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클 잭슨에 대해서, 음악과 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영화를 보여 줬다고 치자.
당장에 그 사람은 눈을 휘둥그래져서 이렇게 물을 것이다.
"저 사람 대단한 사람이지? 한 가닥 하는 사람이지?"
노래 좀 한다고 뻐기는 자, 춤 좀 춘다고 으스대는 자, 공연 좀 해 봤다고 재는 자.
그 시건방진 입을 다물라.
이런 영화로나마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그가 없어서 너무나 안타깝다.
This Is It.

금방 [트랜스포머 2 : 패자의 역습] 관람을 마쳤다.
이렇게 요란하게 때려 부수고 시끄럽게 쿵쾅거리는데도 지루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그게 감정이고 또 감동인 거지, 억지로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는다고 감정이 생기는 게 아니다.
메간 폭스한테 핫팬츠 입혀 놓고 일부러 야한 앵글로 줌을 당긴다고 섹시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요, 황혼을 배경으로 깔고 슬로모션으로 폭발 장면을 잡는다고 웅장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고, 쓰러진 주인공 주변에 침통한 표정으로 오열하는 가족, 애인, 친구들을 늘어놓고 (또) 슬로모션으로 그 주변을 빙빙 돌린다고 감동이 생기는 게 아니다.
볼거리 뿐인 영화다.
끝내주게 멋진 장면은 분명 군데군데 등장하지만, 그뿐이라면 두시간 반이 아니라 십분짜리 뮤직비디오로 만드는 게 이래저래 경제적일 터.

웨돔 분수광장 바닥을 장식했던 범블비
나는 봉준호가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현 상황과 문제점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연출한 영화를 나는 세 편밖에 보지 못했다. [살인의 추억], [괴물] 그리고 최근 개봉한 [마더].
그러나 위 세 편의 영화에는 일관된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나는 그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그 문제의식은 바로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이다.
봉준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언제나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그들 혼자서(마더), 또는 둘이서(살인의 추억), 또는 일가족만으로는(괴물) 해결하기에 너무나도 벅찬 것들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문제들은 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문제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며, 그 해결을 위해 사회적인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연쇄강간살인범을 잡는 것, 그것은 두 명의 형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현서를 납치해 간 것은 한강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봉준호의 비유를 그대로 따라간다면_여기엔 미군이 한몫했다)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은 비단 현서뿐만 아니라 모든 서울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가 나서서 괴물을 잡아야 옳다.
여고생 살인사건의 진범을 잡는 것 또한 마더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나서서 진범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개개인이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시스템은,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연쇄살인범의 신발자국과 같은 중요한 증거는, 현장보존과 같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절차 미숙 때문에 무참히 사라져 버린다. 또 한 사람의 희생자를 막기 위해 경찰력 증원을 요청하지만, 시위 진압에 이미 경찰력을 모두 동원한 상부에서는 증원 요청을 거절한다. 수사 시스템은 군홧발로 엄한 피의자를 두들겨패는 식으로만 작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식의 시스템 운용은 무수한 희생자만을 낳고, 문제 해결에는 실패한다. 너무나도 범인을 잡고 싶었던 형사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혐의를 받던 바보 피의자는 자살한다. 군홧발로 그 바보 피의자를 두들겨패던 형사는 그 군화를 신을 오른발을 잃고 만다.
국가는, 느닷없이 나타나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괴물을 잡는 것보다는, 명확히 검증도 되지 않은, 괴물이 보유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그토록 방역에는 결벽증과 같은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작 괴물을 잡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괴물을 잡는다고 뿌린 오렌지색 가루는, 그 오렌지색 가루 살포와 정부의 대응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던 사람들을 진압하고 있던 경찰관의 목숨은 앗아가지만 정작 괴물을 죽이지는 못한다. 괴물을 죽이는 건 현서네 가족이다. 그나마도 이미 현서는 죽은 뒤에. 심지어 그 난리를 겪고 나서도, 현서 대신 새로 생긴 아들을 지키는 건 국가가 아니다. 여전히 송강호는 총을 곁에 두고 스스로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한다(마지막 장면).
[마더]에서도 경찰, 변호사, 검사 등 진범을 잡기 위해서, 그리고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 마련되어 있는 사회적 시스템은 전부 다 실패하고 만다. 경찰은 바보 피의자를 두고 엉터리 자백을 받아내고, 변호사는 상담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연줄을 이용해 유야무야 사건을 처리하려 한다. 검사는 변호사가 사 주는 술을 처먹고 술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을 뿐이다. 피해자의 주변 인물을 조사하고, 피해자의 행적을 추적하는 등 응당 수사기관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국가에 의해 수사권이 부여되어 있는 수사기관이 아니라, 아무런 권한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마더 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문제의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희생자들은 생겨난다. 모든 걸 다 제껴놓고 나의 안위를 위해 고군분투해줄, (한국의) 엄마가 없는 어떤 사람, 그리고 마더까지도. 마더와 도준이의 밥상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위 세 영화에서 모두, 주인공들은 정말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 노력한다.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그러나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없다. 도와 주라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혀 놓은 사람들은 그들을 돕지 않는다.
정말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그리고 위 세 영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은,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의 말을 통 들어 주질 않는다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 다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고, 자신의 편견만으로 대화를 이끄는 사람들.
송강호가 [괴물]에서 마취약의 기운과 처절하게 싸우면서 억지로 입을 움직여 간신히 내뱉던 말이 뭐였는지 기억나는가? "왜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 주는거야"였다. [괴물]을 두고 반미영화네 뭐네 열심히 떠들지만, 내게는 저 말이 가장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렇다. 지금 여기,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바로 그런 곳이다.
어느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엄마, 아무도 믿지 마."). 문제 해결을 혼자 힘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사회.
그렇게 타인에 대한 신뢰가 증발하고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대한민국에서 나를 지켜 주는 건 결국 가족 뿐이다.
그리고 가족들끼리 지켜 주는 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엄마가 아들 지켜주는 때이다. 기묘하게도 [괴물]에선, 바로 이 가장 강력한 연대관계가 쏙 빠져있다. 엄마가 아닌 사람들(아빠, 할아버지, 삼촌, 고모)이 아들이 아닌 사람(여자아이)을 지키내기 위해 힘을 합친다. [괴물]의 가족들보다 [마더]의 엄마가 결과적으로 조금이나마 더 문제해결에 성공하는 건 우연일까? 그게 우연이든 감독의 의도든 간에, 우리나라에서 아들 살리려고 덤비는 엄마를 당할 사람이 없는 건 분명하다.
개인 스스로, 또는 가족들끼리 문제를 해결하게끔 내버려 두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결국 문제 해결에 실패하고 만다. 그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태생부터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문제이기도 하고, 애초부터 혼자 힘으론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혼자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도 힘을 합쳐서 해결하기 위해,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는 '국가'란 놈을 만든 것 아닌가? 연쇄강간살인범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납치된 딸을 무사히 되찾기 위해, 아들이 별다른 증거도 없이 살인범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경찰, 검찰, 군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만들고, 무죄추정의 원칙이니 신체의 자유니 하는 것을 헌법에 적어 놓은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놓은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우리가, 엄마가, 아빠할아버지고모삼촌이 나서야 하는가? 그것도 무력하기 짝이 없는 공기총, 양궁, 화염병, 쇠파이프를 들고서? 대포와 탱크, 기관총과 미사일은 어디 갔는가?
봉준호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문제를 던지고 있다.
[살인의 추억]은, 시스템이 처참하게 실패했던, 명백하게 국가가 사람들을 위해 작동하지 않던 독재정권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봉준호가 서 있는 시점은 그 때가 아니라 지금이다. 경찰 일을 그만두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송강호의 모습을 영화 막판에서 보여 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제목에 '추억'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일종의 회고담이다. 봉준호는 그 시절을 오늘날에 서서 되돌아보고 있다.
거기서 그냥 끝났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달라졌으니까, 독재정권은 없어졌으니까, 더 이상은 군홧발로 피의자를 두들겨패는 식으로 피의자를 신문하지는 않으니까, 이제는 법의학도 발전하고 수사기법도 과학화되었으니까, 봉준호는 그저 과거 우리 사회가 지녔던 문제점을 되새겨 보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말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괴물]이 나왔다.
[괴물]에서 봉준호는 말한다. 달라지지 않았다. 독재정권이 없어졌을지는 몰라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키게끔 내모는 곳이다. 사람들이 한강에 뛰어들게끔 내모는 사회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내몰다간, 뛰어내린 사람들을 먹고 자란 괴물이 한강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그나마도 이제껏 그 괴물을 잡은 것은 화염병과 쇠파이프였다. 그러나 그런 식의 대응은 너무나도 희생이 크지 않았던가. 다음에 괴물이 튀어나오면, 그 때는 어쩔 것인가. 이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살인의 추억]을 [괴물]보다 더 재미있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백 년 후 이 시대의 진정한 고전으로 평가받을 만한 영화는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대의 문제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영화, 그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영화('재밌게 잘 찍은 영화'라는 점도 분명히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괴물의 CG가 어설프니 어쩌네 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부차적인 문제다. CG의 질은 영화의 훌륭함을 결정하는 데 아주아주 미약한 영향력밖에 없다(어이 심감독님, 당신한테 하는 이야깁니다).
[마더]는, [괴물]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의 큰 틀을 따라가면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고유한 상황 - 엄마와 아들 간의 강력한, 유별난 유대관계 - 을 새로이 추가해서 보여 준다. 엄마와 아들 간의 유별난 유대관계가 정확하게 어떠한 사회적 문제상황을 구성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길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의 특징적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낳는 현상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한번 고민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마더] 또한 훌륭한 영화다.
봉준호의 문제의식은 결국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나타나는 상황이 제기하는 문제와 동일한 것이다.
개인의 초인적 노력을 강요하는 사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 그래서 피곤하고, 살기 힘든 사회.
[우생순]은 그러한 사회를 기적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헤쳐 나가는 극히 소수의 영웅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영화다.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의 눈물과 땀이 얼마나 멋있는지.
한편 봉준호는 그러한 사회 속에서 실패하고 마는 나머지 절대 다수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어쩌지 못하고 마는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인지.
[마더]를 보면서 나는 계속해서 [괴물]이 떠올랐고, 또 [바벨]이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가. 그들의 말을 우리는 과연 듣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서로가 하는 말을 조금만 더 귀담아 듣는다면, '그럴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면 좀 더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도 신뢰의 끈으로 묶고, 그렇게 해서 거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을 위하여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조커와 배트맨. 그들은 서로 정 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들에게 비슷한 점이라곤 눈에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다.
배트맨이 입고 있는 건 검은색뿐이다(금빛을 띠는 벨트만 제외한다면). 그리고 그 검은색 전투복은 치밀하게 계산되고 디자인된 최첨단 기술의 산물이다. 쭉 뻗은 직선과 늘씬하게 뻗은 곡선이 어우러진 배트맨의 망토와 전투복은 딱 보기에도 멋지다. 우리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황금비율, 비례. 그런 것들을 배트맨의 전투복은 잘 갖추고 있다. 잡티 하나 안 보이는 말쑥한 검은색 또한 엄숙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이 세상 모든 색깔을 섞으면 결국 검은색이 된다고 했던가. 조커는 검은색 속에 감춰져 있던 화려한 색깔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 같은 모습이다. 머리카락에선 초록빛이 돌고, 얼굴엔 새하얀 분칠을 하고 그 위에다 시뻘건 원색으로 커다랗게 비뚤비뚤한 입술을 양 볼에 죽죽 그어 놓았다. 그뿐인가. 입고 있는 옷은 원색에 가까운 보라색이고, 행여나 노란색이 자기만 빼놨다고 서운해할까 싶어서 이빨은 온통 누렇게 칠해 놓았다(칠한 건지, 안 닦아서 상한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배트맨은 고담시의 질서를 상징한다. 그는 부패와 범죄로 가득찬 무법지 고담시에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한다. 나쁜 놈은 잡아 가두고, 나쁜 놈한테 당하는 좋은 놈은 구해 주고.
인간 세계에서 법질서를 엄정하게 확립하는 데 있어 언제나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 집행자 또한 감정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아픈 어머니 병원비를 대려면 어쩔 수 없이 경찰도 갱단과 뒷거래를 하고(라미레즈 형사처럼), 그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법적 절차 같은건 무시하고 사람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협박하고 하게 되는 것이다(하비 덴트처럼).
그러나 배트맨은 사람이 아니다. 진정으로 법질서를 확립시키는 존재가 되려면 배트맨은 사람이 아니어야만 한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이미 이 점을 간파했다. 그는 말했다 : 악당들이 그 이름만 듣고 두려워할 존재가 되어야 한다 - 상징(symbol)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부패시킬 수 있고, 죽일 수 있고,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상징은 부패되지 않는다. 죽지도 않는다. 그 어떤 녀석도 상징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래서 브루스 웨인은 자기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가면을 뒤집어쓰고 정체를 숨긴 '박쥐'라는 상징으로서 범죄와 싸우기로 한다.
중요한 건 그렇게 인간성을 탈피한 상징이 된다는 것이지, 그 상징으로 뭘 택할지가 아니다. [비긴즈]에서 알프레드는 묻는다. "왜 하필 박쥐입니까"라고. 브루스 웨인의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박쥐들을 무서워하니까. 이제 내 적들도 내 공포를 함께 느낄 때다." 굳이 그 상징이 박쥐가 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거미라도 좋고 잠자리여도 그만이다. 중요한 건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법질서 그 자체, 악에 대항하는 선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에 반해 조커는 무질서 그 자체다. 그의 움직임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뭘 할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는 수수께끼다. 영화 내내 조커는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우리를 놀래키고, 반대로 우리는 그 녀석이 언제 튀어나올 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영화가 시작하는 은행강도 장면을 떠올려 보자. 조커에 의해 고용된 사람인줄만 알고 있던 가면쓴 녀석들 중 한 명이 갑자기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모두....날 더 이상하게 만든다"고 내뱉으면서 가면을 벗고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자 조커의 그 기괴하게 생긴 얼굴, 그 섬뜩한 웃음 - 사실 언제나 웃고 있는 얼굴이긴 하지만 - 이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운다. 이처럼 첫 등장에서부터 그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왔다.
고담시 시장이 하비 덴트와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창밖을 내다본 순간, 갑자기 배트맨 옷을 입은 사람의 시체가 창문에 쿵 하고 와서 부딪친다. 공포영화 보는 것처럼 관객의 심장은 떨어진다. (나와 같이 영화를 보던 친구는 심지어 두 번째 보는 것이었으면서도 이 때 의자에서 떨어질 뻔하더라ㅋ)
하비 덴트를 태운 호송차가 감옥을 향해 가는 도중, 웬 거대한 트럭 하나가 길에서 빵빵댄다. 단속을 위해 경찰관이 창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조수석에서 조커가 장총을 들고 튀어나와 경찰을 쏴 버린다.
모두가 탈출한 병원 안. 경찰관 하나가 남은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간다. 뒤돌아 서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돌리며 갑자기 경찰을 총으로 쏜다. 마스크를 벗으니 그 간호사 또한 조커였다.
조커의 등장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는 영화 내내 갑자기 나타나 관객을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도 고담시 전체를 언제나 놀라게 한다. 그 누구도 그가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에겐 규칙이 없다. 그에겐 어떠한 규범도 없다. 조커 스스로가 자신을 칭하는 것처럼, 그는 '혼돈의 사자(Agent of Chaos)'다.
질서의 사자 배트맨. 혼돈의 사자 조커.
질서 대 혼돈. 그 치열한 대결을 그린 것이 [다크나이트]일까? 조커는 체포되었고 배트맨은 어쨌든 힘겹게나마 살아남았으니, 혼돈을 없애고 질서가 승리한 것일까?
나는 [다크나이트]가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질서의 사자 배트맨, 혼돈의 사자 조커. 그리고 그 둘의 대결.
여기까지는 그렇게까지 흥미로운 구석이 없다. 나쁜놈하고 착한놈하고 싸우는 영화 한두 개 봤나 뭐. 여기서 끝이라면 [다크나이트]는 [배트맨 비긴즈]나 [슈퍼맨 리턴즈], [스파이더맨]과 다를 게 없다.
[다크나이트]가 흥미로워지는 건 바로 질서와 혼돈 사이의 관계, 즉 배트맨과 조커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부터다.
조커가 처음 갱단 두목들의 회합장소에 불쑥 나타나서 '배트맨을 죽이자'고 제안했을 때까지만 해도, 배트맨은 물론이고 관객들 모두 그것이 진짜 조커가 원하는 바인줄 안다. 다른 갱단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조커도 배트맨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다들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조커는 배트맨을 없앨 생각이 전혀 없다. 배트맨과 경찰 취조실에서 대면했을 때, 배트맨이 "날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조커는 낄낄거리며, 예의 그 광기어린 파안대소를 퍼부으며 이야기한다. "널 죽이다니?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아마도 Where would I be without you? 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 조커는 배트맨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트맨이 계속 살아 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자신과 계속 놀아 줬으면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처음 방송국에 보낸 협박 영상 - 배트맨 흉내를 내던 사람을 살해하는 동영상 - 에서 조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배트맨 때문에 고담시 시민들이 어떻게 됐는지 봐. (그리고는 카메라를 돌려 자신의 얼굴을 화면에 보여준다) 이렇게 미쳐가고 있잖아."
이 협박 영상을 보고 난 뒤 브루스 웨인과 알프레드가 나누는 대사는 더 의미심장하다.
"이건 도가 지나쳐. 갱단 녀석들이 선을 넘었어."
"주인님께서 먼저 선을 넘었지요. 저들을 너무 압박하고 코너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러자 절박해진 저들이 그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끌어들인 겁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배트맨 때문에 조커가 나타났다.
고담시에 배트맨이 나타나기 전에는 조커 또한 없었다. 조커는 배트맨의 필연적인 부산물이다.
상징화는 언제나 상징으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잔여물을 남긴다. 일견 완전해 보이는 질서체계는 언제나 그 가장 근원적인 지점에 균열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생각해 보라).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와 그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언어가 가장 대표적이다) 사이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가 '책상'이라는 말로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을 지칭할 때, 그 사물과 '책상'이라는 기호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불일치가 발생한다('책상'이라는 말은, 모든 단어가 그렇듯이, 일반개념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책상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인 것이다). 또, 내가 '책상'이라고 하면서 떠올리는 의미와 다른 사람들이 '책상'이라는 기호를 통해 떠올리는 의미는 절대로 똑같지 않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를 언어를 통해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그 언어를 가지고 완벽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더 불가능하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자신의 인식에 근거해서 조종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수많은 개념들을 통해 정치하게 짜여진 법질서를 통해 인간은 세계를 조종하려고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교과서를 통해 민법이나 형법의 해석론을 볼 때는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다가도, 실제 사례에 법을 적용할 때는 언제나 애매하고 어딘지 잘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 드는 것을 떠올려 보라).
그렇다면 우리가 질서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우리가 기호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가는 것, 하나의 체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바로 그 질서가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성을 잊음으로써, 그것을 외면함으로써이다. '책상'이라는 말로 서로 떠올리는 의미는 같지 않지만, 그 대강의 뜻은 통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차이를 잊는다(외면한다). '책상'이라는 말에는 고정된 하나의 의미만이 있는 것이라고 믿어 버린다. 그런 외면, 그런 거짓말을 통해 체계는 비로소 성립할 수 있다.
정치한 질서라 함은 곧 그러한 불완전성이 아주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 사람들이 불완전성을 너무도 잘 잊고 있는, 모두들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질서를 말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계의 불완전성, 질서 속의 균열을 언제까지고 감출 수 없다. 질서의 성립 저편에 감추어져야만 했던 잔여물들, 질서 속에 포섭되지 못한 채 남아있던 나머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생긴다. 그 잔여물들은 말 그대로 질서의 바깥에 있는 것들이기에 질서체계 속에서 그것들은 인식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음이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질서 속에 서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잔여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규칙이나 합리성을 거부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끔찍하게 공포스러운 것으로 다가온다. 바로 '혼돈 그 자체'인 것이다.
배트맨이라는 무자비하게 엄격하고 정치한 질서가 출현했다. 부패경찰은 점점 없어져 가고, 뒷골목을 주름잡던 범법자들은 이제 밤을 두려워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부패시킬 수도, 죽일 수도, 쓰러뜨릴 수도 없는 완벽한 질서가 나타난 것이다. 고담시에는 배트맨과 함께 안정된 질서가 확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한 질서체계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질서가 포섭하지 못하고 남겨둔 잔여물이 그동안 감춰져 있던 모습을 마침내 드러내고야 말았다. 언뜻 보기에 너무나도 완전해 보이는 질서체계였기에 그 균열이 나타나면서 일으킨 충격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띠끌 하나 안 보이는 완벽한 검은색 저편에 남겨져 있던 초록색하얀색빨간색노란색보라색 - 바로 조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시 말해 배트맨이 없다면 조커는 존재할 수 없다. 거꾸로 조커 없이 배트맨 또한 존재하지 못한다. 질서 체계는 일정한 잔여물을 남길 수밖에 없고 동시에 그 잔여물을 남겨야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커는 배트맨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죽일래야 죽일 수가 없다. 그리고 배트맨 또한 조커를 죽이지 못한다.
이러한 둘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바로 배트맨이 오토바이를 타고 전속력으로 조커에게 돌진해 가는 장면이다. 어느 한쪽 없이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두 존재가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날 들이받아! 날 들이받아봐!" 라고 외치는 조커를 끝내 배트맨은 오토바이로 들이받지 못한다. 마치 무슨 초자연적인 힘에 이끌린 것처럼, N극과 N극이 서로 부딪치는 것처럼 배트맨의 오토바이는 마지막 순간에 조커를 비껴가고 만다.
배트맨은 거기서 조커를 피해갈 수밖에 없다.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어길 수 없으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배트맨은 분노에 찬 신음을 흘리며 조커를 죽여 버릴지를 고민하지만, 그 때 고민하는 것은 질서의 상징 박쥐가 아니라 가면 뒤에 있는 인간 브루스 웨인이다. 감정을 사상해 낸 법질서 그 자체로서의 배트맨으로서는 그 순간 조커를 죽이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영화 마지막의 대결에서 조커를 건물에서 스스로 집어던져 놓고도 끝내 그의 발을 붙잡아 끌어올릴 수밖에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것이 배트맨과 조커의 숙명이자, 질서와 혼돈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다. 거꾸로 매달린 조커가 이야기하지 않던가.
"아마 너하고 나는 이 짓을 평생동안 계속하게 될거야..."
이처럼 배트맨이 있는 곳에 언제나 필연적으로 조커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고담시는 어찌 되는건가? 괜히 애꿎은 사람들만 계속해서 조커의 테러에 죽어나가야 하는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도무지 예측할 수도 없는 이 혼돈을 어떻게 감당해 내란 말인가? 실제로 영화에서 조커의 테러행각에 고담시는 전체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인다. 공포는 무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돈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럽다. 알프레드가 말한 것처럼, 조커는 "타협할 수도 없고, 윽박지를 수도 없고, 매수할 수도 없는 사람", "그냥 세계가 불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커'라는 혼돈은 혀를 날름거리며 고담시 전체의 질서를 뒤엎어버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질서의 '성립'이 필연적으로 혼돈을 수반한다면, 질서의 '유지'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 혼돈을 잊어버림으로써만 가능해진다. 포섭되지 못한 균열, 혼돈의 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은폐되어야 한다. 즉, 우리에겐 우리의 질서가 완전하다는 환상, 일종의 거짓말이 필요하다.
이건 비단 사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존재양식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의 행동을 낳는 욕망 체계는 실상 그 한가운데 본질적인 균열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균열은 환상에 의해 지탱된다. 사람들은 그 본질적 균열, 그 공허를 잊기 위해 뭔가 하나의 대상을 붙들고 그 대상만 쟁취하면 우리 욕망은 만족되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입학 시험만 합격하면 된다. 사시만 붙으면 된다. 취업만 하면 된다. 저 사람의 사랑만 얻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경험을 통해 알듯이, 그 어떤 대상도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대학 합격했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사시 붙었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다. 취업하면 그때부터 또 첩첩산중이다. 그 사람의 사랑을 얻었다고 해서 내 공허함이 메워지지는 않는다. 우리 삶의 근본적 무의미성은 끝내 완전히 채워지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가슴 한가운데 뻥 뚫린 구멍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하나의 목표를 붙들고 그 목표를 달성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행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대입시험이, 사법시험이 또는 취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라고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양식이 거짓말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 것이 바로 [다크나이트]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의 전작 [메멘토]였다. [메멘토]의 충격적인 결말에서, 우리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레너드가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의 삶의 전부는 바로 자신의 아내를 죽인 살인자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 살인자는 이미 잡혔으며 아내는 사실 자신이 실수로 죽였다는 것이 진실임을 레너드는 깨닫게 된다. 감당하기 힘든 진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공허와 대면한 레너드는 그 순간 자신의 단기 기억상실증을 이용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엉뚱한 사람이 살인자라고 메모를 해 둔 것이다. 그리고는 말한다. '거짓말을 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이제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인 레너드는 조금전까지 있었던 일은 다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해 둔 메모를 보고는 정말 그 사람이 살인자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렇게 레너드는 영원히 환상 속의 살인자를 쫓아가며 살아갈 것이다(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크나이트]로 돌아와 보자. 레이첼이 죽고 난 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브루스 웨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다. 알프레드가 아침식사를 들고 다가온다. 아침식사를 담은 그릇에는 레이첼이 미리 써 둔, 브루스 웨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놓여 있다. 편지에서 레이첼은 브루스 웨인을 떠나겠다고, 배트맨이 없어진다 해도 그에게 가지는 않겠다고 써 놓았다. 알프레드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브루스 웨인이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뭐에 홀린 사람처럼 내뱉는다. "레이첼이 기다려준다고 했었는데..."라고. 그 순간 알프레드는 편지를 도로 가져간다. 그리고 그 편지를 불태워 버린다.
이것이 바로 브루스 웨인에게 필요한 거짓말이다. 레이첼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언젠가 배트맨을 그만두면 사랑하는 레이첼과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는 것.
이는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어야 브루스 웨인은 계속해서 가면을 쓰고 배트맨 짓을 할 수 있다. 브루스 웨인이 바라는 것은 배트맨 없는 '정상적인 삶'이다. 그런 정상적인 삶이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야만 힘든 배트맨 생활을 하루하루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미 브루스 웨인에게 배트맨을 그만두고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건 불가능할 지 모른다(레이첼 역시 영화에서 그 점을 지적했다). 고담시에 배트맨은 영원히 필요하다. 브루스 웨인에게 다시는 정상적인 삶이란 없다. 그러나 그 점을 깨닫는 순간 브루스 웨인은 삶의 의미를 잃고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레드는 편지를 태워버려야만 했다. '정상적인 삶'이 손 닿을 거리에 있다는 거짓말이 브루스 웨인에게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고담시 사람들에게는 영웅 하비 덴트라는 거짓말이 필요하다. '하비 덴트는 죽는 순간까지 타락하지 않고 악에 맞선 영웅이었다. 나쁜 놈은 배트맨이다. 그녀석 때문에 일이 다 잘못됐다.'라는 것짓말, 바로 이 거짓말 때문에 조커라는 혼돈을 은폐하고 비로소 고담시의 질서는 유지될 수 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것은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다(고담시 사람들이 왜 조커를 탓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조커가 바로 혼돈 그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는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배트맨은 다르다. 그는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자,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녀석이다. 게다가 아무도 그의 실제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 그는 그냥 상징에 불과하기 때문에 - 거꾸로 그 녀석에게 뭐든지 덮어씌울 수 있다. '이게 다 배트맨 때문이다'라고. 마지막 장면에서 배트맨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난 고담시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될 수 있다."
마지막 장면, 배트맨은 자기 탓이라고 거짓말을 하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만으론 부족하다. 때론 사람들에겐 진실 이상이 필요하다..." 그렇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선 진실이 아닌 진실 이상, 환상이 필요한 것이다. 비난을 감수하기로 결심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함으로써 배트맨은 자기 몸으로 조커가 열어 놓은 균열을 틀어막으면서 고담시의 환상을 완성시킨다.
이제 비로소 고담시 사람들은 패닉상태에서 벗어나 질서 속에서(비록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해도)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질서의 불안전성이 잠깐잠깐 드러나는 순간은 계속 있을 것이다. 범죄는 여전히 발생할 것이고,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고담시가 혼란의 도가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다 배트맨 때문이다'라며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으니까. 배트맨만 잡으면 된다고 믿을 테니까.
(그러나 우리는 고든 경찰청장이 결코 배트맨을 잡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고든은 배트맨을 잡지 않아야만 한다. 배트맨이 체포되는 순간 고담시의 환상 또한 깨져버리니까. 배트맨은 영원히 도망다니면서,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고담시의 모든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뒤집어써 줘야 한다.)
고담시의 질서 그 자체인 배트맨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 질서를 파괴하는 무법자인 것처럼 거짓말을 해야만 고담시의 질서를 유지시킬 수 있다. 그래야만 질서에 대한 근원적이며 해결 불가능한 위협인 조커를 은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배트맨은 결코 '백기사'가 될 수 없다. 그는 고담시를 지탱해 주는 기사지만, 스스로 모습을 숨김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사, 바로 '암흑의 기사'인 것이다.

Neville: [talking to Anna about Bob Marley] He had this idea. It was kind of a virologist idea. He believed that you could cure racism and hate... literally cure it, by injecting music and love into people's lives. When he was scheduled to perform at a peace rally, a gunman came to his house and shot him down. Two days later he walked out on that stage and sang. When they asked him why - He said, "The people, who were trying to make this world worse... are not taking a day off. How can I? Light up the darkness."
네빌 : [애나에게 밥 말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는 이런 생각을 했어. 일종의 바이러스학적인 생각이었지. 그는 음악과 사랑을 사람들의 삶에 주사함으로써 인종차별주의와 증오를 치료, 문자 그대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어. 평화집회에서 공연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을 때, 총을 든 괴한이 그의 집에 와서는 그를 저격해 쓰러뜨렸지. 이틀 후 그는 무대 위에 걸어나가 노래를 불렀어. 사람들이 왜 그랬냐고 묻자 그가 말했어. "이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려고 하는 사람들...그들은 하루도 쉬지 않아. 어떻게 내가 쉴 수 있겠나? 어둠을 밝히세."
(출처 : http://www.imdb.com/title/tt0480249/qu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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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잠깐 스쳐가는 장면 하나 때문에 멸망 운운하는 건 분명히 어처구니없는 오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게 오버에 불과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마이클 클레이튼]의 이야기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평생을 거대 로펌에서 일벌레로 살면서, 의뢰인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정력을 바쳐 온갖 법적 무기를 만들어냈던 변호사. 거짓을 덮는 것도 서슴지 않고 진실을 외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그리고 오로지 의뢰인이 던져 줄 돈뭉치만을 생각하던 변호사. 그러던 그가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빌딩 바로 앞 큰길에서 돌연 계시와도 같은 체험을 한다. 내가 방금 걸어나온 저 곳은 훌륭한 로펌이 자리한 건물이 아니라, 거대한 괴물의 똥구멍이었구나. 나는 이 사회를 썩히는 괴물의 더러운 똥을 뒤집어 쓴 채 수십년을 살아 왔던 것이었구나. 그리고 그는 그 순간, 똥을 벗어던지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수 년을 쏟아부었던 사건, 거대회사 유노스가 만들어낸 인체에 유독한 제초제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유노스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집단소송 사건에서, 그는 의뢰인 유노스의 거짓말을 더 이상 돕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유노스의 법무팀장 - 그 또한 끊임없이 그럴듯한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그리고 그 거짓말이 좀더 그럴듯하게 되지 못한 데 대해 끊임없이 불안해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신경이 부서지기 일보직전 수준까지) - 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실과, 그 진실을 말하려고 하는 변호사를 막고자 한다.
괴물의 똥을 벗어던진 변호사 곁에 그의 친구, "기적을 만드는 사나이", 남들이 여기저기 싸질러 놓은 똥을 치워내는 사람, 로펌의 뒷수습 전담 변호사 마이클 클레이튼이 있다. 그야말로 정말 평생을 남이 싼 똥 속에서 살았다. 이제 그는 로펌을 위해, 자신의 월급을 위해 친구의 반란을 수습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이 진행되면서, 클레이튼 자신에게도 친구와 마찬가지 자각이 일기 시작한다. 이제는 그가 똥을 벗어던질 차례다.
이야기야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고 감독의 연출은 뛰어나다. 감독의 시선은 냉정하기 그지없고, 마이클 클레이튼이 느끼는 피로와 고뇌가 내게도 느껴지는 듯할 정도로 생생하다. 시간을 살짝 뒤트는 방법을 통해 자칫 지나치게 단순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은 것도 좋았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씬과 오프닝 씬이다. "나는 죽음의 신 시바다!!" 라고 장엄하게 외쳐 놓긴 했지만 돌아서서 자기가 저지른 일의 엄청남을 새삼 깨달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마이클 클레이튼의 심리상태를 마지막 장면은 대사 하나 없이 잡아낸다. 흥분, 불안, 공포, 뿌듯함과 개운함이 뒤섞인 심경이 조지 클루니의 주름살을 타고 그대로 전달된다.
말 한마디 없이 영상이 뿜어내는 무게만으로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마지막 장면. 그와 정반대로 첫 장면에서 관객을 뒤흔드는 것은 분주한 로펌 사무실을 어지럽게 비추는 영상이 아니라, 그 영상을 배경으로 뒤에 깔리는 말, 로펌 건물이 사실은 거대한 괴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말이다. 표정이 화면에 잡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기적적 체험의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동시에 말하는 사람의 광기어린 심리상태까지 표현해 내는 톰 윌킨슨의 연기가 놀라울 따름이다.
I am Shiva, the God of death!
연기자의 몸에 센서를 달고 그 센서가 보내는 신호를 잡아내서 컴퓨터 영상으로 재현해 내는 기술을 모션캡쳐라고 한다.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을 만들어 내는 데 바로 이 모션캡쳐 기술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골룸의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인 앤디 서키스가 또 하필 체조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 탓에 구부정하게 네 발로 기듯이 돌아다니는 골룸의 몸놀림 또한 그가 직접 모션캡쳐 센서를 달고 연기했다고 한다. 이 때의 활약이 피터 잭슨을 어지간히 감동시켰는지 피터 잭슨의 차기작 [킹콩]에서 서키스는 배우로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그 애꾸눈에 파이프 물고 다니던 선원 역으로), 다시금 센서를 온몸에 달고 이번에는 킹콩의 움직임을 연기해 냈다. 덕분에 '괴수전문배우'라는 말도 심심찮게 듣게 된 모양이지만.
(이건 내 생각이지만, 킹콩 역할 안 하겠다는 서키스를 피터 잭슨이 배역 하나 던져주면서 꾀었던 게 아닐까. 그 선원 역할은 솔직히 없어도 그만인 거였고, 그다지 인상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모션캡처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켜서 배우의 얼굴에까지 센서를 무수히 달고 얼굴 근육의 움직임까지 세밀하게 읽어내 컴퓨터 영상으로 재현해 냄으로써 정말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연기하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만들어 보려고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포레스트 검프]의 감독인 로버트 저메키스인데, 지난 2004년 크리스마스 시절을 노리고 야심차게 개봉했다가 처참하게 실패한 [폴라 익스프레스]가 바로 이런 새로운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향한 첫 번째 시도였다. 당시에는 사람들의 표정이 진짜에 가까워지긴 했어도, 사람의 눈이 뿜는 생명력을 재현해 내는 데 실패하는 바람에, 흡사 넋 나간 좀비들을 그려낸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고 한다. 그 탓에 영화가 실패한 거고.
[폴라 익스프레스]의 실패를 딛고 저메키스가 새롭게 선보이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이 바로 [베오울프]다. 이번에는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눈꺼풀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캡쳐해 냄으로써 사람의 눈이 표현하는 감정까지도 재현해 내려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 시도는 꽤나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베오울프]에서 배우들(과연 '배우들'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면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의 눈동자는 결코 넋나간 사람의 죽은 눈이 아니다. 젊은시절의 베오울프의 눈에서는 넘치는 자신감과 혈기가 느껴지고, 나이 든 베오울프의 눈에서는 회한을 읽어낼 수 있다. 실로 기술의 진보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물론 아직까지 기술수준이 완벽의 경지에 이른 건 아니다. 목각인형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장면도 심심찮게 나온다. 특히 존 말코비치의 눈은 유달리 생명력이 없고, 다른 배우들에 비해 유독 존 말코비치의 얼굴이 현실감이 많이 떨어진다. 왜 그럴까? 존 말코비치는 실제로도 알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얼굴을 한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그렇지만 미묘한 분위기 풍기는 얼굴로 치면 안젤리나 졸리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사람인데, 영화에서 안젤리나 졸리의 얼굴은 말 그대로 '치명적 유혹'의 향기를 있는대로 뿜어내는 모습으로 생생하게 재현됐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특징들이 모여 미묘함을 만들어 내는 것과 쉽게 드러나는 특징들이 미묘함을 만들어 내는 것의 차이일까?)
이 영화는 3D로 보는 게 좋다. 가장 이상적인 건 3D IMAX 화면으로 보는 것이었겠지만, 그러자면 용산이나 일산에 가야 했기에 아쉬운 대로 작은 스크린이지만 3D로 보는 쪽을 택했다(메가박스 11관). 3D로 보는 게 좋은 이유는, 애초부터 3D를 염두에 두고 만든 영화라서 입체감을 느낄 수 있을 때 극대화되는 시각효과를 노린 장면이 많기 때문이다. 가령 뚝뚝 떨어지는 피를 아래쪽에서 잡은 장면이라든지(피가 스크린에서 내 눈 속으로 떨어져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절벽 저편에서 불을 뿜으며 공격하는 용을 화면 한켠에서 잡으면서, 반대편에서 절벽을 따라 달려가는 베오울프를 중심으로 시점을 이동시키는 장면이(이 장면이 그 스케일로 치면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압권인데, 베오울프와 용 사이에 있는 절벽의 원근이 그대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냥 평면 화면으로 볼 때보다 한층 웅장함이 느껴진다) 그 예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기술력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3D 영상이 주는 신기함을 일부러 강조하고 있기도 하고. 그러나 그 기술력이 실로 감탄할 만하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스토리도 그런대로 흥미로운 탓에 두 시간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잘 맞지 않아서 거추장스러운(나처럼 안경 쓴 사람한테는 두배로 거추장스럽다) 3D 안경을 쓰고서 두 시간 동안 시각적 즐거움을 만끽하다 나오면 그걸로 충분히 영화값(무려 만천원!)이 아깝지 않다.
[+] 영화 시작하기 전에 3D안경에 뭐 묻은 건 없나 살펴보고 좀 닦아 놓는게 좋다. 나처럼 영화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경이 뿌옇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닦으려 드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 바다괴물을 기운차게 베고 난 뒤 베오울프는 대체 왜 그렇게 벼략같이 목청이 터져라 자기 이름을 외쳐야만 했던 것일까? 영화 내내 베오울프는 틈만 나면 자기 이름을 고래고래 외쳐대는데("스파르타!!"를 대체할 유행어라도 만들어 볼 생각이었던 걸까?), 다른 경우는 그래도 외쳐 봄직한 상황이었다 쳐도 여기서는 정말 뜬금없다.
그 뜬금없음으로 치면 [스타워즈 : 시스의 복수]에서 팰퍼틴이 밑도 끝도 없이 별안간 "파워~~!!!!"를 외쳤던 거하고 맞먹는다. -_-; 배우는 완전 진지하지만 보는 사람은 배가 찢어지게 웃긴 것도 똑같다.
[+++] 보러 가기 전에 마음을 약간 굳게 먹을 필요가 있다. 영화 초반에 괴물 그렌델이 등장하는 장면은 정말 끔찍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렌델도 정말 끔찍하게 생겼고..-_-; 영화 초반은 거의 호러 영화 수준.
졸리의 눈빛
Since its premiere, 2001: A Space Odyssey has been analyzed and interpreted by multitudes of people ranging from professional movie critics to amateur writers and science fiction fans. Kubrick encouraged people to explore their own interpretations of the film, and refused to offer an explanation of "what really happened" in the movie, preferring instead to let audiences embrace their own ideas and theories. In a 1968 interview with Playboy magazine, Kubrick stated:
"You're free to speculate as you wish about the philosophical and allegorical meaning of the film—and such speculation is one indication that it has succeeded in gripping the audience at a deep level—but I don't want to spell out a verbal road map for 2001 that every viewer will feel obligated to pursue or else fear he's missed the point." (Wikipedia 에서 퍼옴)
첫 선을 보인 이래로, 전문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아마추어 작가들, 그리고 공상 과학 팬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분석하고 해석해 왔다. 큐브릭은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찾아 볼 것을 권하면서, 관객들이 관객 자신들의 생각과 이론을 채택하게끔 하는 쪽을 택하고 영화에서 "실제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직접 설명해 주는 것을 거부했다. 1968년 플레이보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큐브릭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마음껏 영화의 철학적·비유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도 좋습니다(그렇게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이야말로 영화가 관객을 깊이 사로잡았다는 하나의 지표인 것이죠). 제가 [2001]의 지도를 말로 그려내 보인다면, 모든 관객이 핵심을 놓칠까 두려워 그 지도를 쫓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겠죠. 저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놈의 돌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