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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에 대해서, 음악과 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영화를 보여 줬다고 치자.
당장에 그 사람은 눈을 휘둥그래져서 이렇게 물을 것이다.
"저 사람 대단한 사람이지? 한 가닥 하는 사람이지?"

노래 좀 한다고 뻐기는 자, 춤 좀 춘다고 으스대는 자, 공연 좀 해 봤다고 재는 자.
그 시건방진 입을 다물라.


이런 영화로나마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그가 없어서 너무나 안타깝다.

This Is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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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5 23:37 2009/11/05 23:37







트랜스포머 2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9/10/27 00:34

금방 [트랜스포머 2 : 패자의 역습] 관람을 마쳤다.

이렇게 요란하게 때려 부수고 시끄럽게 쿵쾅거리는데도 지루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그게 감정이고 또 감동인 거지, 억지로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는다고 감정이 생기는 게 아니다.
메간 폭스한테 핫팬츠 입혀 놓고 일부러 야한 앵글로 줌을 당긴다고 섹시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요, 황혼을 배경으로 깔고 슬로모션으로 폭발 장면을 잡는다고 웅장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고, 쓰러진 주인공 주변에 침통한 표정으로 오열하는 가족, 애인, 친구들을 늘어놓고 (또) 슬로모션으로 그 주변을 빙빙 돌린다고 감동이 생기는 게 아니다.

볼거리 뿐인 영화다.
끝내주게 멋진 장면은 분명 군데군데 등장하지만, 그뿐이라면 두시간 반이 아니라 십분짜리 뮤직비디오로 만드는 게 이래저래 경제적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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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돔 분수광장 바닥을 장식했던 범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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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7 00:34 2009/10/27 00:34
  1. lonelysole
    2009/10/29 15:47
    Welcome back~

    다른 건 잘 기억 안나지만 여자 모양한 로봇은 좀 오버였던 듯~

    글구 헌재는 방송법이 유효라고 결정해 버렸네~
  2. 가넷
    2009/11/03 09:22
    왜인지 1편을 그렇게 재미있게 봤으면서도 아직 못봤다.
    별로라는 평이 많아서 그런가봐.
    언제쯤 보게 될지...







이제동 지못미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9/08/08 22:56

7차전 갔다는 소식을 듣고
지연손해금 계산하던 걸 내던지고
독서실에서 김재하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갔건만.


아아 지못미 이제동.



[+] 벙커야말로 스타판 최대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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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8 22:56 2009/08/08 22:56







파리

주절주절/여행 Posted at 2009/07/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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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지 어느새 2주가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마음은 파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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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6 20:23 2009/07/26 20:23
  1. 혹자
    2009/08/04 11:13
    이게바로 미투

    ㅋㅋㅋㅋㅋ







1. 허위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해당성이 인정된다고 보임.
이 부분에서 남은 쟁점은 공적 관심사안에 대한 보도라는 점에서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보도가 아닌 한 위법성이 조각된다"라는 법리에 따라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을지일 뿐임.
그러나 검찰 수사결과 발표만 놓고 봤을 때, 다툼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조각되기 힘들어 보임.

2. 업무방해죄 부분은, 위계 또는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행위가 있는지 약간 의문.
명예훼손죄 부분보다는 좀 덜 명확하다고 생각함.

3. 이 사건과 관련성이 극히 적다고 판단되는, 사적인 대화임이 명백한 이메일을 공개한 것은 결코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됨. 검찰 입장에서 봐도, 수사결과에 대해 괜히 욕먹을 빌미만 제공한 셈이 되었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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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8 21:06 2009/06/18 21:06
  1. 김건
    2009/06/19 17:10
    정확한 사실관계는 모르겠지만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것이 맞나?

    검찰의 이메일 공개는 적어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은지?;;

    글구 구성요건에 기계적으로는 맞추어 넣을 수 있다고 해도 정책을 비판한 언론에 대하여 담당 공무원 명예 훼손되었다고 기소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있나 모르겠네.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요즘은 법률가라는 직업이 참 치졸하게 느껴지는군.
    • onecent
      2009/06/19 21:07
      음..검찰 수사결과 발표문을 한번 읽어봐. 대검 홈페이지에서 구할 수 있어. 최소한 그 내용을 보면 구성요건해당성은 인정된다고 보는 게 맞는듯.

      검찰의 이메일 공개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구성요건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그것과 피디들의 명예훼손죄 성부와는 별개의 문제지.

      그리고, 정책비판언론에 대해서 정부기관장이 자기 명예가 훼손됐다고 대뜸 고소한 것부터가 코메디라는 데에도 동의해. 사실 검찰이나 법원 같은 사법기관에 오지 말아야 할 문제가 자꾸 넘어오는 게 사법기관 입장에서는 제일 난감한 문제라고 생각함. 요즘 검찰시보하면서 느끼는거지만.. 많은 사람들이 '잘못한 사람은 모조리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 잘못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 거잖아? 도덕적 비난가능성만 있는 잘못도 있고, 불법행위책임은 인정되지만 형사처벌할 정도는 아닌 잘못도 있고, 형사처벌해야 하는 잘못도 있는 거지. 근데 사람들은 조금의 잘못만 있어도 죄다 검찰에 고소부터 한단 말이야(이명박 욕을 만평에 집어넣은 만화가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로 고소한 것도 바로 이런 경우겠지).

      나는 누구보다도 피디수첩 제작진의 사실왜곡이 없었다고 믿고 싶어한 사람이야. 그리고 실제로 미국산 쇠고기와 광우병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해서 검찰이 이야기한 것처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닐지도 몰라.(다음 기사가 참조가 됨;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619151210)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도 의도적인 오역이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고(내가 많이 실망한 것도 바로 이 오역 부분이지), 허위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내용도 있다고 봐(법원의 정정보도사건 판결도 마찬가지 의견이었지).

      그렇게까지 오역을 하고 심하게 과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송이었을 텐데 너무 무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울 따름이지.
      다투기에 따라서, 그리고 법정에서 추가로 밝혀질 사실관계에 따라서 위법성이 조각될 여지는 있다고 보이니까, 그리고 검찰 수사결과 발표는 일방 당사자의 입장일 뿐이니까, 좀더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겠지.

      법은 사회현상을 절대로 다 규율할 수 없어.
      이 세계가 모래밭이라면, 법으로 그 세계를 규율하려 드는 것은 맨손으로 그 모래를 움켜뜨려는 것과 같겠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게 대부분이야.
      그런 의미에서 사법부의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야. 더구나 형사 사법기관은 더 말할 나위도 없어.

      토론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인데도 토론할 줄 모르는 사람들, 도무지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기울이고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 문제를 죄다 검찰과 법원(그리고 헌재)에 떠넘겨 놓고는 검찰과 법원의 입만 쳐다보고 있어. 그게 오늘날 법률가들의 진정한 비극이 아닐까.

      그 때문에 나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도 우리 나라의 법률가들에게 사법소극주의적 사고방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해.
  2. 김건
    2009/06/22 23:10
    나도 한번 구해서 읽어 봐야겠네. 신문 기사만으로 보는 경우에도 약간 의도적인 오역이 있는 것 같다는 기사가 실려서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좀 걱정이 되었었는데, 사실관계상 그렇게 인정될 가능성이 좀 꽤 있나보군...아쉽군. 검찰에서 이메일 공개한 것으로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검찰이나 정부가 의도한 바를 이루었다는 생각이 드네. 법원에서 무죄가 나와도 어차피 일부 사람들은 법원이 좌파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정치의 권위가 없으니 모든 것을 사법기관의 권위를 빌어 처리하고자 하다보니 지금과 같은 사법만능주의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삼성 판결을 보면서 법원에 대한 기대도 많이 접었지만, 그래도 법원이 검찰보다 조금은 낫다는 생각은 아직은 유효한 것 같아.

    검찰이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이 얼마나 막강하고 또 한편으로는 위험한 것인지 요즘 정말 실감하고 있지. 자의적 검찰권의 행사, 있는 자와 없는 자에 대한 불공평한 검찰권 행사가 만연하고 있는데(예컨대, 공정택 사건과 노무현 또는 주경복 사건, 용산사건/경찰의 시위대 폭행사건과 시위대의 경찰에 대한 폭행/교통방해/집시법 위반 사건 등) 이러한 불공정한 검찰권 행사 자체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고, 사회 안정을 위해서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말을 꺼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는 사실이 더 아쉬운 것 같아.

    암튼, 주로 한쪽 신문기사만을 보다보니 이건처럼 fact를 더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원칙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군.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검찰은 사법소극주의, 법원은 진보적 의미에서의 사법적극주의가 필요하지 않나 싶군.

    Good night~







봉준호의 [마더]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9/06/07 20:46

나는 봉준호가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현 상황과 문제점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연출한 영화를 나는 세 편밖에 보지 못했다. [살인의 추억], [괴물] 그리고 최근 개봉한 [마더].
그러나 위 세 편의 영화에는 일관된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나는 그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그 문제의식은 바로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이다.
봉준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언제나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그들 혼자서(마더), 또는 둘이서(살인의 추억), 또는 일가족만으로는(괴물) 해결하기에 너무나도 벅찬 것들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문제들은 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문제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며, 그 해결을 위해 사회적인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연쇄강간살인범을 잡는 것, 그것은 두 명의 형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현서를 납치해 간 것은 한강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봉준호의 비유를 그대로 따라간다면_여기엔 미군이 한몫했다)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은 비단 현서뿐만 아니라 모든 서울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가 나서서 괴물을 잡아야 옳다.
여고생 살인사건의 진범을 잡는 것 또한 마더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나서서 진범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개개인이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시스템은,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연쇄살인범의 신발자국과 같은 중요한 증거는, 현장보존과 같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절차 미숙 때문에 무참히 사라져 버린다. 또 한 사람의 희생자를 막기 위해 경찰력 증원을 요청하지만, 시위 진압에 이미 경찰력을 모두 동원한 상부에서는 증원 요청을 거절한다. 수사 시스템은 군홧발로 엄한 피의자를 두들겨패는 식으로만 작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식의 시스템 운용은 무수한 희생자만을 낳고, 문제 해결에는 실패한다. 너무나도 범인을 잡고 싶었던 형사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혐의를 받던 바보 피의자는 자살한다. 군홧발로 그 바보 피의자를 두들겨패던 형사는 그 군화를 신을 오른발을 잃고 만다.

국가는, 느닷없이 나타나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괴물을 잡는 것보다는, 명확히 검증도 되지 않은, 괴물이 보유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그토록 방역에는 결벽증과 같은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작 괴물을 잡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괴물을 잡는다고 뿌린 오렌지색 가루는, 그 오렌지색 가루 살포와 정부의 대응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던 사람들을 진압하고 있던 경찰관의 목숨은 앗아가지만 정작 괴물을 죽이지는 못한다. 괴물을 죽이는 건 현서네 가족이다. 그나마도 이미 현서는 죽은 뒤에. 심지어 그 난리를 겪고 나서도, 현서 대신 새로 생긴 아들을 지키는 건 국가가 아니다. 여전히 송강호는 총을 곁에 두고 스스로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한다(마지막 장면).

[마더]에서도 경찰, 변호사, 검사 등 진범을 잡기 위해서, 그리고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 마련되어 있는 사회적 시스템은 전부 다 실패하고 만다. 경찰은 바보 피의자를 두고 엉터리 자백을 받아내고, 변호사는 상담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연줄을 이용해 유야무야 사건을 처리하려 한다. 검사는 변호사가 사 주는 술을 처먹고 술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을 뿐이다. 피해자의 주변 인물을 조사하고, 피해자의 행적을 추적하는 등 응당 수사기관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국가에 의해 수사권이 부여되어 있는 수사기관이 아니라, 아무런 권한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마더 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문제의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희생자들은 생겨난다. 모든 걸 다 제껴놓고 나의 안위를 위해 고군분투해줄, (한국의) 엄마가 없는 어떤 사람, 그리고 마더까지도. 마더와 도준이의 밥상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위 세 영화에서 모두, 주인공들은 정말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 노력한다.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그러나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없다. 도와 주라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혀 놓은 사람들은 그들을 돕지 않는다.
정말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그리고 위 세 영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은,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의 말을 통 들어 주질 않는다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 다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고, 자신의 편견만으로 대화를 이끄는 사람들.
송강호가 [괴물]에서 마취약의 기운과 처절하게 싸우면서 억지로 입을 움직여 간신히 내뱉던 말이 뭐였는지 기억나는가? "왜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 주는거야"였다. [괴물]을 두고 반미영화네 뭐네 열심히 떠들지만, 내게는 저 말이 가장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렇다. 지금 여기,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바로 그런 곳이다.
어느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엄마, 아무도 믿지 마."). 문제 해결을 혼자 힘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사회.

그렇게 타인에 대한 신뢰가 증발하고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대한민국에서 나를 지켜 주는 건 결국 가족 뿐이다.
그리고 가족들끼리 지켜 주는 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엄마가 아들 지켜주는 때이다. 기묘하게도 [괴물]에선, 바로 이 가장 강력한 연대관계가 쏙 빠져있다. 엄마가 아닌 사람들(아빠, 할아버지, 삼촌, 고모)이 아들이 아닌 사람(여자아이)을 지키내기 위해 힘을 합친다. [괴물]의 가족들보다 [마더]의 엄마가 결과적으로 조금이나마 더 문제해결에 성공하는 건 우연일까? 그게 우연이든 감독의 의도든 간에, 우리나라에서 아들 살리려고 덤비는 엄마를 당할 사람이 없는 건 분명하다.

개인 스스로, 또는 가족들끼리 문제를 해결하게끔 내버려 두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결국 문제 해결에 실패하고 만다. 그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태생부터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문제이기도 하고, 애초부터 혼자 힘으론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혼자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도 힘을 합쳐서 해결하기 위해,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는 '국가'란 놈을 만든 것 아닌가? 연쇄강간살인범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납치된 딸을 무사히 되찾기 위해, 아들이 별다른 증거도 없이 살인범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경찰, 검찰, 군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만들고, 무죄추정의 원칙이니 신체의 자유니 하는 것을 헌법에 적어 놓은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놓은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우리가, 엄마가, 아빠할아버지고모삼촌이 나서야 하는가? 그것도 무력하기 짝이 없는 공기총, 양궁, 화염병, 쇠파이프를 들고서? 대포와 탱크, 기관총과 미사일은 어디 갔는가?

봉준호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문제를 던지고 있다.
[살인의 추억]은, 시스템이 처참하게 실패했던, 명백하게 국가가 사람들을 위해 작동하지 않던 독재정권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봉준호가 서 있는 시점은 그 때가 아니라 지금이다. 경찰 일을 그만두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송강호의 모습을 영화 막판에서 보여 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제목에 '추억'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일종의 회고담이다. 봉준호는 그 시절을 오늘날에 서서 되돌아보고 있다.

거기서 그냥 끝났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달라졌으니까, 독재정권은 없어졌으니까, 더 이상은 군홧발로 피의자를 두들겨패는 식으로 피의자를 신문하지는 않으니까, 이제는 법의학도 발전하고 수사기법도 과학화되었으니까, 봉준호는 그저 과거 우리 사회가 지녔던 문제점을 되새겨 보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말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괴물]이 나왔다.
[괴물]에서 봉준호는 말한다. 달라지지 않았다. 독재정권이 없어졌을지는 몰라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키게끔 내모는 곳이다. 사람들이 한강에 뛰어들게끔 내모는 사회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내몰다간, 뛰어내린 사람들을 먹고 자란 괴물이 한강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그나마도 이제껏 그 괴물을 잡은 것은 화염병과 쇠파이프였다. 그러나 그런 식의 대응은 너무나도 희생이 크지 않았던가. 다음에 괴물이 튀어나오면, 그 때는 어쩔 것인가. 이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살인의 추억]을 [괴물]보다 더 재미있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백 년 후 이 시대의 진정한 고전으로 평가받을 만한 영화는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대의 문제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영화, 그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영화('재밌게 잘 찍은 영화'라는 점도 분명히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괴물의 CG가 어설프니 어쩌네 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부차적인 문제다. CG의 질은 영화의 훌륭함을 결정하는 데 아주아주 미약한 영향력밖에 없다(어이 심감독님, 당신한테 하는 이야깁니다).

[마더]는, [괴물]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의 큰 틀을 따라가면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고유한 상황 - 엄마와 아들 간의 강력한, 유별난 유대관계 - 을 새로이 추가해서 보여 준다. 엄마와 아들 간의 유별난 유대관계가 정확하게 어떠한 사회적 문제상황을 구성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길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의 특징적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낳는 현상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한번 고민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마더] 또한 훌륭한 영화다.

봉준호의 문제의식은 결국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나타나는 상황이 제기하는 문제와 동일한 것이다.
개인의 초인적 노력을 강요하는 사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 그래서 피곤하고, 살기 힘든 사회.
[우생순]은 그러한 사회를 기적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헤쳐 나가는 극히 소수의 영웅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영화다.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의 눈물과 땀이 얼마나 멋있는지.
한편 봉준호는 그러한 사회 속에서 실패하고 마는 나머지 절대 다수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어쩌지 못하고 마는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인지.

[마더]를 보면서 나는 계속해서 [괴물]이 떠올랐고, 또 [바벨]이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가. 그들의 말을 우리는 과연 듣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서로가 하는 말을 조금만 더 귀담아 듣는다면, '그럴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면 좀 더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도 신뢰의 끈으로 묶고, 그렇게 해서 거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을 위하여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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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7 20:46 2009/06/07 20:46







사법은 곧 책임이다. 죄를 지은 자에게는 벌을 내림으로써 책임을 지게 한다. 약속을 한 자에게는 그 약속을 지키게끔 하고, 이를 어겼을 때는 손해를 배상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한 약속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한다.
책임은 사후적인 것이다. 행동규범을 세우는 것이 먼저 있고, 그 행동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그 다음이고, 규범에 맞지 않은 행동이 벌어졌을 때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맨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책임은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규범을 세우는 것은 쉽다. 그에 맞춰서 행동하는 것은 그보다 어렵다. 그러나 규범에 맞춰 행동하지 못했을 때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이는 당장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분명하다. 생활계획표를 번지르르하게 짜 놓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극기, 인내, 근면성실 등 온갖 좋다는 단어는 죄다 좌우명으로 가져다 써서 벽에 걸어 놓는 것까지는 언제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계획표에 따라 하루하루를 사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벽에 아무리 극기라고 써 붙여 놔도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지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계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이라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임은 이처럼 너무나 어려운 것이지만, 한편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올바른 것으로, 가치있는 것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합의하여 만들어낸 규범들(근대 국가에서는 ‘법률’이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은, 책임이 없다면 한갓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규범은 그것이 지켜질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규범을 지키는 일은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움으로써만 가능하다. 규범을 어기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여기서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이 장기적인 안목과 합리적인 양보에 따른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종이에 훌륭한 글귀를 써서 걸어두는 것은 쉽다.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서로 차분하게 의논하고 토론해서 규범을 제정할 때는, 서로의 단기적인 이익을 조금씩 양보해서 가급적이면 모두가 이익이 되게끔 규범의 내용을 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문제는 현실에서 순간순간의 갖가지 욕망과 충동에 맞닥뜨리게 되면 누구나 단기적인 이익만을 좇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 책임 없이 방치하다 보면 결국 사회는 모두가 매 순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사회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반면 모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회는 결국 모두가 서로의 행위를 신뢰하는 사회가 된다.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고, 좋은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신뢰가 구축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대의를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작은 이익을 희생한다. 약속을 깨는 사람은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른다는 신뢰가 구축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상대방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 법이다.

가인 김병로의 삶은 구한말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격동의 해방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덕분에 80여 년에 걸친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은 곧 지금 현재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규정한 지난 80여 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는 것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 지난 세월은 ‘책임의 부재’라고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제에 협력하여 부를 축적하고 조선 사람들을 핍박했던 친일파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나마도 뒤늦게 구성된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일제시대 때 악명 높은 경찰이었던 노덕술 등을 체포하자 이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질 새도 없이 도리어 경찰이 반민특위의 본부를 습격하고 특위요원들을 연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6∙25 전쟁 당시 ‘안심하라’는 공식발표를 믿고 서울에 남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은 도망가며 한강 다리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는 전세가 회복되자 돌아와서 그 때 떠나지 말라는 그들의 말을 믿은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벌하려 들었다.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 온갖 기본권을 헌법에 버젓이 명시해 두고도 정작 정부에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자들은 그 입을 막고, 신문을 정간시키고, 부당구속과 고문을 일삼았다. 규범을 믿고 따른 자들은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규범을 어긴 자들은 책임을 지기는커녕 그때그때마다 그들이 취했던 기회주의적 태도 덕에 득세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책임의식의 상실, 신뢰의 부재로 신음하고 있다면 그 큰 이유는 이러한 책임이 실종된 현대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임이 사라진 지난 수십 년의 결과가 바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사회, 영화 ‘괴물’에 잘 드러난 것처럼(괴물에게 잡혀간 현서를 필사적으로 찾는 건 결국 가족들이지, 국가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아둥바둥 자기 앞가림을 해야만 겨우겨우 자기 이익을 지켜낼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책임 부재’의 현대사에서 가인 김병로 선생은 홀로 외로이 버티고 서 있는 단단한 바위 같다. 그는 밀려오는 기회주의의 파도 속에서도 원칙을 놓지 않는다. 일제의 탄압에도, 해방 후에는 이승만 독재 정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자신의 소신을 지킨다. 가인은 책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것을 일관되게 못마땅해 했고, 결국 그 때문에 스스로 몸담았던 한민당에서 탈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법원장으로 있던 시절 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탄압에 맞서기도 하였다. 이승만 하야 후에도 “일제잔재의 경찰관을 재등용하지 말 것, 이승만정권에 추종아부한 각계 간부를 과도정부의 모든 기구에서 제거하고 숙청할 것”을 요구했고, “죄형법정주의, 형벌불소급의 원칙, 만인의 법 앞의 평등의 원칙 등 민주주의의 기본원리가 파괴된다”는 재야 법조인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이승만 정부 시절의 부정선거원흉과 부정축재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장까지 지냈던 가인이 과연 죄형법정주의, 형벌불소급의 원칙, 만인의 법 앞의 평등의 원칙을 등한시했던 것일까? 나는 가인이 사법, 나아가 법치의 핵심이 곧 책임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생애에 걸쳐 일관되게 그는 잘못했던 사람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나 일제가 물러난 직후의 해방기나 이승만이 하야한 직후 과도정부가 들어선 시기와 같이, 표면적으로 나타난 큰 변화 탓에 사람들이 보다 세세한 책임추궁에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격변기일수록 가인은 앞장서서 책임의 확보를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널리 퍼져나가지 못하고 작은(그러나 힘찬) 외침으로만 남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깝다.

규범 그 자체, 더 나아가 그 규범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단계의 주춧돌이 책임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가인이 책임 확보를 본업으로 하는 사법부의 초대 수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이 즐거움보다 많은 우리 현대사에서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그의 책임성은 비단 사회규범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개인적 규범의 차원, 즉 윤리와 도덕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법관은 남들로부터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결벽에 가까운 청렴생활을 했던 것, 공과 사를 칼처럼 구분했던 것 등 그는 실로 도덕률에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토록 스스로 엄격하게 책임을 지며 살았던 그였기에 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책임을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렇기에 그가 내리는 판결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인을 보며 책임을 생각했다. 그의 삶의 모습이 담긴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도 책임을 지기로 결심했다. 그 때문에 독서감상문 제출일 새벽이 돼서야, 잠자리에 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가인 김병로 평전’의 독서 과제가 주어지고 난 뒤 그 긴 여름 동안 차일피일 책 읽는 것을 미뤄 온 내 게으름에 대하여 책임을 지기 위해서다. 밤이 깊어지고 마감시한이 다가올수록 대충 넘겨 읽는 발췌독만으로 감상문을 작성하고자 하는 유혹에 계속 부딪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80평생을 통해 책임을 몸소 보여 준 사람의 삶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글을 쓴다는 것은 너무나 자기모순적인 짓이었다. 지난 두 달 간의 나태함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작은 행위를 하는 것 - 책을 완독하고 생각을 정리해 글을 쓰는 것 -이 가인의 후배로서, 가인의 손길이 아직 남아 있는 법전을 뒤적거리며 살아갈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가인의 비문에는 “비록 몸은 가셔도 조국을 위한 기원은 살아 있어 길이 나라의 힘이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나라의 힘까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이 책을 읽으며 그가 내게 보여 준 모범이 길이 내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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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2 22:43 2009/05/22 22:43
  1. onecent
    2009/05/22 22:46
    이건, 연수원 1년차 때 여름방학 과제였던 '가인 김병로 평전' 서평으로 쓴 것이다.
    글에도 썼듯이 제출일 당일 새벽에 졸린 눈을 비벼 가면서.

    요즘 검찰시보를 하면서, 사람들을 수사하고 기소하고 구형을 하면서 새삼 '책임'이 화두로 떠올랐다.
    전에 써 둔 것이 생각나서 곱씹어 보면서 생각이나 정리할 겸 여기에 올려놓는다.







이것저것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9/05/18 22:00
1. 직장생활 2주만에 이렇게 월요일이 싫어질 줄이야.
일요일 저녁에 어둑어둑해지면 얼마나 우울한지. 이런 기분은 중학교 다닐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2. 지난 금요일, 근 1년만에 선생님께 안부 전화를 넣었다.
내가 스승의 날에 일부러 전화 거는 선생님은 한 분 뿐이다.
"요새 수업 어떠세요, 재미있으세요?" 라고 묻자 선생님께서는 기운빠진 목소리로 "재미없다"고 하셨다.
예전 내가 수업 들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모양이다.
선생님께서는 또 "예전 너희 때가 재미있었는데.."라고도 하셨다.

저도 재밌었어요, 그때. 두고두고 못 잊을만큼.

조만간 찾아뵙고 술이라도 한 잔 올려야겠다.


3. 토요일 아침만 되면 꼭두새벽에 귀신같이 일어나서 부리나케 일산으로 향한다.
그러다 보니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지하철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한 번 갈때마다 한 시간씩 걸리니까.
지하철에선 뭐라도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으니, 그 동안 평소에 시간이 참 없는데도 책 읽은 건 되려 3, 4월보다 더 많은 것 같다.

먼저 [부자 아빠의 몰락]. 소득 불평등의 심화는 모든 사람들의 공공복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논증해 내는 책이다. 논증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책이 분량도 얼마 안 되고 평이한 문체로 읽기 쉽게 쓰여졌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이다. 세상을 보는 눈을 좀 더 넓고 깨끗하게 틔워 준다. 시간 내서 일부러 읽어볼 만하다.

그리고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주류 언론의 일간지 사설을 읽으며 답답해진 가슴에 한 줄기 시원한 비를 뿌려주는 책이다. 건전한 상식으로, 합리적인 사고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최소한 한 사람은 더 있다는 생각에 든든해진다. 이 책 역시 시론집이니만큼 평이하고 읽기 쉬운 문체로 되어 있어 부담도 적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주요 문제들에 대하여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날카로운 분석을 보여 준다. 부동산 문제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과 종부세 옹호론이 마음에 와닿는다. 이준구 교수는 한국의 폴 크루그먼이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크루그먼의 [대폭로]의 한국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한홍구 교수가 쓴 [특강]. 이 책 역시 앞의 두 권과 마찬가지로 읽기 쉽고, 그러면서도 내용은 얻어 갈 게 많다. 읽는 내내 공감가는 부분이 참 많았다. 내용 자체는 여기저기서 한 번쯤은 주워들은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도 같지만, 뉴라이트의 기원과 그 정체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웠다.

세 권 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영양가는 많다.
세 권 다 선뜻 추천을 날린다.


4. 검찰 시보를 하면서 매일매일 느끼는 게 참 많지만, 그 중에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 경찰 수사권 독립은 시기상조다.
- 수사 단계에서부터 변호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피의자들은 변호인의 조력을 적극 구할 필요가 있다.
- 검찰에서는 아직도 구속을 구속사유와 무관한 제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공판중심주의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난 피의자들이 왜이리도 불쌍한지 모르겠다. 아직 악질 피의자를 못 만나봐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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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8 22:00 2009/05/18 22:00
  1. 김건
    2009/05/20 17:51
    ㅎㅎ 지하철에서 책 읽던 시절이 그립네. 난 출근길이 3정거장 밖에 안되서 책 읽기에는 너무 짧지...퇴근길은 전철 끊겨 택시로..;;

    여유없는 평일과 가족과 함께하는 주말로 인해 정말 강인한 의지가 없이는 책 읽기가 참 쉽지 않네. 그나마 최근 읽은 몇 권은 서평도 안 쓴채 기억에서 서서히 희미해져가네.

    경찰수사권 독립은 시기상조라는 말은 지당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검찰이 경찰보다 얼마나 낫나 하는 생각도 드네. 물론 전반적으로는 훨씬 낫겠지만,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사실 차별성이 없는 듯...
    • onecent
      2009/05/25 22:40
      검찰에서 직장생활 해 보니까 책 읽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 주말에든 평일 밤이든 일부러라도 책 읽는 습관을 들여야겠어.
      몸에 배면 자연스럽게 될 텐데 말이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란 측면에선 별로 차이가 없다는 데는 동의. 난 다만 수사의 초점을 맞추는 점이랄지, 그나마도 적법절차를 지키려고 하는 점이랄지 하는 부분에서는 검찰이 경찰보다 아직 낫다고 봐..







청바지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9/04/08 17:29

옷가게에 들어가서 청바지를 고를 때 보는 건 일단 두 가지다.
먼저 색깔과 워싱처리된 무늬를 포함한 모양새를 본다. 그리고 나선 마음에 드는 녀석은 가격표까지 본다.
가격까지 마음에 든다면 - 가령 "디젤인데 50퍼센트 세일"이라거나 하면 - 입어보게 사이즈를 찾아 달라고 점원에게 물어 본다(혹자는 캐시미어라면 가격조건은 아예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아무리 걸려 있는 걸 보고 마음에 들어도, 입어 보고 난 뒤에까지 마음에 드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정말 간혹이지만, 입어 보고 나서 단순히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그래바로이거야"라는 기분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런 "그래바로이거야" 청바지라고 하더라도, 키는 작으면서 작은 키에 비해 허리사이즈는 크게 입는 나로서는 바지 길이를 줄여 입어야 한다. 잘려나간 바짓단은 도로 이어 붙일 수 없는 일이기에 수선을 맡길 때는 길이를 좀 적게 줄이게 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한 번 줄여 입고 다니다가 또 한 차례 수선을 맡겨야 하는 일도 발생한다.

길이까지 딱 좋게 줄여서 줄기차게 입고 다니다 보면, 그 바지를 입는 요령이 쌓인다.
배불리 먹었을 때는 벨트를 한 칸 풀어서 채우고, 야트막하고 폭이 좁은 캔버스화를 신을 때는 끌리지 않게 한 칸 조여서 채운다. 길이가 긴 티셔츠에 맞춰서 헐렁하게 입을 때는 내려 입고, 내려 입었다간 허리가 너무 길어 보인다 싶으면 좀 올려 입는다(그러나 어지간해선 허리에 맞춰 입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요령이 쌓인 상태에서 계속 줄기차게 입고 다닌다. 그러면 청바지가 몸에 적응하는 건지 몸이 바지에 적응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옷감은 데님인데도 흡사 츄리닝을 입고 다니는 것처럼 편하기 그지없는 상태가 된다.

드디어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은 궁극의 경지에 도달했나 싶으면, 바로 그 순간
바지가 해져서 찢어져 버리고 만다. 원래부터 찢어서 판 바지가 아니었으니 찢어진 게 보기 좋을 리 없다.
거 참. 요새 바지는 옷감도 튼튼한 걸로 만들텐데 내가 험하게 입는 건지 아니면 불량품인 건지.

그러고 나면 다시 "그래바로이거야" 바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아니면, 그냥 찢어진 데를 수선해서 입고 다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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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17:29 2009/04/08 17:29
  1. 혹자
    2009/04/13 13:35
    혹자 등장 ㅋㅋ







그랜 토리노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9/04/01 18:36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를 많이 보진 않았다. 최근 영화들 몇 개만 챙겨 봤을 뿐.
미스틱 리버, 밀리언달러베이비, 그리고 그랜 토리노.
저 세 편은 모두 아주 마음에 들었다. 밀리언달러베이비와 그랜 토리노에서는 이스트우드가 직접 출연까지 하는데, 밀리언달러베이비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그의 모습과 참 닮았다.

기름기 없이 마른 몸매에, 얼굴엔 주름살이 짙게 패어 있지만 힘주고 노려보는 눈빛만은 날카롭지 그지없는 모습.
억지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기름기를 뺀 뽕 없는 연출. 그러나 그려내는 이야기는 날카롭기 그지없고, 그의 얼굴에 패인 주름살의 깊이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뇌리에 남겨놓는다. 영화관을 나서서도 몇 번이나 곱씹게끔.

난 미스틱 리버보다 밀리언달러베이비가 더 마음에 들었고, 밀리언달러베이비보다 그랜 토리노가 좋다.
좀 더 찾아서 봐야겠다. 이스트우드가 찍은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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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1 18:36 2009/04/01 18:36
  1. 세진
    2009/04/11 14:30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아버지의 깃발 세트 추천!! +_+







레슬러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9/03/16 14:24


이렇게 훌륭한 영화가 일산 CGV에서는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직장인들은 가 볼 수도 없는 오후 12:10 에 단 한 회만 상영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퇴물에 관한 영화라고 퇴물취급하는 것일까.

가서 꼭 보자. 그나마 한 회 상영하는 것마저도 내리기 전에.


[+] 덕택에 간만에 Guns n' Roses 찾아듣고 있다. 망할 코베인 녀석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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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6 14:24 2009/03/16 14:24
  1. lonelysole
    2009/03/17 09:54
    요즘 영화 많이 보는구먼. 애생기면 영화보기 힘드니 많이 봐두소.

    It was nice talking to you on the phone. As may be the case with you, there are not many guys around me to talk about those issues that I'm so eager to talk about...
    • onecent
      2009/03/20 18:50
      애 생기기 전에 '애인'이 생기면 지금보다 더 많이 보지 않을까.ㅎㅎ

      맞아. 난 가끔 친구들하고도 이야기해보고 그러는데..확실히. 쉽진 않지.









For what it's worth, it's never too late, or in my case, too early, to be whoever you want to be.
There's no time limit, start whenever you want.
You can change, or stay the same. There are no rules to this thing.
You can make the best or the worst of it.
I hope you make the best of it.

I hope you see things that startle you. I hope you feel things you've never felt before.
I hope you meet people with a different point of view.

I hope you live a life you're proud of.
And if you find that you're not, I hope you have the strength to start all over again.

(- 벤자민 버튼이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이야기를 마침내 전해들은 벤자민 버튼의 딸만큼은
카트리나의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용기를 갖고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테니까.

어쩌면 마지막 장면 -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즈를 덮치고 밀려오는 홍수에 거꾸로 가는 시계가 잠기는 장면 - 이 역설적으로 저 말의 가치를 더욱 빛내 준다.

살면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어준 시간을 최고로 값지게 써야 한다.
그리고 내 삶을 값지게 가꾸어 나가는 건 바로 지금부터라도 가능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 데이빗 핀처,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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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3 16:10 2009/03/13 16:10

  1. 2009/05/25 01:36
    원작 소설보다 포레스트검프에 가깝다는 느낌이었음.

    각본은 거의 번역 또는 샘플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거 같다.
  2. onecent
    2009/05/25 22:40
    맞아. 정말 포레스트 검프 비슷했어.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각본 쓴 사람이 같더라고;







굿나잇, 굿럭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9/03/04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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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클루니가 연출하고 탄탄한 조연으로 연기까지 한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은, 2005년에 헐리웃에서 제작했고 1950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 그러나 2009년 지금의 대한민국, 즉 행정부와 여당이 방송법 개정을 시도하자 이에 언론계가 반발하고, 사이버모욕죄 도입 여부를 놓고 첨예한 의견대립립이 계속되고 있는 등 '언론의 자유와 그 제한'이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 오늘의 우리 사회에 매우 시의적절한 영화다.

이 영화는 언론의 자유와 관련한 주요 문제를 모두 던져놓는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처벌하고, 그러한 다른 생각은 표현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숨막히는 괴로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일단 그렇게 숨막히는 사회가 되고 나면 그러한 억압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범인에게는 쉽사리 기대할 수 없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
일단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결국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못하는, 논쟁에서 이기지 못하는 부당한 억압은 설득력 있는 말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표현의 자유'란 방패는 그 아래에 한 사람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주는 해로운 독설까지도 보호하고 만다는 것.

말은 분명 양날의 검이다.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는 것도 말이요, 거짓을 꾸며내고 나약한 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것도 말이다.
잘 드는 칼일수록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적절한 사용법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적절한 사용법을 알아내는 것 또한 말로써만 가능하리라는 점이다.
자유가 원칙인 사회에서는 말에 의한 자기치유 가능성이 존재한다. 제한이 원칙인 사회는 자기치유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자유'가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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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4 22:49 2009/03/04 22:4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191805165&code=9403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191925451&code=940100


판결에 대한 보도는 판결문 인용이 불완전한 데다가 그나마 인용되는 부분 또한 법리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을 비껴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판결문 전문, 더 나아가 사건 기록을 보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 보도만을 두고 판결문에 대해 논평을 가하는 것은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두 번째로 인용한 기사에 실려 있는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번 유죄판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광고중단을 요구하며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은, 당연히 적법하다. 이는 정당한 소비자의 권리행사이고 넓게 보면 표현의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이 터졌을 당시 검찰측에서 '이차적 불매운동은 그 자체로 위법'하다고 주장한 것은 옳지 않다. 이차적이냐 일차적이냐는, 불매운동이 업무방해행위로서 범죄가 되느냐 마느냐와 무관하다.

그러나 불매운동이라고 해도 그 구체적인 실현방법에 따라 범죄행위가 될 수 있다. 이 사건에서도 문제된 것처럼,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할 정도로 항의전화를 넣는다든지, 가게에 쳐들어가 물건을 파괴한다든지 하는 행위라면 그러한 행위가 공익을 위한 불매운동이라는 정당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 한들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물론 언제나 목적의 정당성과 수단의 위법성 사이를 형량해서 위법성을 조각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따라서 만약 이번에 형사처벌된 사람들이 정말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업무방해행위(협박전화를 무수히 건다든지 하는 행위)를 직접 행하거나 교사한 사람들이라면, 이번 판결에는 잘못이 없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유사 불매운동 사례 가운데 유독 이들만을 수사해 기소한 검찰의 잘못이 사라지지는 않을 터다). 그러나 피고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들은 단지 불매운동 까페를 만들고, 불매운동을 벌일 기업체들이 어디어디인지 알려주고, 불매운동을 홍보하여 회원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뿐이었다면 이들은 무죄다. 피고인들 중 한 명이 말했듯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불매운동을 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기까지 했다면 그야말로 무죄임이 틀림없다. 그러한 방법 외에 대체 어떤 방법으로 불매운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행위만으로 업무방해행위를 공모했다고 볼 수 있는가(내가 보기엔 이번에도 몹쓸 '공모공동정범' 이론은 위력을 발휘했다. 공동실행이 없는 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수만 명의 회원의 세를 이용한 것'을 위력이라고 봤다면 - 다시 말하지만 언론보도만을 보고 논평하는 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 그건 진짜 코메디다. 까페 개설과 까페 운영과 같은 활동이 다수의 세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형태의 대중행동도 형사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에서 가장 큰 문제는 비슷한 형태의 행위에 대해 선별적으로 발동되는 검찰의 수사권/기소권일지도 모른다. 이런 판결이든 저런 판결이든, 형사판결을 끄집어 내는 최초의 행위는 검찰만이 할 수 있다. 그런데 검찰은 기소권을 그야말로 편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거기서 많은 부정의가 발생한다. 난 사시공부할 때부터 기소편의주의는 잘못된 제도라고 생각했다. 연수원 공부를 하면서는 기소유예 제도가 못내 마음에 안 들었다. 다시금 그런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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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9 22:00 2009/02/19 22:00
  1. lonelysole
    2009/02/20 00:23
    요즘 검찰이 기소하는 정치적 사건들이나 그에 발맞추는 법원의 정치적 판결들을 보면, 불의에 분연히 맞서 싸울 용기가 부족한 나같은 사람은 검찰이나 법원에 가지 않은 것이 정말 잘한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로펌에서 지나친 사익의 대변으로 공익을 침해하는 일에 일조하지 않을까 고민했었지만, 실제로 업무를 하다보면 그런 일은, 적어도 내가 하는 업무 분야에서는 거의 없는 것 같아. 오히려 검찰과 법원에서 개개인에게 입신양명과 양심의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 같군.

    소위 법조인이라는 사람들이 권력에 빌붙어 떡고물을 받아 먹으면서 그 알량한 전문성을 무기로 탄압의 도구가 되어 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막상 그러한 일이 이렇게 금방 목격하게 되니 기분이 참 씁쓸하지...

    법비들과 오직 자기가 보는 언론에 나오는 것이 진실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듯. 정말로 본인이 희생자가 되기 전까지는 인식의 틀을 깨기가 너무 힘든 것인가하는 생각이 드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91


기가 차는 일들이 마구 일어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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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5 13:22 2009/01/05 13:22
  1. lonelysole
    2009/01/05 23:33
    요즘 참 기가 찬 일들이 횡행하고 있지. 정말 열심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거나 각색된 매체를 통해 엉뚱하게 사태파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다수인 듯.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말했던 것이 최장집 교수였던가...그런 논의 자체가 사치가 되어버린 현실이야...
    • onecent
      2009/01/13 10:07
      정말이야. 요새 신문 보면 우울한 이야기들뿐이지.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해도 벅찬데 이스라엘에서 전쟁까지 나고...이래저래..

      이런 때일수록 눈을 부릅뜨고 세상 돌아가는 걸 지켜봐야겠어. 그리고 할 말이 있으면 입도 열어야겠지..
    • onecent
      2009/01/14 16:56
      아래 '이스라엘에서' 를 '팔레스타인에서'로 바꿔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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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은 '경제적 불평등'을 화두로 삼아 1920년대 이후의 미국의 정치지형도를 분석해 나간다. 그는 20세기 이후 미국의 역사를 크게 세 시대로 나눈다. 경제적 불평등의 폭이 컸던 1920년대, 불평등의 정도가 급격히 감소하고 그 상태가 오래도록(30여년간) 유지되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뉴딜 정책의 시대, 그리고 다시 불평등의 정도가 1920년대 수준으로 심화된 197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레이건과 부시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의 시대가 그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의 역사를 분석하면서 크루그먼이 내리는 결론은, 경제학자보다는 정치학자가 내릴 법한 것이다(그 스스로도 처음에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리라고 생각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불평등의 부침은 외부적 시장경제적 요인이 아닌 정치적 요인에 의해서 일어났다. 일련의 정책에 의해 뉴딜 시대의 소득의 (상대적)균등과 그에 따른 탄탄한 중산층 사회의 형성이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1970년대 이후 우경화한 공화당과 그들의 집권에 따른 정책변화가 오늘날의 양극화를 낳았다. 다시 말해, 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는 시장경제의 흐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적 활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역으로, 우리의 정치적 활동에 의해 현재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은 완화될 수 있다. 외부의 경제적인 요인이 불평등을 해소해 주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새로운 뉴딜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크루그먼이 진보주의자(Progressive : 그는 이 책에서 'progressive'를 '행동하는 리버럴 liberal'이라고 정의한다)로서 미국 사회에 전하는 메세지다.

잠깐 용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난 아직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liberal'이라는 단어를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저 단어의 본뜻대로 '자유주의자'라고 번역해서는 저 단어가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냉전의 시대를 극심하게 겪은 미국에서 '좌(the left)'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인상 때문에 미국에서는 좌우(left/right)라는 보다는 'liberal/conservative'라는 말로 정치적 성향을 구분한다. 한국전쟁을 통해 북한과 그들이 대변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형성하게 된 우리나라에서 '좌/우'가 아닌 '진보/보수'라는 말을 널리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흥미롭게도 크루그먼은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연이은 보수의 공격으로 'liberal'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되었음을 이야기하며 그 대안으로 'progressive'라는 말이 떠오르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물론 그 스스로는 'progressive'라는 말을 앞서 본 것처럼 'liberal'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어떤 한 단어에 부정적인 인상을 심기 위해 노력하고, 나중에는 그 단어 자체를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가령 반정부적 정책이면 모조리 '좌파' 또는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정치적 공격방법을 생각해 보라)은 미국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말' 자체가 아닌 그 말이 지칭하는 실질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린 껍데기 때문에 실질을 너무 쉽게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크루그먼은 행동하는 리버럴(마땅한 번역어를 못 찾겠으므로 부득이 소리나는 그대로 쓰겠다)로서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 전하는 메세지를 이 책에 담았다. 그러나 그의 메세지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유효하게 먹힌다. 오늘날의 미국 사회와 미국의 정치지형도가 우리 나라와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보자.

"21세기 초반 미국 사회의 모순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를 리버럴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중요한 측면에서 [오히려]보수적이고, 스스로를 보수(conservative)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개 매우 급진적이라는 것이다. ...리버럴들은 우리의 민주주의 원칙들과 법치주의를 존중하고자 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보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독재자의 권력을 갖기를 바라며 부시 행정부가 혐의도 없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는 것에 박수를 보내 왔다."
크루그먼이 보기에 오늘날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보다는 권위주의와 과두정을 선호하는 집단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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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제적인 측면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방향으로 투표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 또한 한국 사회와 많이 닮았다. 크루그먼은 그와 같은 투표양상이 나타나는 이유를 공화당이 '인종'이라는 요소를 끌어들여서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없는(빈부격차를 심화하고, 소수의 이익을 위하는) 자신들의 정책을 감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즉, 미국의 정치지형을 가르고 있는 것은 경제와 함께 인종이라는 두 개의 구별되는 축인데, 이 두 개의 축 사이의 구분을 흐트러뜨림으로써 경제적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일치하는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종'을 '북한'으로 치환하면 정확하게 한국 사회의 모습이 되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최장집 교수가 제기한 것과 동일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이 책은 오로지 미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아직도 미국이라면 덮어놓고 신 떠받들듯 하는 분위기가 잔존해 있는 우리나라인만큼 미국 사회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2008년 가기 전에 사서 읽자.

"I believe in a relatively equal society, supported by institutions that limit extremes of wealth and poverty. I believe in democracy, civil liberties, and the rule of law. That makes me a liberal, and I'm proud of it."

[나는 부와 빈곤의 양극단을 제한하는 제도들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비교적 평등한 사회를 믿는다. 나는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법치주의를 믿는다. 따라서 나는 리버럴인 셈이고, 나는 그게 자랑스럽다.]

맨 마지막 문장은 인용부호 밖으로 빼 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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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4 17:13 2008/12/24 17:13
  1. 가넷
    2009/01/16 08:23
    이 책 라디오에서 소개하는 걸 들었는데
    한 구절 한 구절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일부분만 들었는데도 정말 우리나라와 똑같다는 걸 느꼈지.
    맨 마지막 문장은 나도 동감!!
    • onecent
      2009/01/21 20:06
      저도 읽는 내내 우리나라와 어쩌면 이렇게 상황이 비슷할까 놀랐죠; 그래서 더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교사로 삼기 좋더라구요.







사법연수지에 실린, 이 블로그에 먼저 쓰고 뒤에 연수지 글마당에 응모했던 [다크나이트]에 관한 글을 모처럼 다시 읽어보았다.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이 떠올라서 적어두려고 한다.

고담시의 법질서와의 관계에서 배트맨은 그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배트맨은 법질서를 수호하려고 하지만, 그는 스스로 법질서를 어기면서 그 법질서를 수호한다. 그에게 적법절차 따위는 없다. 공권력이 부여된 사법기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범죄자들을 두들겨패고, 자기 멋대로 단죄하고,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범죄인인도조약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며 외국으로 도피한 범죄자를 납치해 온다.
다시 말해 고담시의 법질서는 무법자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그렇기 때문에 배트맨의 역할은 숨겨져야 한다. 법을 어기는 녀석에 의해서만 법질서가 존속할 수 있다는 모순점은 감춰져야 한다. 그래야 법질서가 '질서'정연한 체계로서 성립할 수 있기 때문(또는 그러하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고담시의 법질서 속에서 배트맨이 갖는 위상은 민법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이 차지하는 위상과 똑같다. 신의성실은 민법 제2조에 규정되어 있어서, 다른 여러 조문에 규정되어 있는 민법의 다른 원칙들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민법에 규정되어 있는 다른 모든 원칙들이 상황에 따라서는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내용의 원칙이다.

이런 식이다: 민법에 규정된 대로라면 갑이 소유권을 갖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 소유권을 행사하는 것이 신의칙에 반한다. 따라서 갑의 소유권행사는 부정된다.

즉, 신의성실의 원칙은 민법을 어기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법원칙이다. 배트맨과 똑같은 모순덩어리다.

그리고 법학자들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대하는 태도 또한 고담시 시민들이 배트맨을 대하는 태도와 똑같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나쁜 놈' 취급을 받는다. 그 역할은 언제나 필요최소한도로 제한되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신의칙은 결코 남용되어서는 안된다, 모든 문제를 신의칙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된다. 어느 민법교과서를 봐도 이런 이야기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신의성실의 원칙이 있기에 민법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신의칙이 없다면 일견 정치해 보이는 민법은 복잡다양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만 죽은 글자들의 집합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법 문언대로만 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법에 의해' 이러이러한 결론이 나온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신의칙이다. 신의칙에 의해 법개념들은 확장과 축소를 거듭할 수 있고, 법은 신의칙에 의해 비로소 규범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칙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면, 민법 제2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규정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법의 체계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신의칙을 위험한 놈이라고 생각한다/해야만 한다.
그래서 오늘도 고담시의 경찰은 배트맨을 쫓는다/쫓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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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1 12:18 2008/12/21 12:18







호기심에 대한 찬양

주절주절/기타 Posted at 2008/10/27 00:05

얼마 전부터 만화 ‘마스터 키튼’을 사 모으고 있다. 한 권 한 권씩 포장비닐을 뜯어 읽고 나서 책장에 차곡차곡 꽂아 넣으니, 만화가 재미있는 건 물론이요, 일산에 이사 오면서 새로 산 책장 한 칸이 조금씩 채워져 나가는 걸 보는 재미도 만화 못지않게 쏠쏠하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만화 가운데서는 ‘마스터 키튼’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 여러 개의 짤막한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잠깐 보고 금방 책을 덮을 수 있어서 좋고,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점이 무엇보다 좋다. 게다가 우라사와 나오키 특유의 둥글둥글하고 오버하지 않는, 설득력 있는 그림체가 그 내용과 잘 어울린다(만약 이 만화의 그림체가 수박만한 눈동자에 종이가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콧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순정만화 그림체였으면 이 만화는 부조리 그 자체가 되어 버렸을 거다).

‘마스터 키튼’ 3권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곧 폐교될 처지에 놓인 한 사회교육원의 마지막 강의의 마지막 시간, 강의를 맡은 주인공 키튼이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학교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계속 공부해 달라는 겁니다. 사실 저는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자신감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지내던 중에 깨달았습니다. 공부할 정열이 있는 한…강의할 학교를 잃더라도 공부를 계속해 갈 겁니다.

인간은 왜 공부해야 하는 걸까요?
인간은 평생 계속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직책을 위하여나, 출세해서 장관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 왜 공부해야 할까요? …그게 인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느 때처럼 연수원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독서실에 갈 채비를 마치고 잠깐 만화나 보자는 생각에 책을 집어든 거였는데, 이 대목에서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질 못했다. 인간은 왜 공부해야 할까? 나는 대체 왜 그놈의 ‘공부’를 하러 이리도 급히 낑낑대며 독서실에 가야 하는 것일까?

난 키튼이 마지막에 제시한 저 답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게 무슨 인간의 ‘사명’인 건 아니다. 게다가 ‘왜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게 사명이니까’라고 대답해 봐야 그건 ‘해야만 하니까 해야만 한다’라고 순환논법으로 대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다’라는 저 말이야말로 가슴에 와 닿는다. 호기심, 아는 기쁨. 그것이야말로 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까.

호기심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활기 넘치게 하는지. 우리는 그걸 너무 잊고 산다.

사는 데가 바로 그 근처인지라 웨스턴돔 분수광장을 뻔질나게 왔다갔다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늘 보게 되는 건 분수를 보며 깔깔대면서 분수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이다. 일산으로 이사 오기 전, 신림동에 살면서는 주변에 온통 고시생, 대학생뿐이었지 어린아이들을 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일산에는 엄마아빠 손잡고 나들이 나온 아이들이 많은데, 아이들은 분수광장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대체 저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쉴새없이 뛰어다니고 숨 넘어갈 듯 깔깔대는데도 애들은 마냥 분수가 즐겁기만 하다. 보는 어른들이 먼저 지칠 지경이다. 내 친구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애들은 어른들 에너지를 다 빨아먹는다’라고. 그렇다. 어른들은 애들 노는 거 쫓아다니는 것도 힘들다. 애들은 아무리 해도 안 지치고 어른들만 지쳐가니, 어떻게 보면 정말 아이들이 어른들 에너지를 빨아먹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냥 어리니까, 더 젊으니까 에너지가 더 많은 걸까? 그렇지만 근력, 근지구력 어느 것 하나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훨씬 더 센데?

어린아이들은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 아닐까. 주변에 온통 처음 보는 것들, 새로운 것들 뿐이니까, 신기한 것들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하면서 매 순간 ‘아는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는 신기한 게 점점 줄어든다. 어차피 어디선가 본 거고, 들어본 거고, 해본 거다. 매사에 신기할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냉소다. ‘피, 그까짓 것’, ‘원래 그런거야’, ‘당연히 그런거지’ 라고 내뱉는 경우가 늘어갈수록, 우리는 호기심을 버리고 그 자리에 냉소를 채워넣는다. 그리고 냉소가 늘어갈수록 우리 삶의 에너지는 사라진다. 매사에 시큰둥, 신기할 것도 없고 흥미로울 것도 없으니 굳이 몸을 움직여 보고 느끼고 하고 싶은 생각이 생기질 않는 것이다. 어느새 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렇게 종일 침대에 누워 있으면 휴식 덕에 에너지가 충전이 돼야 할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누워 있을수록 더 기력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냉소는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 녀석은 무기력을 데리고 온다.

2004년, 대학에서 양창수 교수님의 채권각론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께서 어느 날인가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라는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 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미국의 천재(이자 괴짜) 물리학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쓴 일종의 수필집이었다.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 그러나 브라질의 리오 카니발이 좋아서 매년 브라질을 찾는 사람, 거기서 북 치는 법을 배워가지고는 수준급 연주자가 되기도 하는 사람. ‘물리학을 가지고 노는’ 사람. 기인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파인만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삶이 에너지로 가득차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정말 장난꾸러기 어린애 같았고 무엇보다 그는 호기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나 계속해서 등장하는 문구는 “그건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었다!!”는 그의 감탄사다. 난 바로 그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파인만에게 세상은 신기한 것들로 북적대는, 매 순간 아는 기쁨을 주는 거대한 놀이터였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런 건 몰라도 돼’라거나 ‘그런 건 필요없어’ 라는 말을 너무나 손쉽게 내뱉으면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알아야만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만 몸을 억지로 억지로 움직인다. 그렇게 ‘알아야만 하는 것’만 간신히 알아두고, ‘필요한 것’을 꼭 필요한 만큼만 하면서 산다. 꼭 알야아만 하는 것만 알고 꼭 필요한 것만 하는데도 삶이 그렇게 지치고 힘들 수가 없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뒤집어 보자. 알아야만 하는 것만 알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삶이 지치고 활력이 없어지는 것 아닐까? ‘그런 건 몰라도 돼’라는 냉소적인 태도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의 분류다. 그리고 그 분류의 기준은 저 멀리 어딘가에 놓여있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목표다. 대학입학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기 위해서, ‘임관’을 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이렇게 미래의 목표를 기준으로 앎의 대상을 분류하는 순간, 그 앎의 대상 자체가 갖는 매력은 증발한다. ‘아는 기쁨’ 따위는 싹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현재, 지금 이 순간 내가 머리를 싸매고 하고 있는 ‘공부’는 한같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수단으로 전락할 때, 아는 기쁨 대신 남는 것은 무기력과 억지로 이 순간을 버티며 핑계거리로 내세우는 ‘인내’뿐이다.

얼마 전, 38기 연수생들은 4학기 민사재판실무 시험을 치르고, 39기 연수생들은 민사재판실무 기록을 붙들고 씨름을 하던 날이었다. 친구 몇과 함께 독서실 세미나실에 모여앉아 되도 않는 주장 되는 주장 가리지 않고 대여섯 개나 항변(등)을 퍼부어 놓은 피고를 원망하며 끙끙거리다가,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한 친구 녀석이 잠깐 밖에 나갔다 오더니만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들여다보니 38기 민사재판실무 수시평가 자료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만, 어떤 사람이 독서실 폐휴지함에 38기 민사재판실무 기록더미 전체를 버리고 갔더라는 것이었다.

그 38기 연수생분의 심정은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4학기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는 안도감, 앞으로 지긋지긋한 저 기록더미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가득했을 것일 테다. 슬몃 부러움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찝찝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람에게 그 민사재판실무 기록더미는 시험을 보기 위한 수단 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 이름 모를 연수생 분은 기록뭉치에 적혀 있는 깨알같은 글자들을 졸음을 참으며, 눈을 비비며 들여다보고 밑줄을 치고 별표를 그려넣으며 보냈던 그 많은 시간들이 시험을 본 날 이후로는 다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음을 자인한 꼴이 되어 버린 것 아닌가.

그렇게 쏟은 지나간 시간들이 시험을 본 다음 날 이후까지도, 나아가 영원히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쏟는 매 순간 순간을 미래의 무엇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 자체를 위해서 써야 한다. 그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 물론 복잡하고 난해한 기록을 보면서 대체 뭐가 어떻게 즐거울 수 있냐고 당장에 반론이 들어오겠지만, 키튼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누구나 아는 기쁨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에는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새로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것은 그 앎의 대상이 분수의 물줄기가 되었든, 사법시험에서 나를 괴롭혔던 어음법이 되었든, 판결문 주문 쓰는 법이 되었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되었든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냉소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이 삶에서 진지함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재의 상황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면 그 자연스런 결과로 그 현재의 상황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게 된다.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라는 냉소적인 태도는 결국 현재에 온 힘을 다하지 않게 만든다.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진정한 성취감도 없고 진정한 아쉬움도 없다. 일이 잘 돼도 요행일 여지가 크니 진심으로 성취의 기쁨을 느끼지도 못하고, 못 돼도 언제나 변명거리가 남아있으니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도 없다. 무덤덤하고 그만큼 무기력한 삶의 연속일 뿐이다. 요즈음 팽배한 정치적 냉소주의 역시 이와 비슷한 결과를 불러오고 있다. 내가 찍질 않았으니 국회에 가서 앉아 있는 사람이 잘 해도 그건 어쩌다 그렇게 된 것 뿐이라서 정치적 성취감이 없고, 못 해도 그땐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냉소적 거리두기 탓에 비판과 개선의 노력은 자라날 틈이 없어진다.

호기심이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눈(또는 ‘프레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면, 냉소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냉소로 가득찬 사람은 의문을 품지 않고,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다.

대법원의 판례를 대하는 태도를 예로 들어 보자. 대법원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제기된 의문에 반론을 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문을 제기한다는 사실 자체에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난 이런 사람도 실제로 보았다), 의문을 제기하든 말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대법원의 판례도 여러 가능한 해석론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제기된 의문에 반론을 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의문을 가질 줄 모르는 사람은 그에 대해 반대 견해를 피력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데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네 번째 부류의 사람보다는 낫다. 화를 낸다는 건 최소한 판례의 태도에 대해 진지한 애정은 있다는 걸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아예 의문이 있든 말든 신경을 안 쓰는 사람, 즉 냉소적인 사람은 그 최소한의 진지함마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 부류의 사람에게 건전한 비판을 통해 발전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네 번째 부류의 냉소적인 사람에게는 그 가능성마저도 없다. 냉소는 무비판적 수용을 부르고, 무비판적 수용이 유행할 때에는 어떠한 발전도 없다. 만연한 냉소는 결국 영구적 답보상태만을 낳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연수원의 교육과정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는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험과 평가, 그리고 그에 따른 성적부여라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가시적인 미래의 목표가 놓여있는 탓에 아무리 애를 써도 현재의 시간은 그를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고 마는 구조적인 문제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해야 한다’에서 벗어나서 ‘왜 그런가’ 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 볼 기회 자체가 별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못내 아쉽다(검찰 사례연구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보라’고, 직접적으로 호기심에 문을 열어 준 과제가 나왔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

다시 ‘마스터 키튼’ 이야기를 하자면, 한 권 한 권 읽으면 읽을수록 이 만화는 ‘아는 기쁨’이 주는 생명력과 삶의 활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키튼은 ‘저는 아직 알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살인을 결심한 어느 학생은 동급생인 키튼이 학교 벽에서 화석을 발견하고 눈을 빛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광경에서 감화를 받아 살인을 포기한다. 어쩌면 현재를 아직 오지 않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에 담보잡히지 않고 현재 그 자체로서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가장 훌륭한 원동력이 바로 호기심이 아닐까.

거울을 바라보고 서서 스스로를 들여다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냉소란 녀석이 마음 한켠을 잠식해 들어와서는 어느새 그 그림자를 크게 드리우고 있었다.

마음 속에 들어와 앉은 냉소를 털어버려야겠다.
그러면 그 녀석과 함께 스리슬쩍 찾아와 자리잡고 앉아 있던 무기력도 함께 나갈 것이다.

빈 자리는 호기심으로 채우자.
그러면 ‘아는 기쁨’이 덩달아 찾아들 것이다. 틀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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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7 00:05 2008/10/27 00:05
  1. Gun Kim
    2008/11/03 13:54
    마스터 키튼을 주제로 이렇게 길고 철학적인 이야기꺼리를 끄집어내다니...^^

    삐뚤어진 열정은 냉소보다도 해롭지만, 기본적으로 삶에서 호기심 - 난 이것을 '열정'이라고 보는데 - 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는 호기심 또는 열정에의 동경은 있는데 게을러서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듯~
    • onecent
      2008/11/14 01:08
      살아가는 데 열정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싶어 요새는 진짜.
      열정을 잃으면 곧 늙어버렸다는 것과 다름없겠지.
      뭐든지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야겠어. 열심히 실패하고 열심히 좌절하는 게 어영부영 물타기하면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을테니까..

      나도 게을러서 탈이야. 이렇게 글 쓰면서 스스로 돌아보고 하는수밖에 없는듯.
  2. Suryo
    2008/11/11 20:14
    안녕하세요. 사법시험 공부 중인 학생입니다. 신림에서 집이 있는 일산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어 독서실을 검색하던 중에 님의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연수원생이신 분의 글이라는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지만 읽는 도중 저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멋진 글이네요. 멋진 생각이고요. ^^

    말씀하신 대로 냉소는 나이를 먹으면서 무기력과 함께 저도 모르는 사이 젖어드는 것 같습니다. 아무 의문도 가질 필요 없고 그러니 자신의 한계를 절감할 필요도, 노력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게 만들어주는 편리한 태도지요. 덕택에 저도 시험을 위한 공부라는 생각에 최소한의 의문조차 떨쳐버린, 무기력한 암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onecent
      2008/11/14 01:11
      안녕하세요.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사법시험 공부란 게 지극히 목적적이라..공부 자체에 흥미를 갖고 해 나가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특히나 암기에 치우치게 되는 1차 시험이 더한 것 같구요(저 같은 경우는 2차 시험준비가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지루한 공부를 하고 계신다니 진심으로 건투를 빌겠습니다.
      제가 글에서 쓰진 않았지만 연수원은, 시험의 압박이 큰 건 틀림없지만 꽤나 재미있는 곳입니다. 꼭 합격하셔서 연수원생활도 재밌게 하시길.
  3. hy
    2008/12/15 10:18
    이렇게해도 알아?ㅋㅋ다들 실명안쓰니까 나도 따라해봤어.
    어제 감동받아서 여기 와서 예전에 읽었던 글들 다시 보면서 혼자 새삼 감동받고 있어.(그럼 공부는 언제?;;;;;)
    그치만 이런 시간으로 인해서 마음속에 잠시 덮어놓았던 불꽃이 조금씩 다시 생겨나면 그게 더 좋은거겠지?(라고 위로를..ㅠ)
    히히. 진짜 좋은 친구야. 넌.
    너도 주위사람들에게 열정.을 전염시키는 사람이야^-^
    • onecent
      2008/12/21 11:57
      쉴 때 쉬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해야 공부도 잘 되는거지. 쉴때 너무 죄책감 느낄 필요 없다고 봐 난.ㅎㅎ

      열정을 전염시키는 사람이라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과찬이구나. 나도 분발해야겠어.
  4. 가넷
    2009/01/16 09:15
    고맙다. 나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
    열정 바이러스의 숙주. 맞구만. ^^
    너도 그런 마음 늘 잊지 말고.
    언제 시간 날 때 만났음 좋겠네.
    (실제로 보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서먹할 듯)
    요즘 무척 추운데 건강하고~
    • onecent
      2009/01/21 20:08
      열정 바이러스의 숙주. 멋있는 표현인데요.ㅎㅎ
      물론 아직 저한테 어울리는 말 같진 않습니다만;

      저도 언제고 한 번 뵜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오프라인에서 보는 건 처음 아닌가요?
      형하고는 온라인상으로밖에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사포동 시절에는 오프모임에 거의 안 나갔었거든요;







조커와 배트맨. 그들은 서로 정 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들에게 비슷한 점이라곤 눈에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다.

배트맨이 입고 있는 건 검은색뿐이다(금빛을 띠는 벨트만 제외한다면). 그리고 그 검은색 전투복은 치밀하게 계산되고 디자인된 최첨단 기술의 산물이다. 쭉 뻗은 직선과 늘씬하게 뻗은 곡선이 어우러진 배트맨의 망토와 전투복은 딱 보기에도 멋지다. 우리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황금비율, 비례. 그런 것들을 배트맨의 전투복은 잘 갖추고 있다. 잡티 하나 안 보이는 말쑥한 검은색 또한 엄숙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이 세상 모든 색깔을 섞으면 결국 검은색이 된다고 했던가. 조커는 검은색 속에 감춰져 있던 화려한 색깔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 같은 모습이다. 머리카락에선 초록빛이 돌고, 얼굴엔 새하얀 분칠을 하고 그 위에다 시뻘건 원색으로 커다랗게 비뚤비뚤한 입술을 양 볼에 죽죽 그어 놓았다. 그뿐인가. 입고 있는 옷은 원색에 가까운 보라색이고, 행여나 노란색이 자기만 빼놨다고 서운해할까 싶어서 이빨은 온통 누렇게 칠해 놓았다(칠한 건지, 안 닦아서 상한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배트맨은 고담시의 질서를 상징한다. 그는 부패와 범죄로 가득찬 무법지 고담시에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한다. 나쁜 놈은 잡아 가두고, 나쁜 놈한테 당하는 좋은 놈은 구해 주고.
인간 세계에서 법질서를 엄정하게 확립하는 데 있어 언제나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 집행자 또한 감정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아픈 어머니 병원비를 대려면 어쩔 수 없이 경찰도 갱단과 뒷거래를 하고(라미레즈 형사처럼), 그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법적 절차 같은건 무시하고 사람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협박하고 하게 되는 것이다(하비 덴트처럼).

그러나 배트맨은 사람이 아니다. 진정으로 법질서를 확립시키는 존재가 되려면 배트맨은 사람이 아니어야만 한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이미 이 점을 간파했다. 그는 말했다 : 악당들이 그 이름만 듣고 두려워할 존재가 되어야 한다 - 상징(symbol)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부패시킬 수 있고, 죽일 수 있고,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상징은 부패되지 않는다. 죽지도 않는다. 그 어떤 녀석도 상징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래서 브루스 웨인은 자기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가면을 뒤집어쓰고 정체를 숨긴 '박쥐'라는 상징으로서 범죄와 싸우기로 한다.

중요한 건 그렇게 인간성을 탈피한 상징이 된다는 것이지, 그 상징으로 뭘 택할지가 아니다. [비긴즈]에서 알프레드는 묻는다. "왜 하필 박쥐입니까"라고. 브루스 웨인의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박쥐들을 무서워하니까. 이제 내 적들도 내 공포를 함께 느낄 때다." 굳이 그 상징이 박쥐가 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거미라도 좋고 잠자리여도 그만이다. 중요한 건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법질서 그 자체, 악에 대항하는 선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에 반해 조커는 무질서 그 자체다. 그의 움직임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뭘 할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는 수수께끼다. 영화 내내 조커는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우리를 놀래키고, 반대로 우리는 그 녀석이 언제 튀어나올 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영화가 시작하는 은행강도 장면을 떠올려 보자. 조커에 의해 고용된 사람인줄만 알고 있던 가면쓴 녀석들 중 한 명이 갑자기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모두....날 더 이상하게 만든다"고 내뱉으면서 가면을 벗고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자 조커의 그 기괴하게 생긴 얼굴, 그 섬뜩한 웃음 - 사실 언제나 웃고 있는 얼굴이긴 하지만 - 이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운다. 이처럼 첫 등장에서부터 그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왔다.

고담시 시장이 하비 덴트와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창밖을 내다본 순간, 갑자기 배트맨 옷을 입은 사람의 시체가 창문에 쿵 하고 와서 부딪친다. 공포영화 보는 것처럼 관객의 심장은 떨어진다. (나와 같이 영화를 보던 친구는 심지어 두 번째 보는 것이었으면서도 이 때 의자에서 떨어질 뻔하더라ㅋ)

하비 덴트를 태운 호송차가 감옥을 향해 가는 도중, 웬 거대한 트럭 하나가 길에서 빵빵댄다. 단속을 위해 경찰관이 창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조수석에서 조커가 장총을 들고 튀어나와 경찰을 쏴 버린다.
모두가 탈출한 병원 안. 경찰관 하나가 남은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간다. 뒤돌아 서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돌리며 갑자기 경찰을 총으로 쏜다. 마스크를 벗으니 그 간호사 또한 조커였다.

조커의 등장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는 영화 내내 갑자기 나타나 관객을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도 고담시 전체를 언제나 놀라게 한다. 그 누구도 그가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에겐 규칙이 없다. 그에겐 어떠한 규범도 없다. 조커 스스로가 자신을 칭하는 것처럼, 그는 '혼돈의 사자(Agent of Chaos)'다.

질서의 사자 배트맨. 혼돈의 사자 조커.
질서 대 혼돈. 그 치열한 대결을 그린 것이 [다크나이트]일까? 조커는 체포되었고 배트맨은 어쨌든 힘겹게나마 살아남았으니, 혼돈을 없애고 질서가 승리한 것일까?

나는 [다크나이트]가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질서의 사자 배트맨, 혼돈의 사자 조커. 그리고 그 둘의 대결.
여기까지는 그렇게까지 흥미로운 구석이 없다. 나쁜놈하고 착한놈하고 싸우는 영화 한두 개 봤나 뭐. 여기서 끝이라면 [다크나이트]는 [배트맨 비긴즈]나 [슈퍼맨 리턴즈], [스파이더맨]과 다를 게 없다.

[다크나이트]가 흥미로워지는 건 바로 질서와 혼돈 사이의 관계, 즉 배트맨과 조커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부터다.

조커가 처음 갱단 두목들의 회합장소에 불쑥 나타나서 '배트맨을 죽이자'고 제안했을 때까지만 해도, 배트맨은 물론이고 관객들 모두 그것이 진짜 조커가 원하는 바인줄 안다. 다른 갱단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조커도 배트맨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다들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조커는 배트맨을 없앨 생각이 전혀 없다. 배트맨과 경찰 취조실에서 대면했을 때, 배트맨이 "날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조커는 낄낄거리며, 예의 그 광기어린 파안대소를 퍼부으며 이야기한다. "널 죽이다니?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아마도 Where would I be without you? 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 조커는 배트맨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트맨이 계속 살아 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자신과 계속 놀아 줬으면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처음 방송국에 보낸 협박 영상 - 배트맨 흉내를 내던 사람을 살해하는 동영상 - 에서 조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배트맨 때문에 고담시 시민들이 어떻게 됐는지 봐. (그리고는 카메라를 돌려 자신의 얼굴을 화면에 보여준다) 이렇게 미쳐가고 있잖아."

이 협박 영상을 보고 난 뒤 브루스 웨인과 알프레드가 나누는 대사는 더 의미심장하다.
"이건 도가 지나쳐. 갱단 녀석들이 선을 넘었어."
"주인님께서 먼저 선을 넘었지요. 저들을 너무 압박하고 코너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러자 절박해진 저들이 그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끌어들인 겁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배트맨 때문에 조커가 나타났다.
고담시에 배트맨이 나타나기 전에는 조커 또한 없었다. 조커는 배트맨의 필연적인 부산물이다.
상징화는 언제나 상징으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잔여물을 남긴다. 일견 완전해 보이는 질서체계는 언제나 그 가장 근원적인 지점에 균열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생각해 보라).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와 그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언어가 가장 대표적이다) 사이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가 '책상'이라는 말로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을 지칭할 때, 그 사물과 '책상'이라는 기호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불일치가 발생한다('책상'이라는 말은, 모든 단어가 그렇듯이, 일반개념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책상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인 것이다). 또, 내가 '책상'이라고 하면서 떠올리는 의미와 다른 사람들이 '책상'이라는 기호를 통해 떠올리는 의미는 절대로 똑같지 않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를 언어를 통해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그 언어를 가지고 완벽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더 불가능하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자신의 인식에 근거해서 조종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수많은 개념들을 통해 정치하게 짜여진 법질서를 통해 인간은 세계를 조종하려고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교과서를 통해 민법이나 형법의 해석론을 볼 때는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다가도, 실제 사례에 법을 적용할 때는 언제나 애매하고 어딘지 잘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 드는 것을 떠올려 보라).

그렇다면 우리가 질서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우리가 기호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가는 것, 하나의 체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바로 그 질서가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성을 잊음으로써, 그것을 외면함으로써이다. '책상'이라는 말로 서로 떠올리는 의미는 같지 않지만, 그 대강의 뜻은 통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차이를 잊는다(외면한다). '책상'이라는 말에는 고정된 하나의 의미만이 있는 것이라고 믿어 버린다. 그런 외면, 그런 거짓말을 통해 체계는 비로소 성립할 수 있다.

정치한 질서라 함은 곧 그러한 불완전성이 아주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 사람들이 불완전성을 너무도 잘 잊고 있는, 모두들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질서를 말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계의 불완전성, 질서 속의 균열을 언제까지고 감출 수 없다. 질서의 성립 저편에 감추어져야만 했던 잔여물들, 질서 속에 포섭되지 못한 채 남아있던 나머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생긴다. 그 잔여물들은 말 그대로 질서의 바깥에 있는 것들이기에 질서체계 속에서 그것들은 인식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음이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질서 속에 서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잔여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규칙이나 합리성을 거부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끔찍하게 공포스러운 것으로 다가온다. 바로 '혼돈 그 자체'인 것이다.

배트맨이라는 무자비하게 엄격하고 정치한 질서가 출현했다. 부패경찰은 점점 없어져 가고, 뒷골목을 주름잡던 범법자들은 이제 밤을 두려워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부패시킬 수도, 죽일 수도, 쓰러뜨릴 수도 없는 완벽한 질서가 나타난 것이다. 고담시에는 배트맨과 함께 안정된 질서가 확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한 질서체계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질서가 포섭하지 못하고 남겨둔 잔여물이 그동안 감춰져 있던 모습을 마침내 드러내고야 말았다. 언뜻 보기에 너무나도 완전해 보이는 질서체계였기에 그 균열이 나타나면서 일으킨 충격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띠끌 하나 안 보이는 완벽한 검은색 저편에 남겨져 있던 초록색하얀색빨간색노란색보라색 - 바로 조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시 말해 배트맨이 없다면 조커는 존재할 수 없다. 거꾸로 조커 없이 배트맨 또한 존재하지 못한다. 질서 체계는 일정한 잔여물을 남길 수밖에 없고 동시에 그 잔여물을 남겨야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커는 배트맨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죽일래야 죽일 수가 없다. 그리고 배트맨 또한 조커를 죽이지 못한다.

이러한 둘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바로 배트맨이 오토바이를 타고 전속력으로 조커에게 돌진해 가는 장면이다. 어느 한쪽 없이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두 존재가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날 들이받아! 날 들이받아봐!" 라고 외치는 조커를 끝내 배트맨은 오토바이로 들이받지 못한다. 마치 무슨 초자연적인 힘에 이끌린 것처럼, N극과 N극이 서로 부딪치는 것처럼 배트맨의 오토바이는 마지막 순간에 조커를 비껴가고 만다.

배트맨은 거기서 조커를 피해갈 수밖에 없다.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어길 수 없으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배트맨은 분노에 찬 신음을 흘리며 조커를 죽여 버릴지를 고민하지만, 그 때 고민하는 것은 질서의 상징 박쥐가 아니라 가면 뒤에 있는 인간 브루스 웨인이다. 감정을 사상해 낸 법질서 그 자체로서의 배트맨으로서는 그 순간 조커를 죽이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영화 마지막의 대결에서 조커를 건물에서 스스로 집어던져 놓고도 끝내 그의 발을 붙잡아 끌어올릴 수밖에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것이 배트맨과 조커의 숙명이자, 질서와 혼돈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다. 거꾸로 매달린 조커가 이야기하지 않던가.

"아마 너하고 나는 이 짓을 평생동안 계속하게 될거야..."


이처럼 배트맨이 있는 곳에 언제나 필연적으로 조커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고담시는 어찌 되는건가? 괜히 애꿎은 사람들만 계속해서 조커의 테러에 죽어나가야 하는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도무지 예측할 수도 없는 이 혼돈을 어떻게 감당해 내란 말인가? 실제로 영화에서 조커의 테러행각에 고담시는 전체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인다. 공포는 무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돈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럽다. 알프레드가 말한 것처럼, 조커는 "타협할 수도 없고, 윽박지를 수도 없고, 매수할 수도 없는 사람", "그냥 세계가 불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커'라는 혼돈은 혀를 날름거리며 고담시 전체의 질서를 뒤엎어버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질서의 '성립'이 필연적으로 혼돈을 수반한다면, 질서의 '유지'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 혼돈을 잊어버림으로써만 가능해진다. 포섭되지 못한 균열, 혼돈의 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은폐되어야 한다. 즉, 우리에겐 우리의 질서가 완전하다는 환상, 일종의 거짓말이 필요하다.

이건 비단 사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존재양식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의 행동을 낳는 욕망 체계는 실상 그 한가운데 본질적인 균열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균열은 환상에 의해 지탱된다. 사람들은 그 본질적 균열, 그 공허를 잊기 위해 뭔가 하나의 대상을 붙들고 그 대상만 쟁취하면 우리 욕망은 만족되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입학 시험만 합격하면 된다. 사시만 붙으면 된다. 취업만 하면 된다. 저 사람의 사랑만 얻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경험을 통해 알듯이, 그 어떤 대상도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대학 합격했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사시 붙었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다. 취업하면 그때부터 또 첩첩산중이다. 그 사람의 사랑을 얻었다고 해서 내 공허함이 메워지지는 않는다. 우리 삶의 근본적 무의미성은 끝내 완전히 채워지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가슴 한가운데 뻥 뚫린 구멍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하나의 목표를 붙들고 그 목표를 달성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행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대입시험이, 사법시험이 또는 취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라고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양식이 거짓말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 것이 바로 [다크나이트]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의 전작 [메멘토]였다. [메멘토]의 충격적인 결말에서, 우리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레너드가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의 삶의 전부는 바로 자신의 아내를 죽인 살인자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 살인자는 이미 잡혔으며 아내는 사실 자신이 실수로 죽였다는 것이 진실임을 레너드는 깨닫게 된다. 감당하기 힘든 진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공허와 대면한 레너드는 그 순간 자신의 단기 기억상실증을 이용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엉뚱한 사람이 살인자라고 메모를 해 둔 것이다. 그리고는 말한다. '거짓말을 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이제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인 레너드는 조금전까지 있었던 일은 다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해 둔 메모를 보고는 정말 그 사람이 살인자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렇게 레너드는 영원히 환상 속의 살인자를 쫓아가며 살아갈 것이다(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크나이트]로 돌아와 보자. 레이첼이 죽고 난 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브루스 웨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다. 알프레드가 아침식사를 들고 다가온다. 아침식사를 담은 그릇에는 레이첼이 미리 써 둔, 브루스 웨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놓여 있다. 편지에서 레이첼은 브루스 웨인을 떠나겠다고, 배트맨이 없어진다 해도 그에게 가지는 않겠다고 써 놓았다. 알프레드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브루스 웨인이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뭐에 홀린 사람처럼 내뱉는다. "레이첼이 기다려준다고 했었는데..."라고. 그 순간 알프레드는 편지를 도로 가져간다. 그리고 그 편지를 불태워 버린다.

이것이 바로 브루스 웨인에게 필요한 거짓말이다. 레이첼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언젠가 배트맨을 그만두면 사랑하는 레이첼과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는 것.
이는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어야 브루스 웨인은 계속해서 가면을 쓰고 배트맨 짓을 할 수 있다. 브루스 웨인이 바라는 것은 배트맨 없는 '정상적인 삶'이다. 그런 정상적인 삶이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야만 힘든 배트맨 생활을 하루하루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미 브루스 웨인에게 배트맨을 그만두고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건 불가능할 지 모른다(레이첼 역시 영화에서 그 점을 지적했다). 고담시에 배트맨은 영원히 필요하다. 브루스 웨인에게 다시는 정상적인 삶이란 없다. 그러나 그 점을 깨닫는 순간 브루스 웨인은 삶의 의미를 잃고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레드는 편지를 태워버려야만 했다. '정상적인 삶'이 손 닿을 거리에 있다는 거짓말이 브루스 웨인에게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고담시 사람들에게는 영웅 하비 덴트라는 거짓말이 필요하다. '하비 덴트는 죽는 순간까지 타락하지 않고 악에 맞선 영웅이었다. 나쁜 놈은 배트맨이다. 그녀석 때문에 일이 다 잘못됐다.'라는 것짓말, 바로 이 거짓말 때문에 조커라는 혼돈을 은폐하고 비로소 고담시의 질서는 유지될 수 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것은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다(고담시 사람들이 왜 조커를 탓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조커가 바로 혼돈 그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는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배트맨은 다르다. 그는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자,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녀석이다. 게다가 아무도 그의 실제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 그는 그냥 상징에 불과하기 때문에 - 거꾸로 그 녀석에게 뭐든지 덮어씌울 수 있다. '이게 다 배트맨 때문이다'라고. 마지막 장면에서 배트맨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난 고담시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될 수 있다."

마지막 장면, 배트맨은 자기 탓이라고 거짓말을 하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만으론 부족하다. 때론 사람들에겐 진실 이상이 필요하다..." 그렇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선 진실이 아닌 진실 이상, 환상이 필요한 것이다. 비난을 감수하기로 결심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함으로써 배트맨은 자기 몸으로 조커가 열어 놓은 균열을 틀어막으면서 고담시의 환상을 완성시킨다.

이제 비로소 고담시 사람들은 패닉상태에서 벗어나 질서 속에서(비록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해도)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질서의 불안전성이 잠깐잠깐 드러나는 순간은 계속 있을 것이다. 범죄는 여전히 발생할 것이고,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고담시가 혼란의 도가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다 배트맨 때문이다'라며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으니까. 배트맨만 잡으면 된다고 믿을 테니까.

(그러나 우리는 고든 경찰청장이 결코 배트맨을 잡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고든은 배트맨을 잡지 않아야만 한다. 배트맨이 체포되는 순간 고담시의 환상 또한 깨져버리니까. 배트맨은 영원히 도망다니면서,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고담시의 모든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뒤집어써 줘야 한다.)

고담시의 질서 그 자체인 배트맨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 질서를 파괴하는 무법자인 것처럼 거짓말을 해야만 고담시의 질서를 유지시킬 수 있다. 그래야만 질서에 대한 근원적이며 해결 불가능한 위협인 조커를 은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배트맨은 결코 '백기사'가 될 수 없다. 그는 고담시를 지탱해 주는 기사지만, 스스로 모습을 숨김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사, 바로 '암흑의 기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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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3 17:55 2008/08/23 17:55
  1. 김이슬
    2008/08/25 23:58
    아, 고정닉을 더 이상 고수하기엔
    내가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어...;

    난 오히려 배트맨도 조커 류의 잔여물, 실재라고 생각했었는데
    저렇게 생각하는게 좀 더 아귀가 맞아떨어지겠네.
    • onecent
      2008/08/27 00:40
      나는 아직 고정닉을 고수하지 못할 만큼 세상을 알지는 못하니까 그냥 이대로 쓰겠다..ㅎ

      메멘토도 그렇고 이번 다크나이트도 그렇고.
      크리스토퍼 놀런(또는 그와 두 작품 스토리를 같이 쓴 동생 조너선 놀런)은 정신분석의 세계관을 알고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단 말이야.. 어쨌든 이래저래 놀라운 영화였어.







2005~2008년 피닉스 선즈의 S.S.O.L.(Seven Seconds or Less) Era - '7초 이하' 시대에 대한 추도미사.
http://sports.espn.go.com/espn/page2/story?page=simmons/080501

지난 몇 년간 내쉬와 댄토니를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다음에는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서, 마지막에는 참기 힘든 안타까움으로 바라본 팬으로서 참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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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2 23:09 2008/05/02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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