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차전 갔다는 소식을 듣고
지연손해금 계산하던 걸 내던지고
독서실에서 김재하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갔건만.
아아 지못미 이제동.
[+] 벙커야말로 스타판 최대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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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PD수첩 사건 수사결과 발표에 대한 단상
이 부분에서 남은 쟁점은 공적 관심사안에 대한 보도라는 점에서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보도가 아닌 한 위법성이 조각된다"라는 법리에 따라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을지일 뿐임.
그러나 검찰 수사결과 발표만 놓고 봤을 때, 다툼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조각되기 힘들어 보임.
2. 업무방해죄 부분은, 위계 또는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행위가 있는지 약간 의문.
명예훼손죄 부분보다는 좀 덜 명확하다고 생각함.
3. 이 사건과 관련성이 극히 적다고 판단되는, 사적인 대화임이 명백한 이메일을 공개한 것은 결코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됨. 검찰 입장에서 봐도, 수사결과에 대해 괜히 욕먹을 빌미만 제공한 셈이 되었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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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
2009/06/19 17:10정확한 사실관계는 모르겠지만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것이 맞나?
검찰의 이메일 공개는 적어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은지?;;
글구 구성요건에 기계적으로는 맞추어 넣을 수 있다고 해도 정책을 비판한 언론에 대하여 담당 공무원 명예 훼손되었다고 기소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있나 모르겠네.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요즘은 법률가라는 직업이 참 치졸하게 느껴지는군.-
onecent
2009/06/19 21:07음..검찰 수사결과 발표문을 한번 읽어봐. 대검 홈페이지에서 구할 수 있어. 최소한 그 내용을 보면 구성요건해당성은 인정된다고 보는 게 맞는듯.
검찰의 이메일 공개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구성요건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그것과 피디들의 명예훼손죄 성부와는 별개의 문제지.
그리고, 정책비판언론에 대해서 정부기관장이 자기 명예가 훼손됐다고 대뜸 고소한 것부터가 코메디라는 데에도 동의해. 사실 검찰이나 법원 같은 사법기관에 오지 말아야 할 문제가 자꾸 넘어오는 게 사법기관 입장에서는 제일 난감한 문제라고 생각함. 요즘 검찰시보하면서 느끼는거지만.. 많은 사람들이 '잘못한 사람은 모조리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 잘못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 거잖아? 도덕적 비난가능성만 있는 잘못도 있고, 불법행위책임은 인정되지만 형사처벌할 정도는 아닌 잘못도 있고, 형사처벌해야 하는 잘못도 있는 거지. 근데 사람들은 조금의 잘못만 있어도 죄다 검찰에 고소부터 한단 말이야(이명박 욕을 만평에 집어넣은 만화가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로 고소한 것도 바로 이런 경우겠지).
나는 누구보다도 피디수첩 제작진의 사실왜곡이 없었다고 믿고 싶어한 사람이야. 그리고 실제로 미국산 쇠고기와 광우병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해서 검찰이 이야기한 것처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닐지도 몰라.(다음 기사가 참조가 됨;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619151210)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도 의도적인 오역이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고(내가 많이 실망한 것도 바로 이 오역 부분이지), 허위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내용도 있다고 봐(법원의 정정보도사건 판결도 마찬가지 의견이었지).
그렇게까지 오역을 하고 심하게 과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송이었을 텐데 너무 무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울 따름이지.
다투기에 따라서, 그리고 법정에서 추가로 밝혀질 사실관계에 따라서 위법성이 조각될 여지는 있다고 보이니까, 그리고 검찰 수사결과 발표는 일방 당사자의 입장일 뿐이니까, 좀더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겠지.
법은 사회현상을 절대로 다 규율할 수 없어.
이 세계가 모래밭이라면, 법으로 그 세계를 규율하려 드는 것은 맨손으로 그 모래를 움켜뜨려는 것과 같겠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게 대부분이야.
그런 의미에서 사법부의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야. 더구나 형사 사법기관은 더 말할 나위도 없어.
토론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인데도 토론할 줄 모르는 사람들, 도무지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기울이고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 문제를 죄다 검찰과 법원(그리고 헌재)에 떠넘겨 놓고는 검찰과 법원의 입만 쳐다보고 있어. 그게 오늘날 법률가들의 진정한 비극이 아닐까.
그 때문에 나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도 우리 나라의 법률가들에게 사법소극주의적 사고방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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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
2009/06/22 23:10나도 한번 구해서 읽어 봐야겠네. 신문 기사만으로 보는 경우에도 약간 의도적인 오역이 있는 것 같다는 기사가 실려서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좀 걱정이 되었었는데, 사실관계상 그렇게 인정될 가능성이 좀 꽤 있나보군...아쉽군. 검찰에서 이메일 공개한 것으로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검찰이나 정부가 의도한 바를 이루었다는 생각이 드네. 법원에서 무죄가 나와도 어차피 일부 사람들은 법원이 좌파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정치의 권위가 없으니 모든 것을 사법기관의 권위를 빌어 처리하고자 하다보니 지금과 같은 사법만능주의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삼성 판결을 보면서 법원에 대한 기대도 많이 접었지만, 그래도 법원이 검찰보다 조금은 낫다는 생각은 아직은 유효한 것 같아.
검찰이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이 얼마나 막강하고 또 한편으로는 위험한 것인지 요즘 정말 실감하고 있지. 자의적 검찰권의 행사, 있는 자와 없는 자에 대한 불공평한 검찰권 행사가 만연하고 있는데(예컨대, 공정택 사건과 노무현 또는 주경복 사건, 용산사건/경찰의 시위대 폭행사건과 시위대의 경찰에 대한 폭행/교통방해/집시법 위반 사건 등) 이러한 불공정한 검찰권 행사 자체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고, 사회 안정을 위해서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말을 꺼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는 사실이 더 아쉬운 것 같아.
암튼, 주로 한쪽 신문기사만을 보다보니 이건처럼 fact를 더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원칙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군.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검찰은 사법소극주의, 법원은 진보적 의미에서의 사법적극주의가 필요하지 않나 싶군.
Good night~
가인(街人) 김병로를 보며 책임을 생각하다
책임은 사후적인 것이다. 행동규범을 세우는 것이 먼저 있고, 그 행동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그 다음이고, 규범에 맞지 않은 행동이 벌어졌을 때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맨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책임은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규범을 세우는 것은 쉽다. 그에 맞춰서 행동하는 것은 그보다 어렵다. 그러나 규범에 맞춰 행동하지 못했을 때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이는 당장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분명하다. 생활계획표를 번지르르하게 짜 놓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극기, 인내, 근면성실 등 온갖 좋다는 단어는 죄다 좌우명으로 가져다 써서 벽에 걸어 놓는 것까지는 언제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계획표에 따라 하루하루를 사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벽에 아무리 극기라고 써 붙여 놔도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지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계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이라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임은 이처럼 너무나 어려운 것이지만, 한편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올바른 것으로, 가치있는 것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합의하여 만들어낸 규범들(근대 국가에서는 ‘법률’이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은, 책임이 없다면 한갓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규범은 그것이 지켜질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규범을 지키는 일은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움으로써만 가능하다. 규범을 어기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여기서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이 장기적인 안목과 합리적인 양보에 따른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종이에 훌륭한 글귀를 써서 걸어두는 것은 쉽다.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서로 차분하게 의논하고 토론해서 규범을 제정할 때는, 서로의 단기적인 이익을 조금씩 양보해서 가급적이면 모두가 이익이 되게끔 규범의 내용을 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문제는 현실에서 순간순간의 갖가지 욕망과 충동에 맞닥뜨리게 되면 누구나 단기적인 이익만을 좇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 책임 없이 방치하다 보면 결국 사회는 모두가 매 순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사회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반면 모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회는 결국 모두가 서로의 행위를 신뢰하는 사회가 된다.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고, 좋은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신뢰가 구축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대의를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작은 이익을 희생한다. 약속을 깨는 사람은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른다는 신뢰가 구축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상대방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 법이다.
가인 김병로의 삶은 구한말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격동의 해방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덕분에 80여 년에 걸친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은 곧 지금 현재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규정한 지난 80여 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는 것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 지난 세월은 ‘책임의 부재’라고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제에 협력하여 부를 축적하고 조선 사람들을 핍박했던 친일파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나마도 뒤늦게 구성된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일제시대 때 악명 높은 경찰이었던 노덕술 등을 체포하자 이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질 새도 없이 도리어 경찰이 반민특위의 본부를 습격하고 특위요원들을 연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6∙25 전쟁 당시 ‘안심하라’는 공식발표를 믿고 서울에 남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은 도망가며 한강 다리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는 전세가 회복되자 돌아와서 그 때 떠나지 말라는 그들의 말을 믿은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벌하려 들었다.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 온갖 기본권을 헌법에 버젓이 명시해 두고도 정작 정부에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자들은 그 입을 막고, 신문을 정간시키고, 부당구속과 고문을 일삼았다. 규범을 믿고 따른 자들은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규범을 어긴 자들은 책임을 지기는커녕 그때그때마다 그들이 취했던 기회주의적 태도 덕에 득세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책임의식의 상실, 신뢰의 부재로 신음하고 있다면 그 큰 이유는 이러한 책임이 실종된 현대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임이 사라진 지난 수십 년의 결과가 바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사회, 영화 ‘괴물’에 잘 드러난 것처럼(괴물에게 잡혀간 현서를 필사적으로 찾는 건 결국 가족들이지, 국가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아둥바둥 자기 앞가림을 해야만 겨우겨우 자기 이익을 지켜낼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책임 부재’의 현대사에서 가인 김병로 선생은 홀로 외로이 버티고 서 있는 단단한 바위 같다. 그는 밀려오는 기회주의의 파도 속에서도 원칙을 놓지 않는다. 일제의 탄압에도, 해방 후에는 이승만 독재 정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자신의 소신을 지킨다. 가인은 책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것을 일관되게 못마땅해 했고, 결국 그 때문에 스스로 몸담았던 한민당에서 탈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법원장으로 있던 시절 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탄압에 맞서기도 하였다. 이승만 하야 후에도 “일제잔재의 경찰관을 재등용하지 말 것, 이승만정권에 추종아부한 각계 간부를 과도정부의 모든 기구에서 제거하고 숙청할 것”을 요구했고, “죄형법정주의, 형벌불소급의 원칙, 만인의 법 앞의 평등의 원칙 등 민주주의의 기본원리가 파괴된다”는 재야 법조인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이승만 정부 시절의 부정선거원흉과 부정축재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장까지 지냈던 가인이 과연 죄형법정주의, 형벌불소급의 원칙, 만인의 법 앞의 평등의 원칙을 등한시했던 것일까? 나는 가인이 사법, 나아가 법치의 핵심이 곧 책임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생애에 걸쳐 일관되게 그는 잘못했던 사람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나 일제가 물러난 직후의 해방기나 이승만이 하야한 직후 과도정부가 들어선 시기와 같이, 표면적으로 나타난 큰 변화 탓에 사람들이 보다 세세한 책임추궁에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격변기일수록 가인은 앞장서서 책임의 확보를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널리 퍼져나가지 못하고 작은(그러나 힘찬) 외침으로만 남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깝다.
규범 그 자체, 더 나아가 그 규범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단계의 주춧돌이 책임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가인이 책임 확보를 본업으로 하는 사법부의 초대 수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이 즐거움보다 많은 우리 현대사에서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그의 책임성은 비단 사회규범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개인적 규범의 차원, 즉 윤리와 도덕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법관은 남들로부터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결벽에 가까운 청렴생활을 했던 것, 공과 사를 칼처럼 구분했던 것 등 그는 실로 도덕률에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토록 스스로 엄격하게 책임을 지며 살았던 그였기에 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책임을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렇기에 그가 내리는 판결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인을 보며 책임을 생각했다. 그의 삶의 모습이 담긴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도 책임을 지기로 결심했다. 그 때문에 독서감상문 제출일 새벽이 돼서야, 잠자리에 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가인 김병로 평전’의 독서 과제가 주어지고 난 뒤 그 긴 여름 동안 차일피일 책 읽는 것을 미뤄 온 내 게으름에 대하여 책임을 지기 위해서다. 밤이 깊어지고 마감시한이 다가올수록 대충 넘겨 읽는 발췌독만으로 감상문을 작성하고자 하는 유혹에 계속 부딪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80평생을 통해 책임을 몸소 보여 준 사람의 삶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글을 쓴다는 것은 너무나 자기모순적인 짓이었다. 지난 두 달 간의 나태함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작은 행위를 하는 것 - 책을 완독하고 생각을 정리해 글을 쓰는 것 -이 가인의 후배로서, 가인의 손길이 아직 남아 있는 법전을 뒤적거리며 살아갈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가인의 비문에는 “비록 몸은 가셔도 조국을 위한 기원은 살아 있어 길이 나라의 힘이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나라의 힘까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이 책을 읽으며 그가 내게 보여 준 모범이 길이 내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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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cent
2009/05/22 22:46이건, 연수원 1년차 때 여름방학 과제였던 '가인 김병로 평전' 서평으로 쓴 것이다.
글에도 썼듯이 제출일 당일 새벽에 졸린 눈을 비벼 가면서.
요즘 검찰시보를 하면서, 사람들을 수사하고 기소하고 구형을 하면서 새삼 '책임'이 화두로 떠올랐다.
전에 써 둔 것이 생각나서 곱씹어 보면서 생각이나 정리할 겸 여기에 올려놓는다.
일요일 저녁에 어둑어둑해지면 얼마나 우울한지. 이런 기분은 중학교 다닐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2. 지난 금요일, 근 1년만에 선생님께 안부 전화를 넣었다.
내가 스승의 날에 일부러 전화 거는 선생님은 한 분 뿐이다.
"요새 수업 어떠세요, 재미있으세요?" 라고 묻자 선생님께서는 기운빠진 목소리로 "재미없다"고 하셨다.
예전 내가 수업 들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모양이다.
선생님께서는 또 "예전 너희 때가 재미있었는데.."라고도 하셨다.
저도 재밌었어요, 그때. 두고두고 못 잊을만큼.
조만간 찾아뵙고 술이라도 한 잔 올려야겠다.
3. 토요일 아침만 되면 꼭두새벽에 귀신같이 일어나서 부리나케 일산으로 향한다.
그러다 보니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지하철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한 번 갈때마다 한 시간씩 걸리니까.
지하철에선 뭐라도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으니, 그 동안 평소에 시간이 참 없는데도 책 읽은 건 되려 3, 4월보다 더 많은 것 같다.
먼저 [부자 아빠의 몰락]. 소득 불평등의 심화는 모든 사람들의 공공복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논증해 내는 책이다. 논증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책이 분량도 얼마 안 되고 평이한 문체로 읽기 쉽게 쓰여졌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이다. 세상을 보는 눈을 좀 더 넓고 깨끗하게 틔워 준다. 시간 내서 일부러 읽어볼 만하다.
그리고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주류 언론의 일간지 사설을 읽으며 답답해진 가슴에 한 줄기 시원한 비를 뿌려주는 책이다. 건전한 상식으로, 합리적인 사고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최소한 한 사람은 더 있다는 생각에 든든해진다. 이 책 역시 시론집이니만큼 평이하고 읽기 쉬운 문체로 되어 있어 부담도 적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주요 문제들에 대하여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날카로운 분석을 보여 준다. 부동산 문제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과 종부세 옹호론이 마음에 와닿는다. 이준구 교수는 한국의 폴 크루그먼이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크루그먼의 [대폭로]의 한국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한홍구 교수가 쓴 [특강]. 이 책 역시 앞의 두 권과 마찬가지로 읽기 쉽고, 그러면서도 내용은 얻어 갈 게 많다. 읽는 내내 공감가는 부분이 참 많았다. 내용 자체는 여기저기서 한 번쯤은 주워들은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도 같지만, 뉴라이트의 기원과 그 정체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웠다.
세 권 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영양가는 많다.
세 권 다 선뜻 추천을 날린다.
4. 검찰 시보를 하면서 매일매일 느끼는 게 참 많지만, 그 중에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 경찰 수사권 독립은 시기상조다.
- 수사 단계에서부터 변호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피의자들은 변호인의 조력을 적극 구할 필요가 있다.
- 검찰에서는 아직도 구속을 구속사유와 무관한 제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공판중심주의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난 피의자들이 왜이리도 불쌍한지 모르겠다. 아직 악질 피의자를 못 만나봐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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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
2009/05/20 17:51ㅎㅎ 지하철에서 책 읽던 시절이 그립네. 난 출근길이 3정거장 밖에 안되서 책 읽기에는 너무 짧지...퇴근길은 전철 끊겨 택시로..;;
여유없는 평일과 가족과 함께하는 주말로 인해 정말 강인한 의지가 없이는 책 읽기가 참 쉽지 않네. 그나마 최근 읽은 몇 권은 서평도 안 쓴채 기억에서 서서히 희미해져가네.
경찰수사권 독립은 시기상조라는 말은 지당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검찰이 경찰보다 얼마나 낫나 하는 생각도 드네. 물론 전반적으로는 훨씬 낫겠지만,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사실 차별성이 없는 듯...-
onecent
2009/05/25 22:40검찰에서 직장생활 해 보니까 책 읽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 주말에든 평일 밤이든 일부러라도 책 읽는 습관을 들여야겠어.
몸에 배면 자연스럽게 될 텐데 말이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란 측면에선 별로 차이가 없다는 데는 동의. 난 다만 수사의 초점을 맞추는 점이랄지, 그나마도 적법절차를 지키려고 하는 점이랄지 하는 부분에서는 검찰이 경찰보다 아직 낫다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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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가게에 들어가서 청바지를 고를 때 보는 건 일단 두 가지다.
먼저 색깔과 워싱처리된 무늬를 포함한 모양새를 본다. 그리고 나선 마음에 드는 녀석은 가격표까지 본다.
가격까지 마음에 든다면 - 가령 "디젤인데 50퍼센트 세일"이라거나 하면 - 입어보게 사이즈를 찾아 달라고 점원에게 물어 본다(혹자는 캐시미어라면 가격조건은 아예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아무리 걸려 있는 걸 보고 마음에 들어도, 입어 보고 난 뒤에까지 마음에 드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정말 간혹이지만, 입어 보고 나서 단순히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그래바로이거야"라는 기분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런 "그래바로이거야" 청바지라고 하더라도, 키는 작으면서 작은 키에 비해 허리사이즈는 크게 입는 나로서는 바지 길이를 줄여 입어야 한다. 잘려나간 바짓단은 도로 이어 붙일 수 없는 일이기에 수선을 맡길 때는 길이를 좀 적게 줄이게 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한 번 줄여 입고 다니다가 또 한 차례 수선을 맡겨야 하는 일도 발생한다.
길이까지 딱 좋게 줄여서 줄기차게 입고 다니다 보면, 그 바지를 입는 요령이 쌓인다.
배불리 먹었을 때는 벨트를 한 칸 풀어서 채우고, 야트막하고 폭이 좁은 캔버스화를 신을 때는 끌리지 않게 한 칸 조여서 채운다. 길이가 긴 티셔츠에 맞춰서 헐렁하게 입을 때는 내려 입고, 내려 입었다간 허리가 너무 길어 보인다 싶으면 좀 올려 입는다(그러나 어지간해선 허리에 맞춰 입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요령이 쌓인 상태에서 계속 줄기차게 입고 다닌다. 그러면 청바지가 몸에 적응하는 건지 몸이 바지에 적응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옷감은 데님인데도 흡사 츄리닝을 입고 다니는 것처럼 편하기 그지없는 상태가 된다.
드디어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은 궁극의 경지에 도달했나 싶으면, 바로 그 순간
바지가 해져서 찢어져 버리고 만다. 원래부터 찢어서 판 바지가 아니었으니 찢어진 게 보기 좋을 리 없다.
거 참. 요새 바지는 옷감도 튼튼한 걸로 만들텐데 내가 험하게 입는 건지 아니면 불량품인 건지.
그러고 나면 다시 "그래바로이거야" 바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아니면, 그냥 찢어진 데를 수선해서 입고 다닐까?
‘조중동 광고중단운동’ 전원 유죄 판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191925451&code=940100
판결에 대한 보도는 판결문 인용이 불완전한 데다가 그나마 인용되는 부분 또한 법리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을 비껴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판결문 전문, 더 나아가 사건 기록을 보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 보도만을 두고 판결문에 대해 논평을 가하는 것은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두 번째로 인용한 기사에 실려 있는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번 유죄판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광고중단을 요구하며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은, 당연히 적법하다. 이는 정당한 소비자의 권리행사이고 넓게 보면 표현의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이 터졌을 당시 검찰측에서 '이차적 불매운동은 그 자체로 위법'하다고 주장한 것은 옳지 않다. 이차적이냐 일차적이냐는, 불매운동이 업무방해행위로서 범죄가 되느냐 마느냐와 무관하다.
그러나 불매운동이라고 해도 그 구체적인 실현방법에 따라 범죄행위가 될 수 있다. 이 사건에서도 문제된 것처럼,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할 정도로 항의전화를 넣는다든지, 가게에 쳐들어가 물건을 파괴한다든지 하는 행위라면 그러한 행위가 공익을 위한 불매운동이라는 정당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 한들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물론 언제나 목적의 정당성과 수단의 위법성 사이를 형량해서 위법성을 조각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따라서 만약 이번에 형사처벌된 사람들이 정말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업무방해행위(협박전화를 무수히 건다든지 하는 행위)를 직접 행하거나 교사한 사람들이라면, 이번 판결에는 잘못이 없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유사 불매운동 사례 가운데 유독 이들만을 수사해 기소한 검찰의 잘못이 사라지지는 않을 터다). 그러나 피고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들은 단지 불매운동 까페를 만들고, 불매운동을 벌일 기업체들이 어디어디인지 알려주고, 불매운동을 홍보하여 회원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뿐이었다면 이들은 무죄다. 피고인들 중 한 명이 말했듯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불매운동을 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기까지 했다면 그야말로 무죄임이 틀림없다. 그러한 방법 외에 대체 어떤 방법으로 불매운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행위만으로 업무방해행위를 공모했다고 볼 수 있는가(내가 보기엔 이번에도 몹쓸 '공모공동정범' 이론은 위력을 발휘했다. 공동실행이 없는 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수만 명의 회원의 세를 이용한 것'을 위력이라고 봤다면 - 다시 말하지만 언론보도만을 보고 논평하는 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 그건 진짜 코메디다. 까페 개설과 까페 운영과 같은 활동이 다수의 세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형태의 대중행동도 형사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에서 가장 큰 문제는 비슷한 형태의 행위에 대해 선별적으로 발동되는 검찰의 수사권/기소권일지도 모른다. 이런 판결이든 저런 판결이든, 형사판결을 끄집어 내는 최초의 행위는 검찰만이 할 수 있다. 그런데 검찰은 기소권을 그야말로 편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거기서 많은 부정의가 발생한다. 난 사시공부할 때부터 기소편의주의는 잘못된 제도라고 생각했다. 연수원 공부를 하면서는 기소유예 제도가 못내 마음에 안 들었다. 다시금 그런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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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elysole
2009/02/20 00:23요즘 검찰이 기소하는 정치적 사건들이나 그에 발맞추는 법원의 정치적 판결들을 보면, 불의에 분연히 맞서 싸울 용기가 부족한 나같은 사람은 검찰이나 법원에 가지 않은 것이 정말 잘한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로펌에서 지나친 사익의 대변으로 공익을 침해하는 일에 일조하지 않을까 고민했었지만, 실제로 업무를 하다보면 그런 일은, 적어도 내가 하는 업무 분야에서는 거의 없는 것 같아. 오히려 검찰과 법원에서 개개인에게 입신양명과 양심의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 같군.
소위 법조인이라는 사람들이 권력에 빌붙어 떡고물을 받아 먹으면서 그 알량한 전문성을 무기로 탄압의 도구가 되어 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막상 그러한 일이 이렇게 금방 목격하게 되니 기분이 참 씁쓸하지...
법비들과 오직 자기가 보는 언론에 나오는 것이 진실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듯. 정말로 본인이 희생자가 되기 전까지는 인식의 틀을 깨기가 너무 힘든 것인가하는 생각이 드네...
KBS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행사 생방송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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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elysole
2009/01/05 23:33요즘 참 기가 찬 일들이 횡행하고 있지. 정말 열심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거나 각색된 매체를 통해 엉뚱하게 사태파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다수인 듯.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말했던 것이 최장집 교수였던가...그런 논의 자체가 사치가 되어버린 현실이야...-
onecent
2009/01/13 10:07정말이야. 요새 신문 보면 우울한 이야기들뿐이지.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해도 벅찬데 이스라엘에서 전쟁까지 나고...이래저래..
이런 때일수록 눈을 부릅뜨고 세상 돌아가는 걸 지켜봐야겠어. 그리고 할 말이 있으면 입도 열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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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nscience of a Liberal (리버럴의 양심)

경제적 불평등의 역사를 분석하면서 크루그먼이 내리는 결론은, 경제학자보다는 정치학자가 내릴 법한 것이다(그 스스로도 처음에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리라고 생각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불평등의 부침은 외부적 시장경제적 요인이 아닌 정치적 요인에 의해서 일어났다. 일련의 정책에 의해 뉴딜 시대의 소득의 (상대적)균등과 그에 따른 탄탄한 중산층 사회의 형성이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1970년대 이후 우경화한 공화당과 그들의 집권에 따른 정책변화가 오늘날의 양극화를 낳았다. 다시 말해, 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는 시장경제의 흐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적 활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역으로, 우리의 정치적 활동에 의해 현재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은 완화될 수 있다. 외부의 경제적인 요인이 불평등을 해소해 주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새로운 뉴딜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크루그먼이 진보주의자(Progressive : 그는 이 책에서 'progressive'를 '행동하는 리버럴 liberal'이라고 정의한다)로서 미국 사회에 전하는 메세지다.
잠깐 용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난 아직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liberal'이라는 단어를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저 단어의 본뜻대로 '자유주의자'라고 번역해서는 저 단어가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냉전의 시대를 극심하게 겪은 미국에서 '좌(the left)'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인상 때문에 미국에서는 좌우(left/right)라는 보다는 'liberal/conservative'라는 말로 정치적 성향을 구분한다. 한국전쟁을 통해 북한과 그들이 대변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형성하게 된 우리나라에서 '좌/우'가 아닌 '진보/보수'라는 말을 널리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흥미롭게도 크루그먼은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연이은 보수의 공격으로 'liberal'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되었음을 이야기하며 그 대안으로 'progressive'라는 말이 떠오르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물론 그 스스로는 'progressive'라는 말을 앞서 본 것처럼 'liberal'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어떤 한 단어에 부정적인 인상을 심기 위해 노력하고, 나중에는 그 단어 자체를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가령 반정부적 정책이면 모조리 '좌파' 또는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정치적 공격방법을 생각해 보라)은 미국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말' 자체가 아닌 그 말이 지칭하는 실질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린 껍데기 때문에 실질을 너무 쉽게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크루그먼은 행동하는 리버럴(마땅한 번역어를 못 찾겠으므로 부득이 소리나는 그대로 쓰겠다)로서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 전하는 메세지를 이 책에 담았다. 그러나 그의 메세지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유효하게 먹힌다. 오늘날의 미국 사회와 미국의 정치지형도가 우리 나라와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보자.
"21세기 초반 미국 사회의 모순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를 리버럴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중요한 측면에서 [오히려]보수적이고, 스스로를 보수(conservative)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개 매우 급진적이라는 것이다. ...리버럴들은 우리의 민주주의 원칙들과 법치주의를 존중하고자 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보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독재자의 권력을 갖기를 바라며 부시 행정부가 혐의도 없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는 것에 박수를 보내 왔다."
크루그먼이 보기에 오늘날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보다는 권위주의와 과두정을 선호하는 집단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오로지 미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아직도 미국이라면 덮어놓고 신 떠받들듯 하는 분위기가 잔존해 있는 우리나라인만큼 미국 사회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2008년 가기 전에 사서 읽자.
"I believe in a relatively equal society, supported by institutions that limit extremes of wealth and poverty. I believe in democracy, civil liberties, and the rule of law. That makes me a liberal, and I'm proud of it."
[나는 부와 빈곤의 양극단을 제한하는 제도들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비교적 평등한 사회를 믿는다. 나는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법치주의를 믿는다. 따라서 나는 리버럴인 셈이고, 나는 그게 자랑스럽다.]
맨 마지막 문장은 인용부호 밖으로 빼 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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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9/01/16 08:23이 책 라디오에서 소개하는 걸 들었는데
한 구절 한 구절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일부분만 들었는데도 정말 우리나라와 똑같다는 걸 느꼈지.
맨 마지막 문장은 나도 동감!!-
onecent
2009/01/21 20:06저도 읽는 내내 우리나라와 어쩌면 이렇게 상황이 비슷할까 놀랐죠; 그래서 더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교사로 삼기 좋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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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에 대한 찬양
얼마 전부터 만화 ‘마스터 키튼’을 사 모으고 있다. 한 권 한 권씩 포장비닐을 뜯어 읽고 나서 책장에 차곡차곡 꽂아 넣으니, 만화가 재미있는 건 물론이요, 일산에 이사 오면서 새로 산 책장 한 칸이 조금씩 채워져 나가는 걸 보는 재미도 만화 못지않게 쏠쏠하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만화 가운데서는 ‘마스터 키튼’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 여러 개의 짤막한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잠깐 보고 금방 책을 덮을 수 있어서 좋고,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점이 무엇보다 좋다. 게다가 우라사와 나오키 특유의 둥글둥글하고 오버하지 않는, 설득력 있는 그림체가 그 내용과 잘 어울린다(만약 이 만화의 그림체가 수박만한 눈동자에 종이가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콧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순정만화 그림체였으면 이 만화는 부조리 그 자체가 되어 버렸을 거다).
‘마스터 키튼’ 3권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곧 폐교될 처지에 놓인 한 사회교육원의 마지막 강의의 마지막 시간, 강의를 맡은 주인공 키튼이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학교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계속 공부해 달라는 겁니다. 사실 저는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자신감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지내던 중에 깨달았습니다. 공부할 정열이 있는 한…강의할 학교를 잃더라도 공부를 계속해 갈 겁니다.
인간은 왜 공부해야 하는 걸까요?
인간은 평생 계속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직책을 위하여나, 출세해서 장관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 왜 공부해야 할까요? …그게 인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느 때처럼 연수원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독서실에 갈 채비를 마치고 잠깐 만화나 보자는 생각에 책을 집어든 거였는데, 이 대목에서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질 못했다. 인간은 왜 공부해야 할까? 나는 대체 왜 그놈의 ‘공부’를 하러 이리도 급히 낑낑대며 독서실에 가야 하는 것일까?
난 키튼이 마지막에 제시한 저 답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게 무슨 인간의 ‘사명’인 건 아니다. 게다가 ‘왜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게 사명이니까’라고 대답해 봐야 그건 ‘해야만 하니까 해야만 한다’라고 순환논법으로 대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다’라는 저 말이야말로 가슴에 와 닿는다. 호기심, 아는 기쁨. 그것이야말로 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까.
호기심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활기 넘치게 하는지. 우리는 그걸 너무 잊고 산다.
사는 데가 바로 그 근처인지라 웨스턴돔 분수광장을 뻔질나게 왔다갔다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늘 보게 되는 건 분수를 보며 깔깔대면서 분수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이다. 일산으로 이사 오기 전, 신림동에 살면서는 주변에 온통 고시생, 대학생뿐이었지 어린아이들을 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일산에는 엄마아빠 손잡고 나들이 나온 아이들이 많은데, 아이들은 분수광장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대체 저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쉴새없이 뛰어다니고 숨 넘어갈 듯 깔깔대는데도 애들은 마냥 분수가 즐겁기만 하다. 보는 어른들이 먼저 지칠 지경이다. 내 친구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애들은 어른들 에너지를 다 빨아먹는다’라고. 그렇다. 어른들은 애들 노는 거 쫓아다니는 것도 힘들다. 애들은 아무리 해도 안 지치고 어른들만 지쳐가니, 어떻게 보면 정말 아이들이 어른들 에너지를 빨아먹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냥 어리니까, 더 젊으니까 에너지가 더 많은 걸까? 그렇지만 근력, 근지구력 어느 것 하나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훨씬 더 센데?
어린아이들은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 아닐까. 주변에 온통 처음 보는 것들, 새로운 것들 뿐이니까, 신기한 것들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하면서 매 순간 ‘아는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는 신기한 게 점점 줄어든다. 어차피 어디선가 본 거고, 들어본 거고, 해본 거다. 매사에 신기할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냉소다. ‘피, 그까짓 것’, ‘원래 그런거야’, ‘당연히 그런거지’ 라고 내뱉는 경우가 늘어갈수록, 우리는 호기심을 버리고 그 자리에 냉소를 채워넣는다. 그리고 냉소가 늘어갈수록 우리 삶의 에너지는 사라진다. 매사에 시큰둥, 신기할 것도 없고 흥미로울 것도 없으니 굳이 몸을 움직여 보고 느끼고 하고 싶은 생각이 생기질 않는 것이다. 어느새 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렇게 종일 침대에 누워 있으면 휴식 덕에 에너지가 충전이 돼야 할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누워 있을수록 더 기력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냉소는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 녀석은 무기력을 데리고 온다.
2004년, 대학에서 양창수 교수님의 채권각론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께서 어느 날인가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라는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 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미국의 천재(이자 괴짜) 물리학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쓴 일종의 수필집이었다.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 그러나 브라질의 리오 카니발이 좋아서 매년 브라질을 찾는 사람, 거기서 북 치는 법을 배워가지고는 수준급 연주자가 되기도 하는 사람. ‘물리학을 가지고 노는’ 사람. 기인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파인만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삶이 에너지로 가득차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정말 장난꾸러기 어린애 같았고 무엇보다 그는 호기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나 계속해서 등장하는 문구는 “그건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었다!!”는 그의 감탄사다. 난 바로 그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파인만에게 세상은 신기한 것들로 북적대는, 매 순간 아는 기쁨을 주는 거대한 놀이터였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런 건 몰라도 돼’라거나 ‘그런 건 필요없어’ 라는 말을 너무나 손쉽게 내뱉으면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알아야만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만 몸을 억지로 억지로 움직인다. 그렇게 ‘알아야만 하는 것’만 간신히 알아두고, ‘필요한 것’을 꼭 필요한 만큼만 하면서 산다. 꼭 알야아만 하는 것만 알고 꼭 필요한 것만 하는데도 삶이 그렇게 지치고 힘들 수가 없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뒤집어 보자. 알아야만 하는 것만 알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삶이 지치고 활력이 없어지는 것 아닐까? ‘그런 건 몰라도 돼’라는 냉소적인 태도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의 분류다. 그리고 그 분류의 기준은 저 멀리 어딘가에 놓여있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목표다. 대학입학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기 위해서, ‘임관’을 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이렇게 미래의 목표를 기준으로 앎의 대상을 분류하는 순간, 그 앎의 대상 자체가 갖는 매력은 증발한다. ‘아는 기쁨’ 따위는 싹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현재, 지금 이 순간 내가 머리를 싸매고 하고 있는 ‘공부’는 한같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수단으로 전락할 때, 아는 기쁨 대신 남는 것은 무기력과 억지로 이 순간을 버티며 핑계거리로 내세우는 ‘인내’뿐이다.
얼마 전, 38기 연수생들은 4학기 민사재판실무 시험을 치르고, 39기 연수생들은 민사재판실무 기록을 붙들고 씨름을 하던 날이었다. 친구 몇과 함께 독서실 세미나실에 모여앉아 되도 않는 주장 되는 주장 가리지 않고 대여섯 개나 항변(등)을 퍼부어 놓은 피고를 원망하며 끙끙거리다가,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한 친구 녀석이 잠깐 밖에 나갔다 오더니만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들여다보니 38기 민사재판실무 수시평가 자료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만, 어떤 사람이 독서실 폐휴지함에 38기 민사재판실무 기록더미 전체를 버리고 갔더라는 것이었다.
그 38기 연수생분의 심정은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4학기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는 안도감, 앞으로 지긋지긋한 저 기록더미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가득했을 것일 테다. 슬몃 부러움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찝찝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람에게 그 민사재판실무 기록더미는 시험을 보기 위한 수단 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 이름 모를 연수생 분은 기록뭉치에 적혀 있는 깨알같은 글자들을 졸음을 참으며, 눈을 비비며 들여다보고 밑줄을 치고 별표를 그려넣으며 보냈던 그 많은 시간들이 시험을 본 날 이후로는 다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음을 자인한 꼴이 되어 버린 것 아닌가.
그렇게 쏟은 지나간 시간들이 시험을 본 다음 날 이후까지도, 나아가 영원히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쏟는 매 순간 순간을 미래의 무엇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 자체를 위해서 써야 한다. 그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 물론 복잡하고 난해한 기록을 보면서 대체 뭐가 어떻게 즐거울 수 있냐고 당장에 반론이 들어오겠지만, 키튼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누구나 아는 기쁨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에는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새로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것은 그 앎의 대상이 분수의 물줄기가 되었든, 사법시험에서 나를 괴롭혔던 어음법이 되었든, 판결문 주문 쓰는 법이 되었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되었든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냉소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이 삶에서 진지함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재의 상황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면 그 자연스런 결과로 그 현재의 상황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게 된다.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라는 냉소적인 태도는 결국 현재에 온 힘을 다하지 않게 만든다.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진정한 성취감도 없고 진정한 아쉬움도 없다. 일이 잘 돼도 요행일 여지가 크니 진심으로 성취의 기쁨을 느끼지도 못하고, 못 돼도 언제나 변명거리가 남아있으니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도 없다. 무덤덤하고 그만큼 무기력한 삶의 연속일 뿐이다. 요즈음 팽배한 정치적 냉소주의 역시 이와 비슷한 결과를 불러오고 있다. 내가 찍질 않았으니 국회에 가서 앉아 있는 사람이 잘 해도 그건 어쩌다 그렇게 된 것 뿐이라서 정치적 성취감이 없고, 못 해도 그땐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냉소적 거리두기 탓에 비판과 개선의 노력은 자라날 틈이 없어진다.
호기심이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눈(또는 ‘프레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면, 냉소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냉소로 가득찬 사람은 의문을 품지 않고,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다.
대법원의 판례를 대하는 태도를 예로 들어 보자. 대법원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제기된 의문에 반론을 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문을 제기한다는 사실 자체에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난 이런 사람도 실제로 보았다), 의문을 제기하든 말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대법원의 판례도 여러 가능한 해석론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제기된 의문에 반론을 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의문을 가질 줄 모르는 사람은 그에 대해 반대 견해를 피력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데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네 번째 부류의 사람보다는 낫다. 화를 낸다는 건 최소한 판례의 태도에 대해 진지한 애정은 있다는 걸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아예 의문이 있든 말든 신경을 안 쓰는 사람, 즉 냉소적인 사람은 그 최소한의 진지함마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 부류의 사람에게 건전한 비판을 통해 발전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네 번째 부류의 냉소적인 사람에게는 그 가능성마저도 없다. 냉소는 무비판적 수용을 부르고, 무비판적 수용이 유행할 때에는 어떠한 발전도 없다. 만연한 냉소는 결국 영구적 답보상태만을 낳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연수원의 교육과정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는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험과 평가, 그리고 그에 따른 성적부여라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가시적인 미래의 목표가 놓여있는 탓에 아무리 애를 써도 현재의 시간은 그를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고 마는 구조적인 문제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해야 한다’에서 벗어나서 ‘왜 그런가’ 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 볼 기회 자체가 별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못내 아쉽다(검찰 사례연구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보라’고, 직접적으로 호기심에 문을 열어 준 과제가 나왔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
다시 ‘마스터 키튼’ 이야기를 하자면, 한 권 한 권 읽으면 읽을수록 이 만화는 ‘아는 기쁨’이 주는 생명력과 삶의 활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키튼은 ‘저는 아직 알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살인을 결심한 어느 학생은 동급생인 키튼이 학교 벽에서 화석을 발견하고 눈을 빛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광경에서 감화를 받아 살인을 포기한다. 어쩌면 현재를 아직 오지 않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에 담보잡히지 않고 현재 그 자체로서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가장 훌륭한 원동력이 바로 호기심이 아닐까.
거울을 바라보고 서서 스스로를 들여다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냉소란 녀석이 마음 한켠을 잠식해 들어와서는 어느새 그 그림자를 크게 드리우고 있었다.
마음 속에 들어와 앉은 냉소를 털어버려야겠다.
그러면 그 녀석과 함께 스리슬쩍 찾아와 자리잡고 앉아 있던 무기력도 함께 나갈 것이다.
빈 자리는 호기심으로 채우자.
그러면 ‘아는 기쁨’이 덩달아 찾아들 것이다. 틀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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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 Kim
2008/11/03 13:54마스터 키튼을 주제로 이렇게 길고 철학적인 이야기꺼리를 끄집어내다니...^^
삐뚤어진 열정은 냉소보다도 해롭지만, 기본적으로 삶에서 호기심 - 난 이것을 '열정'이라고 보는데 - 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는 호기심 또는 열정에의 동경은 있는데 게을러서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듯~-
onecent
2008/11/14 01:08살아가는 데 열정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싶어 요새는 진짜.
열정을 잃으면 곧 늙어버렸다는 것과 다름없겠지.
뭐든지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야겠어. 열심히 실패하고 열심히 좌절하는 게 어영부영 물타기하면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을테니까..
나도 게을러서 탈이야. 이렇게 글 쓰면서 스스로 돌아보고 하는수밖에 없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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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yo
2008/11/11 20:14안녕하세요. 사법시험 공부 중인 학생입니다. 신림에서 집이 있는 일산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어 독서실을 검색하던 중에 님의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연수원생이신 분의 글이라는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지만 읽는 도중 저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멋진 글이네요. 멋진 생각이고요. ^^
말씀하신 대로 냉소는 나이를 먹으면서 무기력과 함께 저도 모르는 사이 젖어드는 것 같습니다. 아무 의문도 가질 필요 없고 그러니 자신의 한계를 절감할 필요도, 노력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게 만들어주는 편리한 태도지요. 덕택에 저도 시험을 위한 공부라는 생각에 최소한의 의문조차 떨쳐버린, 무기력한 암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onecent
2008/11/14 01:11안녕하세요.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사법시험 공부란 게 지극히 목적적이라..공부 자체에 흥미를 갖고 해 나가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특히나 암기에 치우치게 되는 1차 시험이 더한 것 같구요(저 같은 경우는 2차 시험준비가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지루한 공부를 하고 계신다니 진심으로 건투를 빌겠습니다.
제가 글에서 쓰진 않았지만 연수원은, 시험의 압박이 큰 건 틀림없지만 꽤나 재미있는 곳입니다. 꼭 합격하셔서 연수원생활도 재밌게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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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
2008/12/15 10:18이렇게해도 알아?ㅋㅋ다들 실명안쓰니까 나도 따라해봤어.
어제 감동받아서 여기 와서 예전에 읽었던 글들 다시 보면서 혼자 새삼 감동받고 있어.(그럼 공부는 언제?;;;;;)
그치만 이런 시간으로 인해서 마음속에 잠시 덮어놓았던 불꽃이 조금씩 다시 생겨나면 그게 더 좋은거겠지?(라고 위로를..ㅠ)
히히. 진짜 좋은 친구야. 넌.
너도 주위사람들에게 열정.을 전염시키는 사람이야^-^-
onecent
2008/12/21 11:57쉴 때 쉬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해야 공부도 잘 되는거지. 쉴때 너무 죄책감 느낄 필요 없다고 봐 난.ㅎㅎ
열정을 전염시키는 사람이라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과찬이구나. 나도 분발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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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9/01/16 09:15고맙다. 나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
열정 바이러스의 숙주. 맞구만. ^^
너도 그런 마음 늘 잊지 말고.
언제 시간 날 때 만났음 좋겠네.
(실제로 보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서먹할 듯)
요즘 무척 추운데 건강하고~-
onecent
2009/01/21 20:08열정 바이러스의 숙주. 멋있는 표현인데요.ㅎㅎ
물론 아직 저한테 어울리는 말 같진 않습니다만;
저도 언제고 한 번 뵜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오프라인에서 보는 건 처음 아닌가요?
형하고는 온라인상으로밖에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사포동 시절에는 오프모임에 거의 안 나갔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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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내쉬와 마이크 댄토니 시대...이제는 끝
http://sports.espn.go.com/espn/page2/story?page=simmons/080501
지난 몇 년간 내쉬와 댄토니를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다음에는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서, 마지막에는 참기 힘든 안타까움으로 바라본 팬으로서 참 가슴이 아프다.
스포츠계의 성폭력 관행, 기가 찬다
"운동만 가르치나, 밤일도 가르쳐야지."
"문제가 불거지면 납득이 가도록 일관성있게, 공평하게 징계하면 된다. 그러나 체육단체 중에 그런 곳은 매우 드물다. 왜? 그 밥에 그 나물이니까. 결국엔 '우리가 남인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넘어간다."
기가 찬다.
샤크, 제발 회춘해다오
게다가 그런 매리언을 내 주면서 얻어온 상대는 서른 후반에 접어든 샤킬 오닐이다. 전성기 때야 "지구를 걸고 외계인과 농구시합을 벌인다면 가장 먼저 내보낼 선수"였지만, 몇년 전부터 눈에 띄게 움직임이 둔해졌고 전보다 더 부상에 자주 시달렸다. 게다가 올해는 정말 이제는 오닐도 끝인가보다 싶을 정도로 막장 몸놀림을 보여 줬었다(그리고 마이애미는 현재 리그 최하위 성적을 자랑하고 있다).
오닐의 전성기 때 스피드라면 선즈의 빠른 템포 농구에 잘 적응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오닐이라면 선즈의 그 미친 듯한 페이스를 따라잡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선즈는 스타일 그대로 유지하겠다느니 어쩌니 하지만 어느 정도의 템포 감소는 불가피할 듯하다. 현재 선즈에게 있어서 최상의 시나리오는 오닐이 예전 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의 카림 압둘자바 역할을 (부상 없이) 효과적으로 수행해 내는 것이다. 오닐이 갑자기 2001년으로 회춘해서 40-20을 찍어내는 건 기대하지도 않는다. 내쉬 시대의 선즈의 고질병이자 올해 서부의 센터진이 강화되면서(가솔 트레이드가 결정타였다) 유난히 눈에 드러났던 약점인 골밑 수비와 디펜스 리바운드 부재를 오닐이 해결해 주고, 뛰는 건 내쉬를 비롯한 나머지 네 명이 하는 형태의 농구가 아마도 선즈가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 그리고 (직접 보진 못했지만 듣기로는) 77년 빌 월튼의 블레이저스가 썼던 스타일이다.
내쉬 시대 선즈가 90년대의 지루한 반코트 농구를 뒤엎고 빠른 템포와 패스워크 위주의 '재미있는' 농구로 워낙 많은 농구팬의 사랑을 받았던지라 이 트레이드에 대한 반응도 뜨겁다. 그리고 대부분은 "선즈가 그들의 스타일을 버리고 지루한 농구로 되돌아간다"는 데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의견이다. "지루한 농구를 몰아내기 위해서라도 선즈는 자기들 스타일로 우승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어야 한다"면서 일종의 배신감 비스무레한 감정을 토해내는 칼럼까지도 봤다. 그리고 쏟아지는 글들의 절대 다수가 오닐이 피닉스 적응에 실패할 것이며 피닉스는 도박에서 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내용이다.
나 역시 그런 비관적 견해가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고, 그 탓에 내쉬와 선즈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몹시도 불안하다. 제발 이 도박이 잘 먹혀들어갔으면 하는 게 내 심정이다. 나이든 센터들은 코트를 위아래로 뛰어다니는 게 반코트 게임에서 몸싸움 하는 것보다 덜 힘들다는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고, 비관론자들의 말이 오닐의 분노게이지를 채워서 평소 몸관리에 게으르기로 유명한 오닐이 자극 받아 미친 듯이 몸관리에 열중했으면 좋겠다.
제발 회춘해다오, 샤크. 내쉬 반지 한번 껴 보자.
[+] 그 와중에 빌 시먼즈는 트레이드를 지지한다는 취지로 칼럼을 썼다. 시먼즈는 좋아하지만 이 사람 예측이 그리 잘 들어맞는 건 아니다. 따라서 여전히 불안한 건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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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마
2008/02/19 17:29어차피 샌안이랑 붙을때를 대비한건데
플옵에서는 속공은 여지없이 막히고 하프코트로 가는 상황이 많았으니 그때 선즈를 마냥 속공팀이라 하긴 뭐하지
정규시즌이나 다른 팀과 붙을때는 오닐이 반에반값만 해줘도 이길수 잇고
샌안과 붙을때 리바운드 안 털리게 오닐이 서있기만 해도 아마레는 날라다닐 테니 난 기대가 무척되는걸
다만 흑돼지가 건강하다는 전제아래...
어차피 던컨만 넘으면 우승이니까.
하긴 보스턴은 좀 걱정되는...-
onecent
2008/02/19 22:51결국 모든 건 오닐의 건강에 달려있어...
심히 불안하다 진짜. 제발 살 좀 열심히 빼 주면 좋겠다.
많이 바라지도 않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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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법이 전 시사저널 기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패소한 (주)독립신문사가 항소를 할 지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반가운 소식이다.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 알게 된 뒤 시사IN을 꾸준히 사서 보고 있는데, 태생부터 삼성과 싸우면서 시작한 잡지다 보니 최근 삼성과 관련된 이야기는 어느 언론보다도 열심히 보도하고 있다. 원래부터 삼성에 악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런 거 아니냐..라는 이야기도 들려 오지만, 대다수의 언론이 삼성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시사IN의 (지나치다고 느껴질 정도로) 적극적인 외침이 오히려 절실히 필요한 것 아닐까.
이제 3월부터는 정기적인 수입도 생기고 하니까 시사IN 정기구독도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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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lian
2008/01/31 00:46솔직히 난 삼성에 호의적인 사람이지만 삼성이 언론을 관리한다는 건 네이버 스포츠란만 봐도 알 수 있는 것 같아(내가 스포츠뉴스만 보는게 들통나는 건가ㅎ) 시사저널 기자들의 소식은 예전에 mbc의 피디수첩에선가 본 적이 있는데, 시사N이라는 잡지가 출간되고 있는지는 몰랐네. 어쨌든 정의는 살아있는건가?ㅋ
스타리그 준플레이오프 CJ vs. 온게임넷 7차전
아..진짜. 감동의 도가니. (이건 1차전부터 다 봐야 한다)
왜 스타리그 팀들은 선수들 저지 만들어서 팔 생각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마재윤 저지라면 기꺼이 사 줄 의향이 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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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cent
2008/01/13 02:20배경음악처럼 계속 반복되는 성대결절 일보직전의 절규..
아무래도 맨앞줄에서 아드레날린 주체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방방 뛰는 남자분인거 같은데... 그 흥분 이해는 하지만 좀..ㅎ -
GUna
2008/01/15 02:36니 포스트에서 본것중에 제일 웃긴것 같다.
(내용이 웃기다는게 아니라 이걸 올렸다는게;; )
나 이거 울면서 2번봤어..(독서실 지하 휴게실에서...)
마재윤도 울고 나도 울었지..
선수단 져지 파는팀도 있던데ㅎ
길에서 입고 다니기엔 심히 부담스러운게 문제지=_=
김홍령은 2008년 프로게이머 다이어리 살거라더라 ㅋㅋ
너도 CJ껄로 사라 ㅋㅋㅋ 15000원이란다 ㅋㅋ-
onecent
2008/01/16 11:00저지 파는 팀도 있어?
그래 봤자 그냥 선수들이 입는 유니폼하고 같은 디자인의 옷을 파는 것일테지? 내 생각엔 선수마다 뒤에 이름 박아서 자기 이름 달린 유니폼을 입고 다니고, 그걸 파는게 좋을 거 같은데..
CJ 옷 그냥 입고 다니는 건 별 의미가 없어. 내가 서지훈 응원하는지 아니면 박영민을 응원하는지 표가 안 나잖아. 등에 마재윤이라고 찍혀 있어야 돼..
왜 진작에 이게 판매가 안 됐을까? 아직은 프로게임 시장이 크지 않아서 수지가 안 맞나? 내 생각엔 장사가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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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cent
2008/01/17 18:29아..형은 김택용을 응원하시는군요..
마빠들 최대의 적 김택용..-_-+
전 김택용 이유없이 재수없어서 싫어하지만 솔직히 실력은 인정합니다. 그 2차전 경기 진짜 대단했죠; 초반에 밀리나 싶더니만 오버로드 싹 쓸어버리고는 역전.
이번 토요일에 리더와 저는 희비가 갈리겠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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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lfish Gene (이기적 유전자)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얻은 느낌이다.
이제껏 그 이름은 무수히 듣던 책인데, 왜 이걸 이제서야 읽었을까 후회가 크다.
도킨스는 세상에 있는 생명체들의 행태를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관점을 제시해 준다.
이 행태가 대체 그 행태를 하게끔 하는 유전자의 재생산(복제)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또, 어떤 한 생명체의 행태가 과연 어느 개체의 유전자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가? (가령 한 개체의 행태가 그 개체가 보유한 유전자가 아닌, 그 개체에 기생하는 다른 개체의 유전자 때문에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더욱더 흥미진진한 것은 이와 같은 관점 - 세계를 이해하는 창 - 이 비단 유전자와 그 유전자들이 만들어 내는 세계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전자가 생명체를 구성하는, 진화론이 작동하는 기본 단위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스스로를 복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복제하는 존재라면 어느 것이든지 진화론과 자연선택의 적용대상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문화적 산물들 역시 그것이 복제 가능한 이상 진화한다. 인간의 문화적 산물로서 복제 가능한 최소 단위를 도킨스는 유전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gene'과 운을 맞추어 'meme(밈)'이라고 명명한다.
밈의 진화가 유전자의 진화보다도 더 흥미를 끄는 것은, 진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는 돌연변이가 유전자와는 달리 인간의 의식적인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우리 맘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내 후손들에게 어깨 위에 돋아난 날개를 달아 주고 싶다고 해도 그런 형태로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는 것은 (적어도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밈의 변형은, 인간의 의식에 존재하는 밈의 성격상 당연한 것이겠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유전자가 영원한 것처럼, 밈도 영원하다. 게다가 개체동일성이란 측면에서는 유전자보다 밈이 더 우월하다. 몇 세대만 지나면 현재의 '나'를 구성했던 유전자들은 무수한 조각으로 쪼개져서 흩어져 버리지만, 내가 만들어낸 밈은 영원히 내 이름과 함께 보전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정복왕 윌리엄의 직계 후손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는 그 옛 왕의 유전자 가운데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생식에서 불멸을 찾아서는 안 된다.훌륭한 책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쓰여질 것, 그러면서도 깊은 내용을 담고 있을 것, 그리고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것.
그러나 만약 세계 문화에 기여한다면, 즉 좋은 생각(idea)이 있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스파크플러그를 발명하거나, 시를 쓰거나 한다면, 유전자가 공통의 풀(pool) 속으로 흩어져 버리고 난 한참 뒤까지도 그것은 모양을 유지한 채 살아나갈 수 있다. G.C.윌리엄스가 말한 것처럼, 오늘날 소크라테스의 유전자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가? 소크라테스, 레오나르도,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마르코니의 밈 구조물들은 아직도 튼튼하게 살아 있다." (p.199)
그렇다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틀림없이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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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cent
2008/01/16 12:18나도 그 책 봤어. 그 책도 아주 재밌었지..
근데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봐야 더 이해가 잘 될 듯.
그 책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설득당하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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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a
2008/02/03 07:02어머!
웅재오빠 안녕하세요, 저 기인입니다.
기억이나 하시려는지? 하하.
친구가 책 재밌다고 해서 검색하다보니
오라버니 블로그가 나오던데요 :)
오랜만에 반가워서 불쑥, 남기고 가요.
잘 지내시죠? ^^-
onecent
2008/02/03 20:47아니 이게 누구야! ㅎㅎ
진짜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뭐하고 사니ㅎ
아직도 해외생활중?
인터넷이 좋긴 좋구나. 이렇게 끈이 닿기도 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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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a
2008/02/03 21:58아하하,
포스트와 상관없는 리플을 주르륵 달아도 되나 잠시 고민을,,,
저는 뭐, 여전히 혹은 아직도 혹은 앞으로도 한동안은
독일에서 학생신분으로... :-)
친구들은 다 졸업했거나 얼마 안남겼거나 그러는 중인데
저는 아직 한참 남아서 까마득해요;;;
정말 어제는 순간 너무 반가웠다니까요.
검색창 아래에 뜨는 주소가 낯익어서 하하.
종종 놀러올게요~^^
말과 동기를 분리하자
일종의 브레인스토밍. 사실은 지금 떠오른 생각을 까먹지 않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그 사람이 무슨 동기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건 컨텍스트를 고려하는 것.
그러나 우리는 일차적으로 텍스트를 고려해야 한다. 발화된 내용의 의미를 해하는 것, 그리고 화행위 자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이 둘은 일차적으로는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삼성의 비리를 폭로한 김용철변호사의 폭로 동기를 문제삼아서 삼성의 비리까지 아무 문제가 아닌 것처럼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이명박 후보에 대한 의혹 제기가 이른바 '정치공작'이라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의혹이 해명될 필요조차 없는 게 되는가?
물론 한편으로는 컨텍스트를 고려하는 것이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음...무조건 말과 동기를 분리하자고만 하는 건 타당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좀더 생각을 해 봐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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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공방
2007/12/06 03:1310,000명이 넘게 보신 동영상을 아직 못 보셨나요??
지금 불똥닷컴 www.blddong.com 에 가시면
아직 공개되지 않으 이명박BBK 창업당시 인터뷰 장면을 보실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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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cent
2007/12/16 22:18이건 아마 윗 글에 댓글이 달려야 맞겠죠?
연수원 교수님들 중에는 검사도 있는거 아닙니까;
직업 조사좀 해 보고 걸지..-_-
방법 생각해 낸 거 보면 머리 좋은 거 같은데 또 지금 보니까 멍청해 보이기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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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코리아 연방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http://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1125133035
'미워도 권영길'이냐 '적극적 기권'이냐의 기로에서 고민한 끝에, 나는 민주노동당에 표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내 표는 권영길에게 주는 표가 아니다. 2007년 현재 대선 정국에 임하는 민주노동당의 입장에 던지는 표도 아니다. 어쨌든 좌파 정당이 필요하다는 내 의사를 한국 사회에 표현하고자 던지는 표다. 그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나는 이 글에서 민주노동당의 주요 대선 공약(?) 중 하나인 '코리아 연방제'를 호되게 비판할 생각이다.
헌법에 어긋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코리아 연방제에 대한 비판의 논거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그저 통일 정책 중 하나에 불과한 그것이 어떻게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를 바라보는 민주노동당의 시각을 총괄하는 구호가 될 수 있느냐는 것. 그리고 둘은 그것이 결정되는 과정이 민주주의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합당한 말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 말을 하려고 글을 쓰고 있지는 않다. 나는 코리아 연방제가 통일 정책으로도 엉터리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일단 코리아 연방제는 헌법에 어긋난다. 이 점은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에서 박세일이 명백하게 지적했다. 헌법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천명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1국가 2체제를 지향한단 말인가? 박세일의 말을 인용했으니 네 주장은 무효라는 외침이 벌써 내 귀에 들려오는데, 한나라당원이 말했다 해도 진리는 진리다. 박세일 정도에게 발릴 정책을 정책이랍시고 들고 나와서 설치는 민주노동당 꼴이 한심할 따름이다.
민주노동당은 이게 헌법적 문제라는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만일 인지라도 했다면 "우리의 정책은 헌법의 개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지해 주십시오."라고 유권자에게 호소해야 정상이다. 알고 있었는데도 그렇게 안 했다면 개념이 없는 것일 테고. 그들은 그냥 두루뭉수리하게 사람들이 이걸 좋은 거라고 생각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같다. 그렇게 나이브하게 정치할 거면 정치 때려치워라. 진보정치연구소장 조승수의 말처럼 코리아 연방제는 "우린 꼴통 운동권이요"라고 전 민중 앞에 선언하는 꼴이다.
더 큰 문제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개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좀 있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하는 헌법 조항을 개정해야 성립할 수 있는 정치적 주장을 하게 될 텐데, 이 조항과 그 조항은 위상 자체가 다르다. 민주주의 국가가 자신이 민주공화국임을 부인하고서도 존속할 수 있는가? 그게 법리적으로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한 논변을 굳이 찾아내라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법실증주의적 논변밖에 없을 텐데, 그것은 바이마르가 공화정을 통째로 히틀러에게 갖다 바친 이후엔 법철학계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논변이다. 민주주의 체제에 동의하는 한, 코리아 연방제를 구원할 지적인 논변은 이 세계는 물론 가능세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통일이 아니라 평화 체제 구축이 답이다
그럼 어쩌라는 말이냐, 통일하지 말자는 말이냐는 외침이 벌써 내 귀에 들려온다. 바로 그거다. 내 얘기는 통일하지 말자는 거다. 극우파들이 꿈꾸듯 민주공화국의 정체를 북한에 강요하는 식의 제국주의적 흡수 통일은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지 못한다. 그렇게 싸가지 없는 짓을 하다간 북한을 송두리째 중국 공산당에 넘겨줄 우려조차 있다. 이렇게 한국 극우파들은 심지어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할 만큼 멍청하다. 한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부인하는 과도기적인 통일 방안을 실천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통일을 안 하면 된다.
지금 돈 많이 들고 나 가난해지니까 통일하면 안 된다고 '징징'대는 멍청한 냉소주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분단 비용'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과도한 군비 경쟁, 이산가족 문제, 북한 주민의 굶주림 등)은 실은 '적대 체제 비용'이다. 대한민국이 헌법을 개정하고, 북한을 별개의 외국으로 인정하며, 중국식의 개방화 노선을 채택하는 공산주의 국가 북한을 같은 언어를 쓰는 이웃으로 지원하고, 점진적으로 양국의 주민이 교류할 수 있게 만들면 끝나는 문제이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유일하게 가능한, 언어유희를 좀 부려보자면 '통일을 욕망하지 않는 통일 방안'이다. 극소수의 주사파를 제외하고는 대한민국이 북한 공산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통일을 향한 욕망은 대한민국에 북한을 편입시키겠다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욕망일 뿐이다. 그건 윤리적으로도 그릇되었을 뿐더러, 그 욕망을 실현시킬 수도 없다.
대한민국은 북한의 동반자로서, 북한의 경제 발전에 투자하는 최대의 주주가 됨으로써, 북한 인민의 복지를 향상시키고, 소수 민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북한 땅을 넘볼지도 모르는 중국의 야욕을 분쇄해야 한다. 만약 이런 식의 평화체제가 구축되어 먼 훗날 남북한 국민의 사고방식이 비슷비슷해지고, 북한에서도 사실상의 민주화가 진행된다면, 그때 가서 굳이 두 집 살림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합치도록 하자, 는 식의 통일 논의가 가능할 수 있다. 그런 것이 통일이다. 우리 머릿속의 통일 강박증을 없애버려야 올 수 있는 바람직한 통일이다. 지금 '통일', '통일'거리는 것은 싸우자는 얘기다. 누구랑? 북한이나, 혹은 중국이랑.
그러므로 통일이 아니라 평화체제 구축이 정답이다. 백낙청과 최장집이 논쟁을 하고 있으면 최장집 편을 들면 된다.
왜곡된 민족 정체성 그만 좀 주입시켜라
지금까지 한국의 민족주의에서 '민족'이란 아직 오지 않은 노스탤지어였다. 친일파 척결 실패, 대미관계 종속,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두 가지 사안과 어느 방향으로든 인과관계를 지니고 있는) 민족분단으로 인해 우리의 '민족'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민족주의는 그 오지 않은 민족의 형성을 위해 '우리'가 복무해야 한다는 그런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가장 과격한 판본의 민족주의는 민족모순이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이며, 하나인 우리가 갈라져 있는 한 우리는 반쪽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 위에 '통일'에 대한 그들의 강박도 생긴다. 지금 민주노동당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이들의 정신세계가 그렇다.
헛소리하지 마라. 반쪽인 건 민족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정신상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꼭 대한민국을 꼬박꼬박 남한이라 부르며 국가가 반쪽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 든다.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을 남한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른 지식인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별 꼴이 반쪽이다.
혈통이 같은 집단이 두 국가로 갈라져 살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비정상적인 질문이다. 나는 상식적으로 답하겠다. 아무 일도 안 생긴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보라. 아무 문제없지 않은가. 심지에 벨기에 인은 과거에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통일'된 국가였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네덜란드가 벨기에를 부당하게 통치'했다고 생각한다. 혈통이 같아도 국가는 다를 수 있다. 어떻게 그 사건이 그 자체로 사회문제를 만들 수 있다는 걸까.
'근대적 민족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런데 우리에겐 '민족'이 없으니 일단 통일부터 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얼마나 웃긴 이야기인가. 그는 '민족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하나의 민족을 제시하며 일단 이것부터 만들어내라고 생떼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그들보다는 차라리 붉은 악마가 '근대적 민족국가'를 만드는 여정에 가까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남한'이라고 외치지 않고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니까.
붉은악마가 민족을 호출하고 있다면, 여기서의 민족은 그 형성되지 않은 민족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대ㆍ한ㆍ민ㆍ국'이라는 구호로 집약되듯이 국가의 구성원, 혹은 국가의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민족을 불러낸다. 그것은 하나의 국가와 그 정체를 온전히 드러내는 하나의 단위를 말한다. 전후세대는 드디어 7000만 명의 오지 않은 민족 대신 실존하는 5000만 명의 민족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의 선택이 차라리 서구 담론에 나오는 '근대적 민족국가'의 개념에 부합한다. 국가가 있고 그 형상으로써의 민족이 있는 거지 여기 민족이 있으니 이것에 입각해서 국가를 만들자는 그런 논변은 세상에 없다.
'통일'에 대한 자신의 '페티시'가 무슨 학술적 토대 위에 있는 것처럼 '근대적 민족국가' 운운하는 이들이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차라리 '전근대적 민족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의무라고 솔직하게 주장하라. 그들이 비유적으로 하는 말처럼 인간은 반으로 절단 나서는 살 수가 없다. "그러니까, 무조건 통일을 추구하자!" 그게 정답이 아니다. 정답은 정체성을 그따위로 주입하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반쪽이 아니다. 그냥 대한민국이다.
물론 당연히 하나의 국가를 열망하였을 해방 직후에는 분단이 사람들의 심리에 실질적인 좌절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과 남한의 대립과 전쟁은 분명히 역사의 아픔이다. 하지만 시간은 흐른다. 사람들은 변한다. 사람들은 익숙해졌다. 익숙해졌어도 우리는 반쪽이고 장애인이라고? 그래서 지금껏 우리가 만들어낸 것,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어떻게 그런 논변이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자칭 '민족주의자'에게 정말로 물어보고 싶다.
'근본 적대'는 없다… 헛소리하지 말라
민족문제를 '근본 적대'로 보는 데에 민주노동당 내 자칭 '민족주의자'의 세계관의 정수가 있고 대선정국에서 무식하게 '코리아 연방제!'를 외칠 수 있는 강단도 거기서 나온다. 일단은 근본 적대라는 개념 자체가 낡아빠졌다. 그것이 다른 모든 사회문제를 낳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근본 적대는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민족주의자의 논변은 근본적대에 관한 이론 중에서도 가장 한심하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근본 적대야 헤겔 철학에서 왔으니 적어도 지적으로는 완결된 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코리아 연방제의 지지자들이 말하는 근본 적대는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다. 운동원에게 물어보면 "우리 전위가 대답해줄 거예요"라고 하고, 그 전위라는 분에게 물어보면 헛소리만 해댄다.
이들이 그 자신의 알량한 이데올로기로 한국의 좌파 정당을 오염시켰다. 다른 이들에게 민주노동당 찍어달라고 말할 수도 없게끔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내 한 표를 민주노동당에게 주면서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언어로 그들을 규탄한다. 내가 아는 한 역사상 남을 씹는데 가장 유능했던 사람은 니체니까, 그의 <안티크리스트>의 몇 구절을 변형하겠다.
"나는 코리아 연방제의 지지자들을 한국 정치의 한복판에 떨어진 단 하나의 엄청난 저주라고 부른다. 단 하나의 엄청난, 가장 내면적인 타락이라고 부른다. 단 하나의 엄청난 복수 본능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악독하게 지하에 숨어 은밀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비소한 무리들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들을 한국 정치의 단 하나의 영원한 오점이라고 부른다."
| 한윤형/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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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cent
2007/11/30 20:28처음에는 누군가 했으나..
밑에 쓴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다면 자네도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겠지.
내가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을리가 없잖아.
다만 거의 백퍼센트 공감하는 글이라 퍼온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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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man
2007/12/01 20:44좋은 글이구먼. 나도 민노당에서 가장 맘에 안드는 것이 대북관련된 정책이었는데, 아주 속시원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글이네.
이번 대선, 한표 행사하기가 역설적 의미에서 너무 어렵군...
가장 좋은 건, 나중에 부끄러워할 만한 일은 아예 하질 않는 거다.
최대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면서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계획적으로 그리고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거다.
그러나 앞일을 널리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고, 365일 24시간 내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누구나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다.
이미 저지른 일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어찌할 도리가 조금이나마 있는 건 뒷수습 뿐이다.
그리고 난처한 일을 당했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뒷수습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솔직해지는 것이다.
솔직해지는 것,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뒷수습이다.
복잡하게 앞뒤 좌우를 맞춰 가면서 그럴싸한 거짓말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으니 간단하고, 그러나 멋진 옷으로 치장하고서는 거드름을 피울 수 있어도 알몸을 드러내면 한없이 부끄러워하듯, 허풍떠는 것은 좋아해도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 주기는 싫어하는 게 인간인지라 어렵다.
거짓말을 다시 거짓말로 가리려 하는 사례들이 요새 뉴스에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신정아부터 시작해서 주영훈, 최수종 그리고 정준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들에 앞서 황우석과 이영자가 있었다는 것도 잊지 말자.
처음부터 일단 '잘못했다' 한 마디부터 하고 변명을 시작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언제나 '아니다'로 시작해서 얄팍한 거짓말(그 얄팍함의 정도란 때때로 기가 찰 정도다. 정준하는 정말로 그 정도 거짓말이 통하리라고 생각한 걸까?)을 늘어놓고 증거를 들이밀면 '몰랐다'로 끝난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로 우롱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기억하는 것이다. 얼마나 자기가 뱉은 말에 책임을 안 지는 사람들이었는지를, 얼마나 뻔뻔스럽게 굴었는지를. 그리고 믿지 않아 주는 것이다. 그들이 수염 안 깎은 채로 병실로 실려가더라도, 헝클어진 머리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더라도, 화장 안 하고 눈물을 흘리며 억울함을 호소하더라도.
반드시 기억해 주는 것이다. 한동안 숨었다가 이때쯤이면 잊었겠지 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며 때지난 형식적인 사과를 하면서 다시 나타났을 때.
그리고 그 때마다 반드시 그들을 믿지 않아 주는 것이다. 비겁한 연극을 그치고 솔직해지기 전까지는.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한 이후에는 잘잘못을 정확하게 가려서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우면 된다. 다시 기회를 주고 다시 그들의 말을 말로 믿어 주는 건 그 뒤의 일이다.
쉽게 잊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나쁜 짓을 하고, 그게 드러나도 얄팍한 거짓말로 때우려 들기 십상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고, 책임을 물으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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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man
2007/11/12 23:34간만에 떠돌다가 들어와 봤는데 아직도 활동중이군.
우리사회가 거짓말과 룰을 지키지 않는 것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는데 나도 절대적으로 동감.
농구는 이렇게 하는 것
페니 하더웨이 복귀!
페니 하더웨이가 다음시즌에 마이애미 히트에서 뛰기로 계약을 맺었다. 2년에 걸친 복귀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마이애미는 선수 보강이 반드시 필요함에도 샐러리캡과 사치세에 걸려서 큰 돈을 쓰지 못해 이번 오프시즌에 줄줄이 자유계약 선수 영입에 실패하던 터였다. 모 윌리엄스도 놓치고 스티브 블레이크도 놓치고. 마이켈 피트러스도 붙잡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다 겨우겨우 건진 게 스무쉬 파커..-_-; 거기다 이번엔 서른여섯이나 먹은, NBA 코트 밟아본지 2년도 더 지난 페니와 계약했다. 어지간히 절박했나 보다.
다른 한편으로는, 팻 라일리가 믿는 구석이 전혀 없이 페니를 불러들일 리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페니의 복귀 성공에 기대를 조금은 해 봐도 좋을 듯싶다.
올랜도 시절에 결코 좋게 헤어지지 않았던 샤크와 페니가 재결합했다는 소식에 언론도 제법 시끌시끌하다.
마이애미를 응원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될 줄이야...
이쯤에서 예전 페니 모습을 다시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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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
2007/08/11 02:24페니의 복귀라니. 진짜 마이애미 응원해야하나;
요즘 복귀가 유행인가.
레지밀러 보스턴설에 이어서 앨런 휴스턴도 댈러스 복귀설이;
내년시즌은 더욱 볼만한 시즌이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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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cent
2007/08/12 19:40요즘 복귀가 유행인건 맞는거 같은데..
워낙 요새 기사거리가 없어서 작은 루머에도 언론이 과민반응하는 면도 있는 듯합니다..
휴스턴은 진심으로 복귀하고 싶은 모양이고. 레지밀러는 아직은 루머 수준이지만 글쎄요. 어떻게 될지. 근데 솔직히 페니나 휴스턴, 그리고 밀러가 지금 돌아와서 과연 얼마나 잘 할수 있을지는...말년 조던처럼 망가지기만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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