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클 잭슨에 대해서, 음악과 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영화를 보여 줬다고 치자.
당장에 그 사람은 눈을 휘둥그래져서 이렇게 물을 것이다.
"저 사람 대단한 사람이지? 한 가닥 하는 사람이지?"
노래 좀 한다고 뻐기는 자, 춤 좀 춘다고 으스대는 자, 공연 좀 해 봤다고 재는 자.
그 시건방진 입을 다물라.
이런 영화로나마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그가 없어서 너무나 안타깝다.
This Is It.

금방 [트랜스포머 2 : 패자의 역습] 관람을 마쳤다.
이렇게 요란하게 때려 부수고 시끄럽게 쿵쾅거리는데도 지루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그게 감정이고 또 감동인 거지, 억지로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는다고 감정이 생기는 게 아니다.
메간 폭스한테 핫팬츠 입혀 놓고 일부러 야한 앵글로 줌을 당긴다고 섹시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요, 황혼을 배경으로 깔고 슬로모션으로 폭발 장면을 잡는다고 웅장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고, 쓰러진 주인공 주변에 침통한 표정으로 오열하는 가족, 애인, 친구들을 늘어놓고 (또) 슬로모션으로 그 주변을 빙빙 돌린다고 감동이 생기는 게 아니다.
볼거리 뿐인 영화다.
끝내주게 멋진 장면은 분명 군데군데 등장하지만, 그뿐이라면 두시간 반이 아니라 십분짜리 뮤직비디오로 만드는 게 이래저래 경제적일 터.

웨돔 분수광장 바닥을 장식했던 범블비
나는 봉준호가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현 상황과 문제점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연출한 영화를 나는 세 편밖에 보지 못했다. [살인의 추억], [괴물] 그리고 최근 개봉한 [마더].
그러나 위 세 편의 영화에는 일관된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나는 그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그 문제의식은 바로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이다.
봉준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언제나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그들 혼자서(마더), 또는 둘이서(살인의 추억), 또는 일가족만으로는(괴물) 해결하기에 너무나도 벅찬 것들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문제들은 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문제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며, 그 해결을 위해 사회적인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연쇄강간살인범을 잡는 것, 그것은 두 명의 형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현서를 납치해 간 것은 한강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봉준호의 비유를 그대로 따라간다면_여기엔 미군이 한몫했다)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은 비단 현서뿐만 아니라 모든 서울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가 나서서 괴물을 잡아야 옳다.
여고생 살인사건의 진범을 잡는 것 또한 마더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나서서 진범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개개인이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시스템은,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연쇄살인범의 신발자국과 같은 중요한 증거는, 현장보존과 같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절차 미숙 때문에 무참히 사라져 버린다. 또 한 사람의 희생자를 막기 위해 경찰력 증원을 요청하지만, 시위 진압에 이미 경찰력을 모두 동원한 상부에서는 증원 요청을 거절한다. 수사 시스템은 군홧발로 엄한 피의자를 두들겨패는 식으로만 작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식의 시스템 운용은 무수한 희생자만을 낳고, 문제 해결에는 실패한다. 너무나도 범인을 잡고 싶었던 형사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혐의를 받던 바보 피의자는 자살한다. 군홧발로 그 바보 피의자를 두들겨패던 형사는 그 군화를 신을 오른발을 잃고 만다.
국가는, 느닷없이 나타나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괴물을 잡는 것보다는, 명확히 검증도 되지 않은, 괴물이 보유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그토록 방역에는 결벽증과 같은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작 괴물을 잡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괴물을 잡는다고 뿌린 오렌지색 가루는, 그 오렌지색 가루 살포와 정부의 대응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던 사람들을 진압하고 있던 경찰관의 목숨은 앗아가지만 정작 괴물을 죽이지는 못한다. 괴물을 죽이는 건 현서네 가족이다. 그나마도 이미 현서는 죽은 뒤에. 심지어 그 난리를 겪고 나서도, 현서 대신 새로 생긴 아들을 지키는 건 국가가 아니다. 여전히 송강호는 총을 곁에 두고 스스로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한다(마지막 장면).
[마더]에서도 경찰, 변호사, 검사 등 진범을 잡기 위해서, 그리고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 마련되어 있는 사회적 시스템은 전부 다 실패하고 만다. 경찰은 바보 피의자를 두고 엉터리 자백을 받아내고, 변호사는 상담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연줄을 이용해 유야무야 사건을 처리하려 한다. 검사는 변호사가 사 주는 술을 처먹고 술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을 뿐이다. 피해자의 주변 인물을 조사하고, 피해자의 행적을 추적하는 등 응당 수사기관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국가에 의해 수사권이 부여되어 있는 수사기관이 아니라, 아무런 권한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마더 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문제의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희생자들은 생겨난다. 모든 걸 다 제껴놓고 나의 안위를 위해 고군분투해줄, (한국의) 엄마가 없는 어떤 사람, 그리고 마더까지도. 마더와 도준이의 밥상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위 세 영화에서 모두, 주인공들은 정말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 노력한다.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그러나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없다. 도와 주라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혀 놓은 사람들은 그들을 돕지 않는다.
정말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그리고 위 세 영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은,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의 말을 통 들어 주질 않는다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 다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고, 자신의 편견만으로 대화를 이끄는 사람들.
송강호가 [괴물]에서 마취약의 기운과 처절하게 싸우면서 억지로 입을 움직여 간신히 내뱉던 말이 뭐였는지 기억나는가? "왜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 주는거야"였다. [괴물]을 두고 반미영화네 뭐네 열심히 떠들지만, 내게는 저 말이 가장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렇다. 지금 여기,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바로 그런 곳이다.
어느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엄마, 아무도 믿지 마."). 문제 해결을 혼자 힘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사회.
그렇게 타인에 대한 신뢰가 증발하고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대한민국에서 나를 지켜 주는 건 결국 가족 뿐이다.
그리고 가족들끼리 지켜 주는 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엄마가 아들 지켜주는 때이다. 기묘하게도 [괴물]에선, 바로 이 가장 강력한 연대관계가 쏙 빠져있다. 엄마가 아닌 사람들(아빠, 할아버지, 삼촌, 고모)이 아들이 아닌 사람(여자아이)을 지키내기 위해 힘을 합친다. [괴물]의 가족들보다 [마더]의 엄마가 결과적으로 조금이나마 더 문제해결에 성공하는 건 우연일까? 그게 우연이든 감독의 의도든 간에, 우리나라에서 아들 살리려고 덤비는 엄마를 당할 사람이 없는 건 분명하다.
개인 스스로, 또는 가족들끼리 문제를 해결하게끔 내버려 두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결국 문제 해결에 실패하고 만다. 그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태생부터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문제이기도 하고, 애초부터 혼자 힘으론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혼자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도 힘을 합쳐서 해결하기 위해,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는 '국가'란 놈을 만든 것 아닌가? 연쇄강간살인범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납치된 딸을 무사히 되찾기 위해, 아들이 별다른 증거도 없이 살인범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경찰, 검찰, 군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만들고, 무죄추정의 원칙이니 신체의 자유니 하는 것을 헌법에 적어 놓은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놓은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우리가, 엄마가, 아빠할아버지고모삼촌이 나서야 하는가? 그것도 무력하기 짝이 없는 공기총, 양궁, 화염병, 쇠파이프를 들고서? 대포와 탱크, 기관총과 미사일은 어디 갔는가?
봉준호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문제를 던지고 있다.
[살인의 추억]은, 시스템이 처참하게 실패했던, 명백하게 국가가 사람들을 위해 작동하지 않던 독재정권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봉준호가 서 있는 시점은 그 때가 아니라 지금이다. 경찰 일을 그만두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송강호의 모습을 영화 막판에서 보여 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제목에 '추억'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일종의 회고담이다. 봉준호는 그 시절을 오늘날에 서서 되돌아보고 있다.
거기서 그냥 끝났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달라졌으니까, 독재정권은 없어졌으니까, 더 이상은 군홧발로 피의자를 두들겨패는 식으로 피의자를 신문하지는 않으니까, 이제는 법의학도 발전하고 수사기법도 과학화되었으니까, 봉준호는 그저 과거 우리 사회가 지녔던 문제점을 되새겨 보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말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괴물]이 나왔다.
[괴물]에서 봉준호는 말한다. 달라지지 않았다. 독재정권이 없어졌을지는 몰라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키게끔 내모는 곳이다. 사람들이 한강에 뛰어들게끔 내모는 사회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내몰다간, 뛰어내린 사람들을 먹고 자란 괴물이 한강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그나마도 이제껏 그 괴물을 잡은 것은 화염병과 쇠파이프였다. 그러나 그런 식의 대응은 너무나도 희생이 크지 않았던가. 다음에 괴물이 튀어나오면, 그 때는 어쩔 것인가. 이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살인의 추억]을 [괴물]보다 더 재미있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백 년 후 이 시대의 진정한 고전으로 평가받을 만한 영화는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대의 문제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영화, 그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영화('재밌게 잘 찍은 영화'라는 점도 분명히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괴물의 CG가 어설프니 어쩌네 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부차적인 문제다. CG의 질은 영화의 훌륭함을 결정하는 데 아주아주 미약한 영향력밖에 없다(어이 심감독님, 당신한테 하는 이야깁니다).
[마더]는, [괴물]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의 큰 틀을 따라가면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고유한 상황 - 엄마와 아들 간의 강력한, 유별난 유대관계 - 을 새로이 추가해서 보여 준다. 엄마와 아들 간의 유별난 유대관계가 정확하게 어떠한 사회적 문제상황을 구성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길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의 특징적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낳는 현상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한번 고민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마더] 또한 훌륭한 영화다.
봉준호의 문제의식은 결국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나타나는 상황이 제기하는 문제와 동일한 것이다.
개인의 초인적 노력을 강요하는 사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 그래서 피곤하고, 살기 힘든 사회.
[우생순]은 그러한 사회를 기적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헤쳐 나가는 극히 소수의 영웅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영화다.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의 눈물과 땀이 얼마나 멋있는지.
한편 봉준호는 그러한 사회 속에서 실패하고 마는 나머지 절대 다수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어쩌지 못하고 마는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인지.
[마더]를 보면서 나는 계속해서 [괴물]이 떠올랐고, 또 [바벨]이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가. 그들의 말을 우리는 과연 듣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서로가 하는 말을 조금만 더 귀담아 듣는다면, '그럴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면 좀 더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도 신뢰의 끈으로 묶고, 그렇게 해서 거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을 위하여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옷가게에 들어가서 청바지를 고를 때 보는 건 일단 두 가지다.
먼저 색깔과 워싱처리된 무늬를 포함한 모양새를 본다. 그리고 나선 마음에 드는 녀석은 가격표까지 본다.
가격까지 마음에 든다면 - 가령 "디젤인데 50퍼센트 세일"이라거나 하면 - 입어보게 사이즈를 찾아 달라고 점원에게 물어 본다(혹자는 캐시미어라면 가격조건은 아예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아무리 걸려 있는 걸 보고 마음에 들어도, 입어 보고 난 뒤에까지 마음에 드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정말 간혹이지만, 입어 보고 나서 단순히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그래바로이거야"라는 기분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런 "그래바로이거야" 청바지라고 하더라도, 키는 작으면서 작은 키에 비해 허리사이즈는 크게 입는 나로서는 바지 길이를 줄여 입어야 한다. 잘려나간 바짓단은 도로 이어 붙일 수 없는 일이기에 수선을 맡길 때는 길이를 좀 적게 줄이게 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한 번 줄여 입고 다니다가 또 한 차례 수선을 맡겨야 하는 일도 발생한다.
길이까지 딱 좋게 줄여서 줄기차게 입고 다니다 보면, 그 바지를 입는 요령이 쌓인다.
배불리 먹었을 때는 벨트를 한 칸 풀어서 채우고, 야트막하고 폭이 좁은 캔버스화를 신을 때는 끌리지 않게 한 칸 조여서 채운다. 길이가 긴 티셔츠에 맞춰서 헐렁하게 입을 때는 내려 입고, 내려 입었다간 허리가 너무 길어 보인다 싶으면 좀 올려 입는다(그러나 어지간해선 허리에 맞춰 입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요령이 쌓인 상태에서 계속 줄기차게 입고 다닌다. 그러면 청바지가 몸에 적응하는 건지 몸이 바지에 적응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옷감은 데님인데도 흡사 츄리닝을 입고 다니는 것처럼 편하기 그지없는 상태가 된다.
드디어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은 궁극의 경지에 도달했나 싶으면, 바로 그 순간
바지가 해져서 찢어져 버리고 만다. 원래부터 찢어서 판 바지가 아니었으니 찢어진 게 보기 좋을 리 없다.
거 참. 요새 바지는 옷감도 튼튼한 걸로 만들텐데 내가 험하게 입는 건지 아니면 불량품인 건지.
그러고 나면 다시 "그래바로이거야" 바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아니면, 그냥 찢어진 데를 수선해서 입고 다닐까?





얼마 전부터 만화 ‘마스터 키튼’을 사 모으고 있다. 한 권 한 권씩 포장비닐을 뜯어 읽고 나서 책장에 차곡차곡 꽂아 넣으니, 만화가 재미있는 건 물론이요, 일산에 이사 오면서 새로 산 책장 한 칸이 조금씩 채워져 나가는 걸 보는 재미도 만화 못지않게 쏠쏠하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만화 가운데서는 ‘마스터 키튼’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 여러 개의 짤막한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잠깐 보고 금방 책을 덮을 수 있어서 좋고,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점이 무엇보다 좋다. 게다가 우라사와 나오키 특유의 둥글둥글하고 오버하지 않는, 설득력 있는 그림체가 그 내용과 잘 어울린다(만약 이 만화의 그림체가 수박만한 눈동자에 종이가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콧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순정만화 그림체였으면 이 만화는 부조리 그 자체가 되어 버렸을 거다).
‘마스터 키튼’ 3권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곧 폐교될 처지에 놓인 한 사회교육원의 마지막 강의의 마지막 시간, 강의를 맡은 주인공 키튼이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학교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계속 공부해 달라는 겁니다. 사실 저는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자신감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지내던 중에 깨달았습니다. 공부할 정열이 있는 한…강의할 학교를 잃더라도 공부를 계속해 갈 겁니다.
인간은 왜 공부해야 하는 걸까요?
인간은 평생 계속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직책을 위하여나, 출세해서 장관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 왜 공부해야 할까요? …그게 인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느 때처럼 연수원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독서실에 갈 채비를 마치고 잠깐 만화나 보자는 생각에 책을 집어든 거였는데, 이 대목에서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질 못했다. 인간은 왜 공부해야 할까? 나는 대체 왜 그놈의 ‘공부’를 하러 이리도 급히 낑낑대며 독서실에 가야 하는 것일까?
난 키튼이 마지막에 제시한 저 답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게 무슨 인간의 ‘사명’인 건 아니다. 게다가 ‘왜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게 사명이니까’라고 대답해 봐야 그건 ‘해야만 하니까 해야만 한다’라고 순환논법으로 대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다’라는 저 말이야말로 가슴에 와 닿는다. 호기심, 아는 기쁨. 그것이야말로 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까.
호기심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활기 넘치게 하는지. 우리는 그걸 너무 잊고 산다.
사는 데가 바로 그 근처인지라 웨스턴돔 분수광장을 뻔질나게 왔다갔다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늘 보게 되는 건 분수를 보며 깔깔대면서 분수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이다. 일산으로 이사 오기 전, 신림동에 살면서는 주변에 온통 고시생, 대학생뿐이었지 어린아이들을 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일산에는 엄마아빠 손잡고 나들이 나온 아이들이 많은데, 아이들은 분수광장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대체 저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쉴새없이 뛰어다니고 숨 넘어갈 듯 깔깔대는데도 애들은 마냥 분수가 즐겁기만 하다. 보는 어른들이 먼저 지칠 지경이다. 내 친구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애들은 어른들 에너지를 다 빨아먹는다’라고. 그렇다. 어른들은 애들 노는 거 쫓아다니는 것도 힘들다. 애들은 아무리 해도 안 지치고 어른들만 지쳐가니, 어떻게 보면 정말 아이들이 어른들 에너지를 빨아먹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냥 어리니까, 더 젊으니까 에너지가 더 많은 걸까? 그렇지만 근력, 근지구력 어느 것 하나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훨씬 더 센데?
어린아이들은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 아닐까. 주변에 온통 처음 보는 것들, 새로운 것들 뿐이니까, 신기한 것들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하면서 매 순간 ‘아는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는 신기한 게 점점 줄어든다. 어차피 어디선가 본 거고, 들어본 거고, 해본 거다. 매사에 신기할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냉소다. ‘피, 그까짓 것’, ‘원래 그런거야’, ‘당연히 그런거지’ 라고 내뱉는 경우가 늘어갈수록, 우리는 호기심을 버리고 그 자리에 냉소를 채워넣는다. 그리고 냉소가 늘어갈수록 우리 삶의 에너지는 사라진다. 매사에 시큰둥, 신기할 것도 없고 흥미로울 것도 없으니 굳이 몸을 움직여 보고 느끼고 하고 싶은 생각이 생기질 않는 것이다. 어느새 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렇게 종일 침대에 누워 있으면 휴식 덕에 에너지가 충전이 돼야 할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누워 있을수록 더 기력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냉소는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 녀석은 무기력을 데리고 온다.
2004년, 대학에서 양창수 교수님의 채권각론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께서 어느 날인가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라는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 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미국의 천재(이자 괴짜) 물리학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쓴 일종의 수필집이었다.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 그러나 브라질의 리오 카니발이 좋아서 매년 브라질을 찾는 사람, 거기서 북 치는 법을 배워가지고는 수준급 연주자가 되기도 하는 사람. ‘물리학을 가지고 노는’ 사람. 기인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파인만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삶이 에너지로 가득차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정말 장난꾸러기 어린애 같았고 무엇보다 그는 호기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나 계속해서 등장하는 문구는 “그건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었다!!”는 그의 감탄사다. 난 바로 그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파인만에게 세상은 신기한 것들로 북적대는, 매 순간 아는 기쁨을 주는 거대한 놀이터였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런 건 몰라도 돼’라거나 ‘그런 건 필요없어’ 라는 말을 너무나 손쉽게 내뱉으면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알아야만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만 몸을 억지로 억지로 움직인다. 그렇게 ‘알아야만 하는 것’만 간신히 알아두고, ‘필요한 것’을 꼭 필요한 만큼만 하면서 산다. 꼭 알야아만 하는 것만 알고 꼭 필요한 것만 하는데도 삶이 그렇게 지치고 힘들 수가 없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뒤집어 보자. 알아야만 하는 것만 알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삶이 지치고 활력이 없어지는 것 아닐까? ‘그런 건 몰라도 돼’라는 냉소적인 태도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의 분류다. 그리고 그 분류의 기준은 저 멀리 어딘가에 놓여있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목표다. 대학입학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기 위해서, ‘임관’을 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이렇게 미래의 목표를 기준으로 앎의 대상을 분류하는 순간, 그 앎의 대상 자체가 갖는 매력은 증발한다. ‘아는 기쁨’ 따위는 싹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현재, 지금 이 순간 내가 머리를 싸매고 하고 있는 ‘공부’는 한같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수단으로 전락할 때, 아는 기쁨 대신 남는 것은 무기력과 억지로 이 순간을 버티며 핑계거리로 내세우는 ‘인내’뿐이다.
얼마 전, 38기 연수생들은 4학기 민사재판실무 시험을 치르고, 39기 연수생들은 민사재판실무 기록을 붙들고 씨름을 하던 날이었다. 친구 몇과 함께 독서실 세미나실에 모여앉아 되도 않는 주장 되는 주장 가리지 않고 대여섯 개나 항변(등)을 퍼부어 놓은 피고를 원망하며 끙끙거리다가,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한 친구 녀석이 잠깐 밖에 나갔다 오더니만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들여다보니 38기 민사재판실무 수시평가 자료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만, 어떤 사람이 독서실 폐휴지함에 38기 민사재판실무 기록더미 전체를 버리고 갔더라는 것이었다.
그 38기 연수생분의 심정은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4학기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는 안도감, 앞으로 지긋지긋한 저 기록더미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가득했을 것일 테다. 슬몃 부러움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찝찝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람에게 그 민사재판실무 기록더미는 시험을 보기 위한 수단 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 이름 모를 연수생 분은 기록뭉치에 적혀 있는 깨알같은 글자들을 졸음을 참으며, 눈을 비비며 들여다보고 밑줄을 치고 별표를 그려넣으며 보냈던 그 많은 시간들이 시험을 본 날 이후로는 다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음을 자인한 꼴이 되어 버린 것 아닌가.
그렇게 쏟은 지나간 시간들이 시험을 본 다음 날 이후까지도, 나아가 영원히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쏟는 매 순간 순간을 미래의 무엇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 자체를 위해서 써야 한다. 그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 물론 복잡하고 난해한 기록을 보면서 대체 뭐가 어떻게 즐거울 수 있냐고 당장에 반론이 들어오겠지만, 키튼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누구나 아는 기쁨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에는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새로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것은 그 앎의 대상이 분수의 물줄기가 되었든, 사법시험에서 나를 괴롭혔던 어음법이 되었든, 판결문 주문 쓰는 법이 되었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되었든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냉소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이 삶에서 진지함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재의 상황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면 그 자연스런 결과로 그 현재의 상황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게 된다.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라는 냉소적인 태도는 결국 현재에 온 힘을 다하지 않게 만든다.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진정한 성취감도 없고 진정한 아쉬움도 없다. 일이 잘 돼도 요행일 여지가 크니 진심으로 성취의 기쁨을 느끼지도 못하고, 못 돼도 언제나 변명거리가 남아있으니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도 없다. 무덤덤하고 그만큼 무기력한 삶의 연속일 뿐이다. 요즈음 팽배한 정치적 냉소주의 역시 이와 비슷한 결과를 불러오고 있다. 내가 찍질 않았으니 국회에 가서 앉아 있는 사람이 잘 해도 그건 어쩌다 그렇게 된 것 뿐이라서 정치적 성취감이 없고, 못 해도 그땐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냉소적 거리두기 탓에 비판과 개선의 노력은 자라날 틈이 없어진다.
호기심이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눈(또는 ‘프레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면, 냉소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냉소로 가득찬 사람은 의문을 품지 않고,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다.
대법원의 판례를 대하는 태도를 예로 들어 보자. 대법원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제기된 의문에 반론을 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문을 제기한다는 사실 자체에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난 이런 사람도 실제로 보았다), 의문을 제기하든 말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대법원의 판례도 여러 가능한 해석론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제기된 의문에 반론을 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의문을 가질 줄 모르는 사람은 그에 대해 반대 견해를 피력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데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네 번째 부류의 사람보다는 낫다. 화를 낸다는 건 최소한 판례의 태도에 대해 진지한 애정은 있다는 걸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아예 의문이 있든 말든 신경을 안 쓰는 사람, 즉 냉소적인 사람은 그 최소한의 진지함마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 부류의 사람에게 건전한 비판을 통해 발전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네 번째 부류의 냉소적인 사람에게는 그 가능성마저도 없다. 냉소는 무비판적 수용을 부르고, 무비판적 수용이 유행할 때에는 어떠한 발전도 없다. 만연한 냉소는 결국 영구적 답보상태만을 낳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연수원의 교육과정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는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험과 평가, 그리고 그에 따른 성적부여라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가시적인 미래의 목표가 놓여있는 탓에 아무리 애를 써도 현재의 시간은 그를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고 마는 구조적인 문제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해야 한다’에서 벗어나서 ‘왜 그런가’ 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 볼 기회 자체가 별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못내 아쉽다(검찰 사례연구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보라’고, 직접적으로 호기심에 문을 열어 준 과제가 나왔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
다시 ‘마스터 키튼’ 이야기를 하자면, 한 권 한 권 읽으면 읽을수록 이 만화는 ‘아는 기쁨’이 주는 생명력과 삶의 활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키튼은 ‘저는 아직 알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살인을 결심한 어느 학생은 동급생인 키튼이 학교 벽에서 화석을 발견하고 눈을 빛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광경에서 감화를 받아 살인을 포기한다. 어쩌면 현재를 아직 오지 않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에 담보잡히지 않고 현재 그 자체로서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가장 훌륭한 원동력이 바로 호기심이 아닐까.
거울을 바라보고 서서 스스로를 들여다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냉소란 녀석이 마음 한켠을 잠식해 들어와서는 어느새 그 그림자를 크게 드리우고 있었다.
마음 속에 들어와 앉은 냉소를 털어버려야겠다.
그러면 그 녀석과 함께 스리슬쩍 찾아와 자리잡고 앉아 있던 무기력도 함께 나갈 것이다.
빈 자리는 호기심으로 채우자.
그러면 ‘아는 기쁨’이 덩달아 찾아들 것이다. 틀림없이.
조커와 배트맨. 그들은 서로 정 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들에게 비슷한 점이라곤 눈에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다.
배트맨이 입고 있는 건 검은색뿐이다(금빛을 띠는 벨트만 제외한다면). 그리고 그 검은색 전투복은 치밀하게 계산되고 디자인된 최첨단 기술의 산물이다. 쭉 뻗은 직선과 늘씬하게 뻗은 곡선이 어우러진 배트맨의 망토와 전투복은 딱 보기에도 멋지다. 우리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황금비율, 비례. 그런 것들을 배트맨의 전투복은 잘 갖추고 있다. 잡티 하나 안 보이는 말쑥한 검은색 또한 엄숙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이 세상 모든 색깔을 섞으면 결국 검은색이 된다고 했던가. 조커는 검은색 속에 감춰져 있던 화려한 색깔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 같은 모습이다. 머리카락에선 초록빛이 돌고, 얼굴엔 새하얀 분칠을 하고 그 위에다 시뻘건 원색으로 커다랗게 비뚤비뚤한 입술을 양 볼에 죽죽 그어 놓았다. 그뿐인가. 입고 있는 옷은 원색에 가까운 보라색이고, 행여나 노란색이 자기만 빼놨다고 서운해할까 싶어서 이빨은 온통 누렇게 칠해 놓았다(칠한 건지, 안 닦아서 상한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배트맨은 고담시의 질서를 상징한다. 그는 부패와 범죄로 가득찬 무법지 고담시에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한다. 나쁜 놈은 잡아 가두고, 나쁜 놈한테 당하는 좋은 놈은 구해 주고.
인간 세계에서 법질서를 엄정하게 확립하는 데 있어 언제나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 집행자 또한 감정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아픈 어머니 병원비를 대려면 어쩔 수 없이 경찰도 갱단과 뒷거래를 하고(라미레즈 형사처럼), 그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법적 절차 같은건 무시하고 사람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협박하고 하게 되는 것이다(하비 덴트처럼).
그러나 배트맨은 사람이 아니다. 진정으로 법질서를 확립시키는 존재가 되려면 배트맨은 사람이 아니어야만 한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이미 이 점을 간파했다. 그는 말했다 : 악당들이 그 이름만 듣고 두려워할 존재가 되어야 한다 - 상징(symbol)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부패시킬 수 있고, 죽일 수 있고,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상징은 부패되지 않는다. 죽지도 않는다. 그 어떤 녀석도 상징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래서 브루스 웨인은 자기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가면을 뒤집어쓰고 정체를 숨긴 '박쥐'라는 상징으로서 범죄와 싸우기로 한다.
중요한 건 그렇게 인간성을 탈피한 상징이 된다는 것이지, 그 상징으로 뭘 택할지가 아니다. [비긴즈]에서 알프레드는 묻는다. "왜 하필 박쥐입니까"라고. 브루스 웨인의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박쥐들을 무서워하니까. 이제 내 적들도 내 공포를 함께 느낄 때다." 굳이 그 상징이 박쥐가 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거미라도 좋고 잠자리여도 그만이다. 중요한 건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법질서 그 자체, 악에 대항하는 선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에 반해 조커는 무질서 그 자체다. 그의 움직임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뭘 할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는 수수께끼다. 영화 내내 조커는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우리를 놀래키고, 반대로 우리는 그 녀석이 언제 튀어나올 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영화가 시작하는 은행강도 장면을 떠올려 보자. 조커에 의해 고용된 사람인줄만 알고 있던 가면쓴 녀석들 중 한 명이 갑자기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모두....날 더 이상하게 만든다"고 내뱉으면서 가면을 벗고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자 조커의 그 기괴하게 생긴 얼굴, 그 섬뜩한 웃음 - 사실 언제나 웃고 있는 얼굴이긴 하지만 - 이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운다. 이처럼 첫 등장에서부터 그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왔다.
고담시 시장이 하비 덴트와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창밖을 내다본 순간, 갑자기 배트맨 옷을 입은 사람의 시체가 창문에 쿵 하고 와서 부딪친다. 공포영화 보는 것처럼 관객의 심장은 떨어진다. (나와 같이 영화를 보던 친구는 심지어 두 번째 보는 것이었으면서도 이 때 의자에서 떨어질 뻔하더라ㅋ)
하비 덴트를 태운 호송차가 감옥을 향해 가는 도중, 웬 거대한 트럭 하나가 길에서 빵빵댄다. 단속을 위해 경찰관이 창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조수석에서 조커가 장총을 들고 튀어나와 경찰을 쏴 버린다.
모두가 탈출한 병원 안. 경찰관 하나가 남은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간다. 뒤돌아 서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돌리며 갑자기 경찰을 총으로 쏜다. 마스크를 벗으니 그 간호사 또한 조커였다.
조커의 등장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는 영화 내내 갑자기 나타나 관객을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도 고담시 전체를 언제나 놀라게 한다. 그 누구도 그가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에겐 규칙이 없다. 그에겐 어떠한 규범도 없다. 조커 스스로가 자신을 칭하는 것처럼, 그는 '혼돈의 사자(Agent of Chaos)'다.
질서의 사자 배트맨. 혼돈의 사자 조커.
질서 대 혼돈. 그 치열한 대결을 그린 것이 [다크나이트]일까? 조커는 체포되었고 배트맨은 어쨌든 힘겹게나마 살아남았으니, 혼돈을 없애고 질서가 승리한 것일까?
나는 [다크나이트]가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질서의 사자 배트맨, 혼돈의 사자 조커. 그리고 그 둘의 대결.
여기까지는 그렇게까지 흥미로운 구석이 없다. 나쁜놈하고 착한놈하고 싸우는 영화 한두 개 봤나 뭐. 여기서 끝이라면 [다크나이트]는 [배트맨 비긴즈]나 [슈퍼맨 리턴즈], [스파이더맨]과 다를 게 없다.
[다크나이트]가 흥미로워지는 건 바로 질서와 혼돈 사이의 관계, 즉 배트맨과 조커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부터다.
조커가 처음 갱단 두목들의 회합장소에 불쑥 나타나서 '배트맨을 죽이자'고 제안했을 때까지만 해도, 배트맨은 물론이고 관객들 모두 그것이 진짜 조커가 원하는 바인줄 안다. 다른 갱단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조커도 배트맨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다들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조커는 배트맨을 없앨 생각이 전혀 없다. 배트맨과 경찰 취조실에서 대면했을 때, 배트맨이 "날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조커는 낄낄거리며, 예의 그 광기어린 파안대소를 퍼부으며 이야기한다. "널 죽이다니?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아마도 Where would I be without you? 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 조커는 배트맨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트맨이 계속 살아 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자신과 계속 놀아 줬으면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처음 방송국에 보낸 협박 영상 - 배트맨 흉내를 내던 사람을 살해하는 동영상 - 에서 조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배트맨 때문에 고담시 시민들이 어떻게 됐는지 봐. (그리고는 카메라를 돌려 자신의 얼굴을 화면에 보여준다) 이렇게 미쳐가고 있잖아."
이 협박 영상을 보고 난 뒤 브루스 웨인과 알프레드가 나누는 대사는 더 의미심장하다.
"이건 도가 지나쳐. 갱단 녀석들이 선을 넘었어."
"주인님께서 먼저 선을 넘었지요. 저들을 너무 압박하고 코너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러자 절박해진 저들이 그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끌어들인 겁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배트맨 때문에 조커가 나타났다.
고담시에 배트맨이 나타나기 전에는 조커 또한 없었다. 조커는 배트맨의 필연적인 부산물이다.
상징화는 언제나 상징으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잔여물을 남긴다. 일견 완전해 보이는 질서체계는 언제나 그 가장 근원적인 지점에 균열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생각해 보라).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와 그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언어가 가장 대표적이다) 사이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가 '책상'이라는 말로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을 지칭할 때, 그 사물과 '책상'이라는 기호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불일치가 발생한다('책상'이라는 말은, 모든 단어가 그렇듯이, 일반개념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책상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인 것이다). 또, 내가 '책상'이라고 하면서 떠올리는 의미와 다른 사람들이 '책상'이라는 기호를 통해 떠올리는 의미는 절대로 똑같지 않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를 언어를 통해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그 언어를 가지고 완벽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더 불가능하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자신의 인식에 근거해서 조종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수많은 개념들을 통해 정치하게 짜여진 법질서를 통해 인간은 세계를 조종하려고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교과서를 통해 민법이나 형법의 해석론을 볼 때는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다가도, 실제 사례에 법을 적용할 때는 언제나 애매하고 어딘지 잘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 드는 것을 떠올려 보라).
그렇다면 우리가 질서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우리가 기호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가는 것, 하나의 체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바로 그 질서가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성을 잊음으로써, 그것을 외면함으로써이다. '책상'이라는 말로 서로 떠올리는 의미는 같지 않지만, 그 대강의 뜻은 통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차이를 잊는다(외면한다). '책상'이라는 말에는 고정된 하나의 의미만이 있는 것이라고 믿어 버린다. 그런 외면, 그런 거짓말을 통해 체계는 비로소 성립할 수 있다.
정치한 질서라 함은 곧 그러한 불완전성이 아주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 사람들이 불완전성을 너무도 잘 잊고 있는, 모두들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질서를 말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계의 불완전성, 질서 속의 균열을 언제까지고 감출 수 없다. 질서의 성립 저편에 감추어져야만 했던 잔여물들, 질서 속에 포섭되지 못한 채 남아있던 나머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생긴다. 그 잔여물들은 말 그대로 질서의 바깥에 있는 것들이기에 질서체계 속에서 그것들은 인식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음이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질서 속에 서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잔여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규칙이나 합리성을 거부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끔찍하게 공포스러운 것으로 다가온다. 바로 '혼돈 그 자체'인 것이다.
배트맨이라는 무자비하게 엄격하고 정치한 질서가 출현했다. 부패경찰은 점점 없어져 가고, 뒷골목을 주름잡던 범법자들은 이제 밤을 두려워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부패시킬 수도, 죽일 수도, 쓰러뜨릴 수도 없는 완벽한 질서가 나타난 것이다. 고담시에는 배트맨과 함께 안정된 질서가 확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한 질서체계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질서가 포섭하지 못하고 남겨둔 잔여물이 그동안 감춰져 있던 모습을 마침내 드러내고야 말았다. 언뜻 보기에 너무나도 완전해 보이는 질서체계였기에 그 균열이 나타나면서 일으킨 충격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띠끌 하나 안 보이는 완벽한 검은색 저편에 남겨져 있던 초록색하얀색빨간색노란색보라색 - 바로 조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시 말해 배트맨이 없다면 조커는 존재할 수 없다. 거꾸로 조커 없이 배트맨 또한 존재하지 못한다. 질서 체계는 일정한 잔여물을 남길 수밖에 없고 동시에 그 잔여물을 남겨야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커는 배트맨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죽일래야 죽일 수가 없다. 그리고 배트맨 또한 조커를 죽이지 못한다.
이러한 둘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바로 배트맨이 오토바이를 타고 전속력으로 조커에게 돌진해 가는 장면이다. 어느 한쪽 없이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두 존재가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날 들이받아! 날 들이받아봐!" 라고 외치는 조커를 끝내 배트맨은 오토바이로 들이받지 못한다. 마치 무슨 초자연적인 힘에 이끌린 것처럼, N극과 N극이 서로 부딪치는 것처럼 배트맨의 오토바이는 마지막 순간에 조커를 비껴가고 만다.
배트맨은 거기서 조커를 피해갈 수밖에 없다.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어길 수 없으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배트맨은 분노에 찬 신음을 흘리며 조커를 죽여 버릴지를 고민하지만, 그 때 고민하는 것은 질서의 상징 박쥐가 아니라 가면 뒤에 있는 인간 브루스 웨인이다. 감정을 사상해 낸 법질서 그 자체로서의 배트맨으로서는 그 순간 조커를 죽이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영화 마지막의 대결에서 조커를 건물에서 스스로 집어던져 놓고도 끝내 그의 발을 붙잡아 끌어올릴 수밖에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것이 배트맨과 조커의 숙명이자, 질서와 혼돈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다. 거꾸로 매달린 조커가 이야기하지 않던가.
"아마 너하고 나는 이 짓을 평생동안 계속하게 될거야..."
이처럼 배트맨이 있는 곳에 언제나 필연적으로 조커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고담시는 어찌 되는건가? 괜히 애꿎은 사람들만 계속해서 조커의 테러에 죽어나가야 하는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도무지 예측할 수도 없는 이 혼돈을 어떻게 감당해 내란 말인가? 실제로 영화에서 조커의 테러행각에 고담시는 전체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인다. 공포는 무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돈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럽다. 알프레드가 말한 것처럼, 조커는 "타협할 수도 없고, 윽박지를 수도 없고, 매수할 수도 없는 사람", "그냥 세계가 불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커'라는 혼돈은 혀를 날름거리며 고담시 전체의 질서를 뒤엎어버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질서의 '성립'이 필연적으로 혼돈을 수반한다면, 질서의 '유지'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 혼돈을 잊어버림으로써만 가능해진다. 포섭되지 못한 균열, 혼돈의 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은폐되어야 한다. 즉, 우리에겐 우리의 질서가 완전하다는 환상, 일종의 거짓말이 필요하다.
이건 비단 사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존재양식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의 행동을 낳는 욕망 체계는 실상 그 한가운데 본질적인 균열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균열은 환상에 의해 지탱된다. 사람들은 그 본질적 균열, 그 공허를 잊기 위해 뭔가 하나의 대상을 붙들고 그 대상만 쟁취하면 우리 욕망은 만족되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입학 시험만 합격하면 된다. 사시만 붙으면 된다. 취업만 하면 된다. 저 사람의 사랑만 얻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경험을 통해 알듯이, 그 어떤 대상도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대학 합격했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사시 붙었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다. 취업하면 그때부터 또 첩첩산중이다. 그 사람의 사랑을 얻었다고 해서 내 공허함이 메워지지는 않는다. 우리 삶의 근본적 무의미성은 끝내 완전히 채워지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가슴 한가운데 뻥 뚫린 구멍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하나의 목표를 붙들고 그 목표를 달성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행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대입시험이, 사법시험이 또는 취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라고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양식이 거짓말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 것이 바로 [다크나이트]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의 전작 [메멘토]였다. [메멘토]의 충격적인 결말에서, 우리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레너드가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의 삶의 전부는 바로 자신의 아내를 죽인 살인자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 살인자는 이미 잡혔으며 아내는 사실 자신이 실수로 죽였다는 것이 진실임을 레너드는 깨닫게 된다. 감당하기 힘든 진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공허와 대면한 레너드는 그 순간 자신의 단기 기억상실증을 이용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엉뚱한 사람이 살인자라고 메모를 해 둔 것이다. 그리고는 말한다. '거짓말을 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이제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인 레너드는 조금전까지 있었던 일은 다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해 둔 메모를 보고는 정말 그 사람이 살인자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렇게 레너드는 영원히 환상 속의 살인자를 쫓아가며 살아갈 것이다(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크나이트]로 돌아와 보자. 레이첼이 죽고 난 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브루스 웨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다. 알프레드가 아침식사를 들고 다가온다. 아침식사를 담은 그릇에는 레이첼이 미리 써 둔, 브루스 웨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놓여 있다. 편지에서 레이첼은 브루스 웨인을 떠나겠다고, 배트맨이 없어진다 해도 그에게 가지는 않겠다고 써 놓았다. 알프레드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브루스 웨인이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뭐에 홀린 사람처럼 내뱉는다. "레이첼이 기다려준다고 했었는데..."라고. 그 순간 알프레드는 편지를 도로 가져간다. 그리고 그 편지를 불태워 버린다.
이것이 바로 브루스 웨인에게 필요한 거짓말이다. 레이첼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언젠가 배트맨을 그만두면 사랑하는 레이첼과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는 것.
이는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어야 브루스 웨인은 계속해서 가면을 쓰고 배트맨 짓을 할 수 있다. 브루스 웨인이 바라는 것은 배트맨 없는 '정상적인 삶'이다. 그런 정상적인 삶이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야만 힘든 배트맨 생활을 하루하루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미 브루스 웨인에게 배트맨을 그만두고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건 불가능할 지 모른다(레이첼 역시 영화에서 그 점을 지적했다). 고담시에 배트맨은 영원히 필요하다. 브루스 웨인에게 다시는 정상적인 삶이란 없다. 그러나 그 점을 깨닫는 순간 브루스 웨인은 삶의 의미를 잃고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레드는 편지를 태워버려야만 했다. '정상적인 삶'이 손 닿을 거리에 있다는 거짓말이 브루스 웨인에게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고담시 사람들에게는 영웅 하비 덴트라는 거짓말이 필요하다. '하비 덴트는 죽는 순간까지 타락하지 않고 악에 맞선 영웅이었다. 나쁜 놈은 배트맨이다. 그녀석 때문에 일이 다 잘못됐다.'라는 것짓말, 바로 이 거짓말 때문에 조커라는 혼돈을 은폐하고 비로소 고담시의 질서는 유지될 수 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것은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다(고담시 사람들이 왜 조커를 탓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조커가 바로 혼돈 그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는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배트맨은 다르다. 그는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자,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녀석이다. 게다가 아무도 그의 실제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 그는 그냥 상징에 불과하기 때문에 - 거꾸로 그 녀석에게 뭐든지 덮어씌울 수 있다. '이게 다 배트맨 때문이다'라고. 마지막 장면에서 배트맨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난 고담시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될 수 있다."
마지막 장면, 배트맨은 자기 탓이라고 거짓말을 하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만으론 부족하다. 때론 사람들에겐 진실 이상이 필요하다..." 그렇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선 진실이 아닌 진실 이상, 환상이 필요한 것이다. 비난을 감수하기로 결심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함으로써 배트맨은 자기 몸으로 조커가 열어 놓은 균열을 틀어막으면서 고담시의 환상을 완성시킨다.
이제 비로소 고담시 사람들은 패닉상태에서 벗어나 질서 속에서(비록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해도)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질서의 불안전성이 잠깐잠깐 드러나는 순간은 계속 있을 것이다. 범죄는 여전히 발생할 것이고,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고담시가 혼란의 도가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다 배트맨 때문이다'라며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으니까. 배트맨만 잡으면 된다고 믿을 테니까.
(그러나 우리는 고든 경찰청장이 결코 배트맨을 잡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고든은 배트맨을 잡지 않아야만 한다. 배트맨이 체포되는 순간 고담시의 환상 또한 깨져버리니까. 배트맨은 영원히 도망다니면서,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고담시의 모든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뒤집어써 줘야 한다.)
고담시의 질서 그 자체인 배트맨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 질서를 파괴하는 무법자인 것처럼 거짓말을 해야만 고담시의 질서를 유지시킬 수 있다. 그래야만 질서에 대한 근원적이며 해결 불가능한 위협인 조커를 은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배트맨은 결코 '백기사'가 될 수 없다. 그는 고담시를 지탱해 주는 기사지만, 스스로 모습을 숨김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사, 바로 '암흑의 기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