    ㅋㅋ 저도 죽는 줄 알고; "오옷! 헐리웃 영화에서 사상 최초로 주인공이 죽는구나-"라며 신기해하고 있었는데...;;
    • onecent
      2006/08/06 18:28
      역시 말도 안돼. ㅎ
      탐크루즈는 우주전쟁에서도 안죽었다구. 외계인이 쳐들어와도 안죽는 마당인데.. ㅎㅎ







피닉스 너마저..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6/06/04 12:37

동부지구는 마이애미가 디트로이트에게 4대 2로 승리.
지난 3년간의 철벽수비와 팀워크는 어디로 갔는지. 한두명의 슈퍼스타를 믿고 날뛰던 녀석들에게 농구는 다섯명이서 하는 경기라는 걸 깨우쳐주던, 벼랑끝에 몰릴수록 더 강해지던 디트로이트 피스턴즈는 온데간데 없었다. 동부의 절대강자로 군림하던 피스턴즈의 시대는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이렇게 열렬한 홈 팬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피닉스 선즈도 조금 전 댈러스 매버릭스에게 6차전을 지고 말았다. 서부지구 결승 시리즈는 댈러스의 4대 2 승리.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매 시리즈마다 드라마를 연출해 내던 신데렐라 팀 피닉스의 기적적인 행진도 끝났다. 피닉스 팬은 아니었지만, 올해 플레이오프를 지켜보면서는 이 팀을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라운드에서 밥맛없는 코비에게 제대로 한방 먹여 준 것만으로도 피닉스 팬이 돼 줘야 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응원하던 팀들은 모두 져 버렸다.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사진 출처는 NB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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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4 12:37 2006/06/04 12:37







다빈치 코드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5/21 18:11

주말 동안 침대를 뒹굴거리며 [다빈치 코드]를 읽었다. 남들 다 읽을 때는 청개구리 근성으로 안읽겠다고 유치하게 뻗대다가 결국에는 사정없이 뒷북을 치고 마는 이 꼬락서니라니.

소설을 읽지 않았던 탓에 다들 들뜬 마음으로 영화의 개봉을 기다릴 때도 심드렁했었던 게 사실이다. 기가 막히게 재미있다는 평가가 나오지 않는 한 일부러 보러 갈 생각도 아니었다. 예고편에서 본 톰 행크스의 헤어스타일을 두 시간동안 참아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은 어찌어찌하다가 어제 형 책장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형도 선물받고는 읽을 생각을 안했던 모양이다)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꽤나 재미있게 읽었다. 중간중간 일부러 컴퓨터를 켜서 다빈치 그림을 찾아봐 가면서.

영화화하기 참 좋은 소설이다. 불과 이틀 정도의 시간에 걸친 이야기를 다룰 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에 곳곳에서 전개되는 장면들을 챕터를 잘게 나눠서 왔다갔다 하면서 서술하고 있어서 흡사 속도감 살린 편집을 염두에 둔 헐리우드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것 같다. 별다른 각색 없이 바로 크랭크인해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소설을 먼저 읽고 나서 영화의 예고편을 봤더라면, 내 나름대로 그려 놓은 로버트 랭던 박사의 이미지에 톰 행크스를 맞춰 보고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예고편에서 본 톰 행크스의 모습이 머리에 박혀 있는 탓에 소설 속의 랭던 박사를 톰 행크스에 끼워맞추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랭던 박사는 내게 우스꽝스런 헤어스타일을 한 사람의 이미지로 각인되고 말았다. 톰 행크스가 랭던 박사 역에 적절한 선택이었는지 어떤지는 나로선 알 수 없게 됐다.

영화는 소설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모양이고, 그 탓에 책을 읽은 사람들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할 거라는 게 지배적인 평가인 듯하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난 지금, 영화 상영 금지를 외치는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간접적으로라도 시위하기 위해서 기필코 영화를 봐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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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1 18:11 2006/05/21 18:11







[말아톤 - 감독 정윤철 출연 조승우, 이미숙, 이기영]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만큼 행복한 때는 없다. 좋아서 하는 일인만큼 의욕은 충만하고, 자연스레 더 잘 하려고 애쓰게 된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일은 점점 잘 하게 되고 잘 하게 되니 더 좋아지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보다는 억지로 시켜서 하는 일에 쏟는 시간이 더 많은 게 현실인 듯하다. 어려서는 하기 싫어 죽겠는 공부를 엄마가 시켜서 마지못해 하고, 나이가 웬만큼 들어 엄마가 시키는 일은 없어지나 싶더니만 이제는 '앞으로 먹고살 일'이 그 억센 손아귀를 옥죄어 들어온다. 좋아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이 일치하는 삶, 그런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삶을 누리려면 일단은 자기가 진짜로 좋아하는 일이 뭔지를 찾아내는 게 급선무다. 그래야 그걸 온 힘을 다해서 하면서 기쁨을 누릴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그 일을 통해 '먹고살 일'까지 해결하는 방법도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체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뭐지?
...

[말아톤]에 나오는 윤초원은 달리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초원이가 달리기를 '잘'하는 건 분명하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곧잘 우수한 성적으로 완주해 낸다. 그렇지만 정작 초원이는 힘들여 완주해 내고 나서도, 메달을 따내도 속시원하게 웃지조차 않는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건 초원이 옆에 있는 엄마다. 엄마는 아들이 자랑스럽고, 기쁘다. 애한테 좋아하는 걸 하나 만들어주고 싶었고, 나는 해냈다. 봐라. 초원이는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가...

이쯤 되면 아까의 말을 바꿔 쓰는게 맞을 듯하다.
"윤초원은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윤초원의 엄마는 생각한다/믿고 있다/믿고 싶어한다.

엄마는 아들을 위한답시고 아들에게 달리기를 배우게 하고 계속해서 달리기 연습을 시켰지만, 그건 엄마 자신의 욕망을 (헛되이) 채우기 위해서였다. 초원이는 초코파이가 먹고 싶어서,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 엄마한테 혼나기 싫어서 달리고 또 달렸을 뿐이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엄마가 자기 손을 놓아버릴까봐 무서워서. 어렸을 때 동물원에서 자기 손을 놓아버렸던 것처럼..

엄마는 이 사실을 "20년이 걸려서야" 깨닫는다. "초원이는 달리는 걸 좋아해. 그래서 시키는거야"라면서 엄마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다. 달리기를 시키고, 그렇게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잘 달리는 초원이를 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원이보다 하루 더 늦게 죽고 싶다"는 엄마의 소원은, 영화에서 초원이의 달리기 코치가 정확하게 간파해 내듯이, 초원이가 엄마 없이 하루도 못 살기 때문이 아니라 엄마가 초원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초원이는 엄마의 욕망에 사로잡혀 질식당하고 있다. 그래서 엄마는 초원이를 놓아주기로 한다. 억지로 힘든 마라톤을 시키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엄마가 초원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던만큼, 이제껏 초원이도 행여 놓칠세라 그런 엄마를 단단히 그러쥐고 있었다. 엄마가 초원이를 놓아 주자, 고삐에서 풀려난 초원이의 욕망은 스스로 작은 목표물을 붙잡는다. 그건 바로 달리기였다.

달리기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작업을 하게 된 초원이는 달리기를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달릴 때 얼굴에 부딪히던 맞바람을 떠올리고, 그 순간 느꼈던 행복을 기억해 내기 시작한다. 달리고 싶다. 엄마가 달리라고 시키지 않아도, 엄마가 달리면 안된다고 해도!

오로지 달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춘천까지 혼자 버스를 타고 온 윤초원. 뒤따라온 엄마는 출발선 근처에서 초원이를 찾아낸다.

엄마가 이제부터 마라톤 안한다고 했잖아.
오늘은 춘천 마라톤 하는 날.
아니야. 이제 이런 힘든거 안해. 집에 가.
오늘은 10월 10일! 춘천 마라톤 하는 날!
뭐하는 짓이야 이게!
오늘은 초원이 사십이일구오 달리는날!
연습 제대로 못했어. 도중에 쓰러질거야.
초원이 엄마 말 들어. 엄마 말 듣는 사람 착한 사람이지?
가서, 짜장면하고 탕수육 먹자. 가자.
(...)
뛰다가 도중에 쓰러지면 주사 맞아야 돼. 주사 맞고 싶어?
...안 쓰러져.
초원이 안 쓰러져요.


가끔, 배우가 내뱉는 대사 한마디가 마치 영화관 전체를 뒤흔드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네오의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Because I choose to)" 가 그랬고, 샘이 다 죽어가는 프로도에게 "그걸 대신 들어드릴 수는 없지만, 당신을 들고 갈 수는 있어요 (I can't carry it for you, but I can carry you)" 라고 말했을 때가 그랬다. 그리고 윤초원의 바로 저 "안 쓰러져" 역시, 비록 아무런 웅장한 배경음악도 없고 의도된 극적 장치도 없었지만, 영화관을 뒤흔들고도 남았다.

자폐증이 있는 초원이는 영화 내내 스스로 말을 하는 적이 없다. 그가 하는 말은 어디선가 들은 말의 반복일 뿐이다. 텔레비전에서 들은 그대로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초원에서는.."이라고 줄줄 따라하고,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라며 엄마가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할 뿐이다. 그와 조금이나마 대화하기 위해서는 그가 따라할 수 있는 말을 질문에 선택지로 포함시켜서 해 줘야 한다. "오늘 끝까지 달릴 수 있어, 없어?"/"있어."  "초원이 힘들어, 안 힘들어?"/"안 힘들어." 이런 식으로. 지하철에서 얻어맞아 아프고 어쩔 줄 몰라하는 상황에서도 초원이는 언젠가 엄마가 했던 말,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를 되풀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모른다. 엄마가 병원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슬퍼하면서도 "비가 주룩주룩 내려요"라고, 엄마가 따라해보라고 자신에게 해줬던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 윤초원이 마침내 스스로 말한다. 안 쓰러질 거라고. "초원이 쓰러져, 안 쓰러져?" 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렇게 좋아 못살던 짜장면도, 탕수육도 거부하고, 엄마 말 듣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도 거부한다. 주사 이야기만 하면 경기를 일으키던 그에게 급기야 엄마는 주사로 위협한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초원이는 "안 쓰러져"라고, 비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지만 힘있게 선언한다. 막무가내로 앞뒤 안가리고 안 쓰러지고 따라서 주사도 안 맞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쓰러질지도 모르고 주사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쓰러지지 않겠다, 그리고 달리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저 한 마디가 나오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뒤로는 일사천리다. 달리다가 쓰러질 뻔하지만 다시 일어서고, 누군가 쥐어준 초코파이를 버리고 달리는 그 자체를 즐기며 결승점을 통과하고. 그리고 마침내 진짜 기뻐서 웃을 때까지.

이제 또 앞서 말한 문장을 고쳐야 한다.
윤초원은 달리기를 좋아한다.

...

날 때부터 진짜 좋아하는 것 한 가지를 머리에 각인한 채 태어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좋아하는 일도, 그 출발점을 더듬어 가다 보면 최초의 순간에는 뭔가에 의한 강제가 있었을지 모른다. 초원이한테 달리기가 그랬듯이, 억지로 시켜서 시작한 일이지만 그게 나중에는 그 자체로 기쁨이 될 수도 있다. '하다 보면 정 든다'는 말도 있잖은가? 그렇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정 들때까지 무작정 괴로움을 견디면서 억지로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대체 뭔가?
이거, 정말로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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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4 15:46 2006/05/14 15:46
  1. 하영
    2006/05/14 16:34
    이런 면에서도 감동적인 영화였구나!
    • onecent
      2006/05/20 23:38
      다시 봐도 저 장면에서는 가슴이 북받쳐오더라구;
      대한민국의 모든 어머니들이 봐야 할 영화야.
  2. 승현
    2006/05/19 00:36
    이 질문 때문에 정말 미치겠다는;;ㅠ
    • onecent
      2006/05/20 23:38
      그렇지? 미칠 노릇이야.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세상 사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게 재밌기도 한 일 아니겠어? ㅎ
  3. J.
    2006/05/19 08:39
    정말 어려운 질문이야.
    그런데 어떨 때 생각하면 그냥 하나의 강박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구..
    • onecent
      2006/05/20 23:39
      강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요, 진짜.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4. nature
    2006/05/21 13:36
    좋으면 좋은거지 뭐 있어??.. 나 너무 쉽게 생각했나..흐음...ㅋ
  5. 초학구파;
    2006/05/22 01:29
    새삼 이 글이 너의 클리셰의 총집결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면 말고;)
    • onecent
      2006/05/22 09:27
      '클리셰의 총집결'이 그야말로 정확한 표현이네그려. ㅎ
      너무 티내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식상한 냄새가 풀풀 풍기지?







서울여성영화제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4/22 20:46



지지난 주 토요일, 올해로 8회째를 맞은 서울 여성영화제에 다녀왔다. "다녀왔다"고는 하지만, 영화는 한편밖에 보지 못했고, 그렇다고 영화제가 열렸던 영화관(신촌 아트레온) 안에서 분위기를 즐기면서 오래 머물렀던 것도 아니었다. 그날 황사는 그야말로 극악무도했는데, 그 누런 모래폭풍을 뚫고 친구들과 신촌에서 점심을 먹고, 상영시간에 딱 맞춰서 아트레온에 들어가서 영화를 관람한 후, 근처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으로 마무리했다. 간결했지만 좋았다.

본 영화는 마를린 호리스(Marleen Gorris) 감독의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s Line)]이었다. 시간상으로 주인공 안토니아의 인생 후반부를 다루는데, 안토니아와 그 딸, 손녀, 증손녀를 중심으로 그들이 주위의 여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냈다. 그들이 꾸려가는 삶은 전형적인 공동체의 모습과는 다르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농장 풍경과 맞물려 유토피아처럼 느껴진다. 안토니아는 물론이고 딸과 손녀 모두 결혼하지 않지만(물론 주변인물 중에는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그들의 삶에는-영화 속 표현을 빌자면-"사랑이 넘쳐흐른다".

안토니아가 마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근처 농장에 사는 농부 바스가 안토니아를 찾아와 (상당히 느닷없고 생뚱맞게;)청혼한다. 안토니아는 좋은 사람인 것 같고, 자기는 아내가 필요하고 자기의 다섯 아들들은 엄마가 필요하다는 게 바스의 말인데, 그에 대한 안토니아의 대답이 아주 재미있다. "하지만 나는 당신 아들들이 필요 없는걸요."
안토니아와 바스는 평생 애인 사이로 지낸다.

시간은 흐르고 행복한 일과 불행한 일, 기쁨과 슬픔이 안토니아의 농장 사람들에게도 찾아오지만, 삶은 계속된다. 안토니아의 친구가 염세주의를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그와 특히 가까웠던 손녀 테레즈와 딸 대니엘라가 실의에 빠져 집안이 우울함에 싸여 있을 때, 안토니아가 무릎을 짚으며 일어나면서 절반은 한숨, 절반은 기합으로 한마디 내뱉는다. "Life is to be lived..삶은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래. 죽지 못해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만큼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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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2 20:46 2006/04/22 20:46







브이 포 벤데타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4/02 18:04
"...중간에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어."

"우리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고, 어찌 보면 지금 우리 이야기일지도 몰라."

영화가 끝나고 난 뒤, 화장실에서 우연히 들은 [브이포벤데타(V for Vendetta)]에 대한 두 가지 매우 다른 감상이다. 첫 번째 볼멘소리는 고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사람이 같이 영화를 본 친구에게 실망스럽다는 투로 내뱉은 것이다. 두 번째 관전평은 나보다도 좀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역시 그와 함께 영화를 본 듯한 친구에게 한 말이었다.

남의 대화를 엿듣는 게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영화를 본 뒤에는 일부러라도 화장실에 들러서 사람들의 관전평을 주워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포일러 주의]

내용 보기


Remember, remember, the fifth of November.
4월 19일이든, 87년 6월이든, 우리도 기억해야 한다.





[+] 나탈리 포트만은 삭발을 해도 아름다우시다.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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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2 18:04 2006/04/02 18:04
  1. GS.
    2006/04/03 22:17
    저 "T_T" 는 너답지 않다. -_-







이터널 선샤인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3/18 23:53

[이터널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에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을 골라내 지워주는 '라쿠나'라는 가상의 회사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슴아픈 일을 겪게 마련인 탓에, 라쿠나 회사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기르던 개가 죽은 뒤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 개를 잊기 위해 기억 제거 시술을 받으려고 하는 노부인부터 시작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옛 연인을 잊기 위해 회사를 찾은 클레멘타인과 조엘까지.

다시는 꼴도 보기 싫다. 그 사람이 내 머리속에서 사라진다면, 난 더 이상 가슴아파할 일도 없을 것이고, 기분좋게 새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조엘과 크게 싸운 뒤 클레멘타인은 홧김에 기억 제거 시술을 받고, 그 사실을 알고 충격받은 조엘 역시 복수하는 심정으로 클레멘타인을 기억에서 없애 버리기로 한다.

라쿠나 회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영화에서처럼 손님이 들끓을 게 틀림없다. 괴로운 기억을 입맛대로 골라서 도려내 버릴 수 있다니. 나쁜 기억은 싹 지우고 기분좋은 기억만을 남길 수 있다면 삶은 좀더 행복해질 게 틀림없다.

라쿠나 회사에서 일하는 메리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메리는 명언집에서 본 글귀 두 가지를 외우고 다닌다.

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쉽게 잊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실수조차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순결한 수녀의 운명은 얼마나 행복한가! / 세계는 잊는다, 잊혀진 세계에 의해/ 티끌 하나 없는 정신의 영원한 광채! / 기도가 하나씩 받아들여지고, 소망은 하나씩 포기된다.

첫 번째 글귀는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등장하는 말이다. [선악의 저편]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 구절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도 기억과 관련해서 몇 가지를 언급하는데, 그는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불행한 일을 겪고 나서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증오심을 키우는 사람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들은, 니체가 말하는 강한 자와는 거리가 멀다.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가 내용이 비슷하다는 걸 생각한다면, 위의 저 구절 역시 비슷한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하다.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 그 과거의 실수를 계속해서 떠올리며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런 실수를 하다니 쪽팔려 죽겠다' 하는 식으로 괴로워하고 있어서는 결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지나간 일은 어차피 아무리 애를 써도 바꿀 수 없는 법. '쩝. 실수했네. 뭐, 어쩔 수 없지' 하고 툭툭 털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진정으로 강한 자라면 일부터 털어버릴 일도 없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잊어버리고 말 테니까.

두 번째 글귀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에서 발췌한 것이다. 수녀가 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 대한 격정적인 사랑과 수녀로서 지켜야 하는 하느님 앞의 경건함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자기와는 달리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티끌 하나 없는 정신'에 대해 찬미를 보내는 구절이다. 아벨라르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엘로이즈로서는, 차라리 아벨라르를 잊어버리고 신 앞에 부끄럽지 않은, 욕정에 휘둘리지 않는 깨끗하고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클레멘타인과 조엘은,(그리고 메리는) 기억을 지우고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잊은 채, 그들이 예전에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고 다시 서로에 대해 사랑을 느끼게 된다. 메리 역시 기억을 지우기 전과 마찬가지로 하워드 박사를 사랑하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기억 제거 시술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이하게도 그들이 예전에 살았던 삶의 궤적을 똑같이 따라간다.

이들은 잊고 싶은데도 잊지 못해서 괴로웠던 게 아니다. 그들은 애시당초부터 잊고 싶지 않았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그리고 메리는 하워드를 잊고 싶지 않았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워갈수록 자기가 클레멘타인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머리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게 된다. 라쿠나의 기억 삭제 프로그램은 결국 조엘의 머리속에서 어떻게든 숨으려 하는 클레멘타인을 찾아내 전부 지워버리지만,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보는 순간 뭔가에 홀린 듯이 그녀에게 다시 끌리게 되고, 그건 클레멘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패트릭과 함께 있으면서 클레멘타인은 끊임없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불안해하던 그녀는 결국 조엘을 처음 보자마자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둘은 자석처럼 서로 달라붙는다.

패트릭은 과거에 조엘이 클레멘타인에게 주었던 선물을 주고, 조엘이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하면서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과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는데도 클레멘타인은 패트릭을 거부하고, 과거에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을, 거짓말처럼 단번에 찾아낸다. 이런 게 운명이고, 이런 게 인연인 것일까?

그렇게 서로 다시 만나서,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그들이 기억을 지운 적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모르고 처음부터 다시 사랑을 시작했으면 그냥 간단히 문제는 해결됐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싹 지워버리기까지 했는데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만났고, 그처럼 운명적인 사랑으로 엮인 그들, 보기만 해도 전기가 파지직 통하는 그들은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그들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영화 끝. 기분좋은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기분좋게 끝나지 않는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전에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서로 싸우고 헤어졌으며, 심지어 서로를 잊기 위해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메리가 라쿠나 회사의 기록을 전부 빼내서 시술을 받은 사람들에게 돌려보낸 탓에, 그들은 서로 뭐가 마음에 안 들었으며 어떤 점들이 자신을 화나게 했는지, 왜 싫증이 나게 됐는지...등등, 기억 제거 시술을 받기 전 스스로 녹음해 놓은 목소리를 고스란히 듣게 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잊고자 했던 과거를 전부 알아버리고 말았다. 이제 막 서로가 너무나 마음에 들기 시작한 차였는데, 돌연 과거가, 온갖 상처와 아픔으로 가득한 과거가, 그 오랜 시간이 무겁게 그들의 머리를 내려쳤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혼란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시작되려던 그들의 관계는 과거가 되살아남에 따라 이제 끝장이 나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돌아서서 떠나는 클레멘타인을 조엘이 붙잡는다.

Joel: I don't see anything I don't like about you.
난 너한테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하나도 없어.
Clementine: But you will! But you will, and I'll get bored with you and feel trapped, because that's what happens with me.
그렇지만 마음에 안 들게 될 거야!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난 너한테 싫증을 느끼게 될 거고 갑갑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왜냐면 난 그렇게 되게 돼 있기 때문이야.
Joel
: Okay.
그래도 상관없어.

Clementine
: ...Okay.
그래.
Joel: Okay.

그래.

그래도 상관없어. 다시 싸우게 돼 있든 말든, 나중에 서로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든 말든.

이제야말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기억을 지우기 전의 상태로.
지워버린 과거가 되살아났는데도 그 둘은 서로를 놓지 않기로 한다. 그들은 과거를 그대로 끌어안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니체는 '잊어버리는' 자를 강하다고 추켜세운 것이지, 잊지 말아야 할 것,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지워버리고 문제가 해결됐다고 자위하는 사람을 찬양한 게 아니다.
'티끌 하나 없는 정신'이 내뿜는 광채는 창백하다. 그런 건 신에게나 어울린다.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채 빛을 발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게 아닐까. 모래알이 뭉쳐서 진주가 되듯이.

그 둘은 이제 다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비록 시작점에서 끝나지만, 틀림없는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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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8 23:53 2006/03/18 23:53
  1. 가넷
    2006/03/31 08:29
    영화감상문만 보고도 이렇게 감동받긴 처음이다.
    이번 주말엔 이터널 선샤인이나 빌려볼까.
    아, 지금 시간에 뭐하는 거냐고? 은행이 아직 안 열려서 기다리는 중이야. -_-
    은행 좀 일찍 열고 늦게 닫으면 안 되나... 쿨럭
    • onecent
      2006/04/02 18:42
      그러고 보니..
      .... 이 글, 엄청난 스포일러로군요 -_-;;;

      은행들은 보통 늦게 열고 일찍 닫는 게 대세인듯. ㅎ
  2. 비밀방문자
    2006/06/08 23:21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onecent
      2006/06/17 23:16
      아이고 이런. 그동안 쓰던 스킨에 최신댓글이 안 떠서 새로 댓글이 달린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이터널 선샤인 진짜 괜찮은 영화였죠. ㅎ
      자주 와주시면 저야 고맙죠.
  3. md factory
    2006/10/31 01:14
    와 글 너무너무너무 잘 쓰세요.
    국문학과인데 정말 부러워요. ㅠㅠ 진짜 부럽네요.







길고도 짧았던 겨울방학 석달.
아침 일찍, 정신없이 집을 나서 지독한 추위를 뚫고 학교로 걸어가는 십여분이 하루 중 유일하게 맘편히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Jurassic 5 - Quality Control

1. 어느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뮤지션이 돼버린 주라식파이브. 이들의 첫 정규앨범인 퀄리티 컨트롤(Quality Control)은 말이 필요없는 명반이다. 보다 최근에 나온, 전에 소개한 파워 인 넘버즈(Power in Numbers)는 이 앨범에 비하면 빛이 바랠 정도다. 주라식파이브가 만들어낸 노래 중에 Jayou만한 건 아마 다시는 나오기 힘들겠지만, 이 앨범 오프닝부터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1번-6번 트랙은, 끊이지 않고 한곡 한곡 넘어가는 빈틈없는 프로듀싱이 일품이다.

맹추위 탓에 웅크린 몸으로도 이들 앞에선 어깨춤을 들썩들썩 출 수밖에 없다.



Mos Def - Black on Both Sides

2. 모스 데프는 탈립 콸리와 함께 블랙스타(Black Star)라는 이름으로 낸 한장의 프로젝트 앨범으로 미국 힙합계를 발칵 뒤집어놓더니, 뒤이어 내놓은 이 솔로앨범으로 블랙스타에서 보여준 실력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 친구는 요즘은 음악뿐 아니라 영화계에도 진출해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에 개봉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도 출연했고, '이탈리안 잡'에도 등장했었다. 얼굴도 잘생긴 데다가 최근에는 랩만 하는게 아니라 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쿨한 아저씨다.

걸쭉한 목소리로 힘있게 뱉어내는 랩이 듣기 좋다. 모스데프는 투팍처럼 증오와 애환이 섞인 가사를 쓰진 않는다. 욕설도 거의 등장하지 않고, 시종일관 그는 감정이 격해지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앨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으며, 인종문제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You can laugh and criticize Michael Jackson if you wanna
마이클 잭슨을 비웃고 욕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Woody Allen, molested and married his step-daughter
우디 앨런은 자기 수양딸한테 치근대고 결혼해버렸어
Same press kickin dirt on Michael's name
똑같은 언론이 마이클 이름엔 흙을 뿌리더니
Show Woody and Soon-Yi at the playoff game, holdin hands
우디하고 순이가 플레이오프 경기에 와서 손잡고 있는걸 보여주지
Sit back and just bug, think about that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좀 해보라구
Would he get that type of dap if his name was Woody Black?
만약에 그의 이름이 '우디 블랙'이었으면 과연 그런 대우를 받을까?
O.J. found innocent by a jury of his peers
O.J.는 그의 동지들(흑인들)로 구성된 배심원에게 무죄라고 판결받았고
And they been fuckin with that nigga for last five years
지난 5년 내내 그친구를 못살게 굴고 있지
Is it fair, is it equal, is it just, is it right?
이게 공평한가, 이게 평등한가, 이게 정의로운가, 이게 옳은가?
Do you do the same shit when the defendent face is white?
피고인 얼굴이 하얘도 똑같은 짓을 할까?
If white boys doin it, well, it's success
백인 녀석들이 하면, 그건 성공
When I start doin, well, it's suspect
내가 하면, 그건 용의자

-[Mr. Nigga] 중에서-



The Roots - Things Fall Apart

3. 친구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앨범이다. 루츠는 여기저기서 이름만 많이 들어본 그룹이었는데, 지금은 왜 진작 들어볼 생각을 안했을까 땅을 치고 있다. 알고보니 세계제일의 비트박스를 자랑하는 그 라젤(Rhazel)도 루츠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바로 이 앨범에 라젤도 등장한다. 이 그룹은 음악 전부를 자기들이 직접 연주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그 때문인지 라이브 트랙에서 유달리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멤버도 여러번 바뀌고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모양이지만, 그룹의 핵인 퀘스트러브(?uestlove - 이녀석은 드러머인데다가 디제이. 곡도 쓰고 자기가 드럼도 치고 하는 천재인 모양이다;)가 있는 한 루츠의 색깔은 크게 변하진 않을 듯싶다.

이 앨범에 담겨 있는 [You Got Me]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곡.


다이나믹 듀오 - 더블 다이너마이트

4. 다이나믹 듀오가 돌아왔다. 처음 들었을 때는 약간은 실망스러웠던 앨범. [이력서] 같은 스타일을 기대했던 탓이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력서]가 오히려 이들의 색깔에서 약간 벗어난 곡이 아니었나 싶다. 2집 역시 1집과 마찬가지로 다이나믹 듀오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내가 국내 랩 앨범을 많이 들어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개코만한 래퍼는 없다.

특히 내 맘에 드는 건 [고백]과 [Let's Go]. [고백]은 무엇보다 가사가 절절히 와닿는다. 후반부에 정인의 노래를 끼워넣는 대신에 가사를 더 썼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무척이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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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7 17:47 2006/02/27 17:47
  1. 이승현
    2006/03/18 19:24
    아하;;모스데프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듯했는데..히치하이커영화에 나왔군요. 그냥 '무슨 개그맨인가보다'하고 생각했는데..어떤 앨범인지 궁금하네요.들어봐야겠어요ㅋ
    • onecent
      2006/04/02 18:42
      하하하. 모스데프가 개그맨같이 생긴 얼굴인가.. 그렇게는 생각 안해봤었는데.
      저 아저씨는 만능 재주꾼이야 진짜. 위에 써 놓은 저 솔로앨범도 사서 들어볼 만하고, 구하기가 좀 힘들겠지만 Black Star 이름으로 발표한 앨범이 소장가치는 더 높지.







Blackalicious - The Craft

주절주절/음악 Posted at 2006/02/26 23:02
블랙칼리셔스가 지난 9월 말에 내놓은 새 앨범, [The Craft]를 듣고 있다.
앨범이 새로 나온 건 진작에 알았지만, 주문하려고 했더니만 이미 상아레코드에선 품절. 그때 이후로 새로 재고가 안 들어왔는지 여전히 품절이다.

어쩔 수 없이 MP3로 듣고 있는 중인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블랙칼리셔스(Blackalicious)는 디제이 치프엑셀(Chief Xcel)이 음악을 만들고, 기프트오브갑(The Gift of Gab) 이 랩을 그 위에 얹는, 2인조 그룹인데, 독특한 사운드도 매력적인데다 무엇보다 극강의 랩실력을 자랑하는 기프트오브갑의 솜씨가 일품이다. (이녀석은 대체 숨을 쉬는건지 마는건지 알 수가 없다; 인간이 이렇게 호흡이 길 수 있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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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6 23:02 2006/02/26 23:02







Three passions, simple but overwhelmingly strong, have governed my life: the longing for love, the search for knowledge, and 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kind. These passions, like great winds, have blown me hither and thither, in a wayward course, over a great ocean of anguish, reaching to the very verge of despair.

I have sought love, first, because it brings ecstasy - ecstasy so great that I would often have sacrificed all the rest of life for a few hours of this joy. I have sought it, next, because it relieves loneliness--that terrible loneliness in which one shivering consciousness looks over the rim of the world into the cold unfathomable lifeless abyss. I have sought it finally, because in the union of love I have seen, in a mystic miniature, the prefiguring vision of the heaven that saints and poets have imagined. This is what I sought, and though it might seem too good for human life, this is what--at last--I have found.

With equal passion I have sought knowledge. I have wished to understand the hearts of men. I have wished to know why the stars shine. And I have tried to apprehend the Pythagorean power by which number holds sway above the flux. A little of this, but not much, I have achieved.

Love and knowledge, so far as they were possible, led upward toward the heavens. But always pity brought me back to earth. Echoes of cries of pain reverberate in my heart. Children in famine, victims tortured by oppressors, helpless old people a burden to their sons, and the whole world of loneliness, poverty, and pain make a mockery of what human life should be. I long to alleviate this evil, but I cannot, and I too suffer.

This has been my life. I have found it worth living, and would gladly live it again if the chance were offered me.

...


친족법 시험공부를 하던 중, 지겨움에 부들부들 떨다가 갑자기 무슨 충동에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무작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중도로 향했다.

다짜고짜 버트런드 러셀 자서전을 빌렸다. 위의 글은 그 책의 머리말이다.

과연 나도 언젠가는 이런 글을 써낼 수준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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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8 22:37 2005/12/08 22:37
  1. 이경호
    2005/12/11 16:19
    영국의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자 철학자이자 문학가였던

    버트란드 러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환생이라 해도 믿겠다.

    역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 글도 매우 잘 쓰네.

    명문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

    심리학 수업에서 어줍게 주워온 지식으로는 인간은

    착각없이는 건강한 정신을 가질 수 없다고 그러지만,

    역시 러셀의 다음과 같은 한마디에 이끌리는건

    아마 너도 그렇겠지.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 을 택하겠다."

    게다가 뛰어난 지성에 손색없는 언행일치를 보여주는

    강인한 의지. 위인이란 이런 사람을 칭하는 것이겠지.
  2. 하영
    2005/12/15 18:59
    해석을 부탁하는건...무리겠지...ㅎㅎ;;
  3. onecent
    2005/12/16 16:34
    단순하지만 압도적으로 강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삶을 지배해 왔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연민. 이 열정들은 마치 커다란 바람처럼 나를 여기저기로 변덕스레 몰아댔다. 거대한 괴로움의 바다를 지나서, 절망의 바로 문턱에 이를때까지.

    내가 사랑을 추구했던 이유는, 첫째로, 그것이 희열을 주기 때문이다. 너무나 커서 다만 몇 시간이라도 그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라면 나머지 생을 다 희생했었을 법한 그런 희열을. 다음으로, 그것이 외로움을 덜어 주기 때문이다. 영혼이 몸서리치며 세계의 끝자락 너머 차갑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 끔찍한 외로움을. 마지막으로, 성인들과 시인들이 그렸던 천국의 영상의 신비로운 축소판을 바로 사랑의 결합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추구했던 것이고, 비록 인간의 삶에겐 과분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마침내 이것을 찾아냈다.

    마찬가지 열정을 갖고 난 지식을 추구했다. 나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별들이 왜 반짝이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수(數)로 하여금 끊임없는 변화를 지배하게 하는 피타고라스적 힘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나는 이것을 조금은, 많이는 아니지만, 해냈다.

    사랑과 지식은, 그것들을 얻은 만큼은, 나를 천국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언제나 연민이 날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게 했다. 고통에 찬 비명의 메아리가 내 가슴 속에서 울려퍼진다. 기근에 시달리는 아이들, 억압자에게 고문당하는 피해자들, 자식들에게 짐이 될 뿐인 가여운 노인들, 외로움으로 가득 찬 세상, 가난, 그리고 고통 은 인간 삶의 이상을 조롱거리로 만든다. 나는 이 악을 누그러뜨리고 싶지만, 힘이 닿지 못하고, 나 또한 고통받는다.

    이게 내가 살아온 삶이다. 꽤 살아볼 만 했다고 생각하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살 것이다.



    ...저 아름다운 문체까지 번역하는 건 내겐 벅찬 일이야;;
  4. 하영
    2005/12/26 18:39
    감동이야. 고마워...쥬륵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