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클 잭슨에 대해서, 음악과 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영화를 보여 줬다고 치자.
당장에 그 사람은 눈을 휘둥그래져서 이렇게 물을 것이다.
"저 사람 대단한 사람이지? 한 가닥 하는 사람이지?"
노래 좀 한다고 뻐기는 자, 춤 좀 춘다고 으스대는 자, 공연 좀 해 봤다고 재는 자.
그 시건방진 입을 다물라.
이런 영화로나마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그가 없어서 너무나 안타깝다.
This Is It.

금방 [트랜스포머 2 : 패자의 역습] 관람을 마쳤다.
이렇게 요란하게 때려 부수고 시끄럽게 쿵쾅거리는데도 지루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그게 감정이고 또 감동인 거지, 억지로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는다고 감정이 생기는 게 아니다.
메간 폭스한테 핫팬츠 입혀 놓고 일부러 야한 앵글로 줌을 당긴다고 섹시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요, 황혼을 배경으로 깔고 슬로모션으로 폭발 장면을 잡는다고 웅장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고, 쓰러진 주인공 주변에 침통한 표정으로 오열하는 가족, 애인, 친구들을 늘어놓고 (또) 슬로모션으로 그 주변을 빙빙 돌린다고 감동이 생기는 게 아니다.
볼거리 뿐인 영화다.
끝내주게 멋진 장면은 분명 군데군데 등장하지만, 그뿐이라면 두시간 반이 아니라 십분짜리 뮤직비디오로 만드는 게 이래저래 경제적일 터.

웨돔 분수광장 바닥을 장식했던 범블비
나는 봉준호가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현 상황과 문제점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연출한 영화를 나는 세 편밖에 보지 못했다. [살인의 추억], [괴물] 그리고 최근 개봉한 [마더].
그러나 위 세 편의 영화에는 일관된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나는 그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그 문제의식은 바로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이다.
봉준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언제나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그들 혼자서(마더), 또는 둘이서(살인의 추억), 또는 일가족만으로는(괴물) 해결하기에 너무나도 벅찬 것들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문제들은 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문제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며, 그 해결을 위해 사회적인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연쇄강간살인범을 잡는 것, 그것은 두 명의 형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현서를 납치해 간 것은 한강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봉준호의 비유를 그대로 따라간다면_여기엔 미군이 한몫했다)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은 비단 현서뿐만 아니라 모든 서울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가 나서서 괴물을 잡아야 옳다.
여고생 살인사건의 진범을 잡는 것 또한 마더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나서서 진범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개개인이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시스템은,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연쇄살인범의 신발자국과 같은 중요한 증거는, 현장보존과 같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절차 미숙 때문에 무참히 사라져 버린다. 또 한 사람의 희생자를 막기 위해 경찰력 증원을 요청하지만, 시위 진압에 이미 경찰력을 모두 동원한 상부에서는 증원 요청을 거절한다. 수사 시스템은 군홧발로 엄한 피의자를 두들겨패는 식으로만 작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식의 시스템 운용은 무수한 희생자만을 낳고, 문제 해결에는 실패한다. 너무나도 범인을 잡고 싶었던 형사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혐의를 받던 바보 피의자는 자살한다. 군홧발로 그 바보 피의자를 두들겨패던 형사는 그 군화를 신을 오른발을 잃고 만다.
국가는, 느닷없이 나타나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괴물을 잡는 것보다는, 명확히 검증도 되지 않은, 괴물이 보유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그토록 방역에는 결벽증과 같은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작 괴물을 잡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괴물을 잡는다고 뿌린 오렌지색 가루는, 그 오렌지색 가루 살포와 정부의 대응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던 사람들을 진압하고 있던 경찰관의 목숨은 앗아가지만 정작 괴물을 죽이지는 못한다. 괴물을 죽이는 건 현서네 가족이다. 그나마도 이미 현서는 죽은 뒤에. 심지어 그 난리를 겪고 나서도, 현서 대신 새로 생긴 아들을 지키는 건 국가가 아니다. 여전히 송강호는 총을 곁에 두고 스스로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한다(마지막 장면).
[마더]에서도 경찰, 변호사, 검사 등 진범을 잡기 위해서, 그리고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 마련되어 있는 사회적 시스템은 전부 다 실패하고 만다. 경찰은 바보 피의자를 두고 엉터리 자백을 받아내고, 변호사는 상담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연줄을 이용해 유야무야 사건을 처리하려 한다. 검사는 변호사가 사 주는 술을 처먹고 술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을 뿐이다. 피해자의 주변 인물을 조사하고, 피해자의 행적을 추적하는 등 응당 수사기관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국가에 의해 수사권이 부여되어 있는 수사기관이 아니라, 아무런 권한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마더 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문제의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희생자들은 생겨난다. 모든 걸 다 제껴놓고 나의 안위를 위해 고군분투해줄, (한국의) 엄마가 없는 어떤 사람, 그리고 마더까지도. 마더와 도준이의 밥상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위 세 영화에서 모두, 주인공들은 정말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 노력한다.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그러나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없다. 도와 주라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혀 놓은 사람들은 그들을 돕지 않는다.
정말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그리고 위 세 영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은,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의 말을 통 들어 주질 않는다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 다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고, 자신의 편견만으로 대화를 이끄는 사람들.
송강호가 [괴물]에서 마취약의 기운과 처절하게 싸우면서 억지로 입을 움직여 간신히 내뱉던 말이 뭐였는지 기억나는가? "왜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 주는거야"였다. [괴물]을 두고 반미영화네 뭐네 열심히 떠들지만, 내게는 저 말이 가장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렇다. 지금 여기,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바로 그런 곳이다.
어느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엄마, 아무도 믿지 마."). 문제 해결을 혼자 힘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사회.
그렇게 타인에 대한 신뢰가 증발하고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대한민국에서 나를 지켜 주는 건 결국 가족 뿐이다.
그리고 가족들끼리 지켜 주는 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엄마가 아들 지켜주는 때이다. 기묘하게도 [괴물]에선, 바로 이 가장 강력한 연대관계가 쏙 빠져있다. 엄마가 아닌 사람들(아빠, 할아버지, 삼촌, 고모)이 아들이 아닌 사람(여자아이)을 지키내기 위해 힘을 합친다. [괴물]의 가족들보다 [마더]의 엄마가 결과적으로 조금이나마 더 문제해결에 성공하는 건 우연일까? 그게 우연이든 감독의 의도든 간에, 우리나라에서 아들 살리려고 덤비는 엄마를 당할 사람이 없는 건 분명하다.
개인 스스로, 또는 가족들끼리 문제를 해결하게끔 내버려 두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결국 문제 해결에 실패하고 만다. 그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태생부터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문제이기도 하고, 애초부터 혼자 힘으론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혼자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도 힘을 합쳐서 해결하기 위해,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는 '국가'란 놈을 만든 것 아닌가? 연쇄강간살인범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납치된 딸을 무사히 되찾기 위해, 아들이 별다른 증거도 없이 살인범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경찰, 검찰, 군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만들고, 무죄추정의 원칙이니 신체의 자유니 하는 것을 헌법에 적어 놓은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놓은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우리가, 엄마가, 아빠할아버지고모삼촌이 나서야 하는가? 그것도 무력하기 짝이 없는 공기총, 양궁, 화염병, 쇠파이프를 들고서? 대포와 탱크, 기관총과 미사일은 어디 갔는가?
봉준호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문제를 던지고 있다.
[살인의 추억]은, 시스템이 처참하게 실패했던, 명백하게 국가가 사람들을 위해 작동하지 않던 독재정권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봉준호가 서 있는 시점은 그 때가 아니라 지금이다. 경찰 일을 그만두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송강호의 모습을 영화 막판에서 보여 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제목에 '추억'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일종의 회고담이다. 봉준호는 그 시절을 오늘날에 서서 되돌아보고 있다.
거기서 그냥 끝났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달라졌으니까, 독재정권은 없어졌으니까, 더 이상은 군홧발로 피의자를 두들겨패는 식으로 피의자를 신문하지는 않으니까, 이제는 법의학도 발전하고 수사기법도 과학화되었으니까, 봉준호는 그저 과거 우리 사회가 지녔던 문제점을 되새겨 보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말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괴물]이 나왔다.
[괴물]에서 봉준호는 말한다. 달라지지 않았다. 독재정권이 없어졌을지는 몰라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키게끔 내모는 곳이다. 사람들이 한강에 뛰어들게끔 내모는 사회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내몰다간, 뛰어내린 사람들을 먹고 자란 괴물이 한강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그나마도 이제껏 그 괴물을 잡은 것은 화염병과 쇠파이프였다. 그러나 그런 식의 대응은 너무나도 희생이 크지 않았던가. 다음에 괴물이 튀어나오면, 그 때는 어쩔 것인가. 이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살인의 추억]을 [괴물]보다 더 재미있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백 년 후 이 시대의 진정한 고전으로 평가받을 만한 영화는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대의 문제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영화, 그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영화('재밌게 잘 찍은 영화'라는 점도 분명히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괴물의 CG가 어설프니 어쩌네 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부차적인 문제다. CG의 질은 영화의 훌륭함을 결정하는 데 아주아주 미약한 영향력밖에 없다(어이 심감독님, 당신한테 하는 이야깁니다).
[마더]는, [괴물]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의 큰 틀을 따라가면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고유한 상황 - 엄마와 아들 간의 강력한, 유별난 유대관계 - 을 새로이 추가해서 보여 준다. 엄마와 아들 간의 유별난 유대관계가 정확하게 어떠한 사회적 문제상황을 구성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길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의 특징적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낳는 현상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한번 고민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마더] 또한 훌륭한 영화다.
봉준호의 문제의식은 결국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나타나는 상황이 제기하는 문제와 동일한 것이다.
개인의 초인적 노력을 강요하는 사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 그래서 피곤하고, 살기 힘든 사회.
[우생순]은 그러한 사회를 기적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헤쳐 나가는 극히 소수의 영웅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영화다.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의 눈물과 땀이 얼마나 멋있는지.
한편 봉준호는 그러한 사회 속에서 실패하고 마는 나머지 절대 다수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어쩌지 못하고 마는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인지.
[마더]를 보면서 나는 계속해서 [괴물]이 떠올랐고, 또 [바벨]이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가. 그들의 말을 우리는 과연 듣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서로가 하는 말을 조금만 더 귀담아 듣는다면, '그럴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면 좀 더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도 신뢰의 끈으로 묶고, 그렇게 해서 거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을 위하여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허위채무부담과 가등기의 종류
허위채무를 부담하고 가등기를 경료하여 주는 경우, 부담하는 허위채무의 종류에 따라서 경료되는 가등기의 법적 성질이 달라진다. 허위로 부동산에 관한 매매계약을 가장하여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부담하는 경우에는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 보전을 위한 가등기(이하 ‘보전가등기’라 한다)를 경료하게 될 것이고, 허위로 금전채무를 부담하는 경우에는 채무 담보를 위한 가등기(이하 ‘담보가등기’라 한다)를 경료하게 될 것이다.
2. 가등기 경료행위가 ‘허위양도’에 해당하는지 여부
허위로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그에 따른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을 보전하기 위하여 보전가등기를 경료한 경우, 본등기가 경료되지 않은 이상 부동산의 ‘양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가등기를 경료하는 행위는 강제집행면탈죄에서 말하는 ‘허위양도’에 해당할 여지는 없으며 오로지 ‘허위의 채무 부담’에 해당할 뿐이다. 따라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가등기 경료행위가 아니라 가등기의 등기원인이 되는 허위채무부담행위이다.
3. 허위채무부담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를 구성하기 위한 요건
그런데 허위로 채무를 부담하는 행위가 언제나 강제집행면탈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재산을 은닉, 손괴, 허위양도 또는 허위의 채무를 부담하여 채권자를 해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즉, 허위로 채무를 부담하는 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허위채무부담행위가 실제로 채권자의 강제집행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허위채무부담행위가 채권자의 강제집행에 해를 끼치는지 여부는 부담하는 허위채무의 종류와 채권자의 채권의 종류에 따라서 달라진다.
즉, 만약 채권자의 권리가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인 경우, 채무자가 허위로 금전채무를 부담하고 이를 담보하기 위하여 담보가등기를 경료하여 주었다고 하더라도, 채권자의 권리는 이전등기청구권이며 금전채권이 아니므로 채무자가 허위의 금전채무를 부담한 사실만으로는 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어떠한 침해가 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대법원 1982. 5. 25. 선고 81도3136 판결 참조).
결국 허위채무부담행위(그리고 가등기를 경료하는 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를 구성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채권자의 권리와 허위로 부담한 채무의 종류에 따라 발생하는 네 가지 경우의 수를 구분하여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4. 유형별 검토
가. 채권자의 권리가 금전채권인 경우
(1)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한 경우(보전가등기 경료)
(가) 판례 : 없음
(나) 검토
단순히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한 것만으로는 금전채권의 강제집행에 어떠한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없다(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해 주기까지 한다면 채무자의 책임재산을 감소시켜 강제집행에 실질적인 해를 끼치게 될 것이나, 이 경우는 허위양도에 의한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므로 처벌이 가능하다). 그러나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보전을 위한 보전가등기까지 경료한 경우에는 금전채권의 강제집행에 장애를 발생시킨다고 할 수 있다. 보전가등기가 경료된 이후에 강제경매 개시등기가 이루어지고 경매절차가 진행되는 경우, 보전가등기는 경매로 부동산을 취득한 매수인이 인수하는 부담이 되고, 따라서 보전가등기의 존재는 경매목적물의 가격을 산정하는 데 있어서도 고려된다. 그러므로 보전가등기가 존재하는 경우 경매절차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매수를 꺼리게 되고, 결국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서 경매가 이루어지는 결과가 되어 채권자들이 채권의 만족을 제대로 얻지 못하게 될 위험이 크다.
문제는 이처럼 허위채무를 부담하는 행위와 그에 따라 가등기까지 경료하는 행위를 달리 취급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인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보전가등기가 경료되었는지 여부에 따라서 금전채권의 강제집행에 미치는 효과가 현저히 다르므로 양자를 구별해서 취급하는 것이 충분히 설득력을 얻는다. 대법원 또한 “피고인이 위 판시와 같은 허위의 금전채무를 부담한 사실만으로는 위 채권자들의 지분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어떠한 침해가 된다고 볼 수 없다. 다만 위 허위채무부담에 따라 경료한 가등기가 위 채권자들의 권리실현에 장애가 된다면 별문제이나…”라고 설시하여 단순 허위채무부담행위와 허위채무부담에 이은 가등기 경료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의 성립여부와 관련하여 달리 취급될 수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채권자의 권리가 금전채권인 경우, 허위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부담하는 행위만으로는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으나, 소유권이전등기를 허위로 부담하고 그 보전을 위하여 가등기까지 경료한 때에는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한다고 보아야 한다.
(2) 금전채무를 허위로 부담한 경우(담보가등기 경료)
(가) 판례 :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한다.
대법원 1996. 1. 26. 선고 95도2526 판결, 대법원 2008. 6. 26. 선고 2008도3184 판결.
(나) 검토
금전채권에 의한 강제집행은 채무자의 재산에 대한 강제경매 등의 환가절차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채무자에 대한 다른 채권자들도 경매절차에 참여하여 배당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므로 허위로 금전채무를 부담할 경우 결과적으로는 정당한 채권자가 배당받을 금액이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허위로 금전채무를 부담하는 행위는 금전채권의 채권자의 강제집행을 해할 위험이 발생한다. 만약 허위의 금전채무부담행위에 더하여 그 채무를 담보하기 위한 담보가등기까지 설정하는 경우, 담보가등기는 저당권과 마찬가지로 우선변제권이 인정되기 때문에 채권자의 강제집행에 해를 끼치는 정도가 더 크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허위채무부담’ 요건과 ‘채권자를 해할 것’의 요건이 모두 충족되므로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한다.
나. 채권자의 권리가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인 경우
(1)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한 경우(보전가등기 경료)
(가) 판례 :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 위 판시중의 가등기는 그것이 비록 그 판시와 같은 통모에 의하여 가장한 매매예약을 원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할지라도 … 위 가등기에 순위보전의 효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술 매매예약상의 청구권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던 만큼 이를 직접적으로 甲(채권자)의 그 판시와 같은 청구권에 기한 강제집행을 불능케 하는 사유에 해당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바이니…” (대법원 1967. 12. 18. 선고 67도1166 판결)
(나) 검토
소유권이전등기의무의 강제집행을 면탈하기 위하여 타인에게 부동산을 허위로 매도하고(이중매매 상황이 된다) 그 타인에게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 보전을 위한 가등기를 경료하여 주었다고 하더라도, 본래의 채권자는 자신의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에 기한 강제집행을 완료할 수 있다. 즉, 채권자는 소유권이전등기청구소송에서 승소확정판결을 받아 그 판결을 이용하여 단독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할 수 있으며, 타인 명의로 보전가등기가 경료되어 있는지 여부는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허위채무부담’ 요건은 충족되나 ‘채권자를 해할 것’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이후에 가등기에 기한 본등기가 경료된다면 채권자 명의의 소유권이전등기는 직권 말소되겠지만, 그 경우에는 본등기 경료행위를 허위양도에 의한 강제집행면탈죄로 처벌하면 될 것이다.
(2) 금전채무를 허위로 부담한 경우(담보가등기 경료)
(가) 판례 :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채권자인 소외 甲의 권리는 이 사건 토지의 1382/3951 지분에 대한 이전등기청구권이며 금전채권이 아니므로 피고인이 위 판시와 같은 허위의 금전채무를 부담한 사실만으로는 위 채권자들의 지분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어떠한 침해가 된다고 볼 수 없다. 다만 위 허위채무부담에 따라 경료한 가등기가 위 채권자들의 권리실현에 장애가 된다면 별문제이나 가등기는 본래 본등기를 위한 순위보전의 효력밖에 없는 것이므로 가등기가 경료된 것만으로는 위 채권자들의 지분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대법원 1982. 5. 25. 선고 81도3136 판결)
(나) 검토
위 대법원 판결의 설시와 같이, 채권자의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에 대한 강제집행은 채권자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하는 것으로 완료되므로 채무자가 허위의 금전채무를 아무리 부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의 강제집행에 대한 장애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채권자를 해할 것’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옷가게에 들어가서 청바지를 고를 때 보는 건 일단 두 가지다.
먼저 색깔과 워싱처리된 무늬를 포함한 모양새를 본다. 그리고 나선 마음에 드는 녀석은 가격표까지 본다.
가격까지 마음에 든다면 - 가령 "디젤인데 50퍼센트 세일"이라거나 하면 - 입어보게 사이즈를 찾아 달라고 점원에게 물어 본다(혹자는 캐시미어라면 가격조건은 아예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아무리 걸려 있는 걸 보고 마음에 들어도, 입어 보고 난 뒤에까지 마음에 드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정말 간혹이지만, 입어 보고 나서 단순히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그래바로이거야"라는 기분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런 "그래바로이거야" 청바지라고 하더라도, 키는 작으면서 작은 키에 비해 허리사이즈는 크게 입는 나로서는 바지 길이를 줄여 입어야 한다. 잘려나간 바짓단은 도로 이어 붙일 수 없는 일이기에 수선을 맡길 때는 길이를 좀 적게 줄이게 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한 번 줄여 입고 다니다가 또 한 차례 수선을 맡겨야 하는 일도 발생한다.
길이까지 딱 좋게 줄여서 줄기차게 입고 다니다 보면, 그 바지를 입는 요령이 쌓인다.
배불리 먹었을 때는 벨트를 한 칸 풀어서 채우고, 야트막하고 폭이 좁은 캔버스화를 신을 때는 끌리지 않게 한 칸 조여서 채운다. 길이가 긴 티셔츠에 맞춰서 헐렁하게 입을 때는 내려 입고, 내려 입었다간 허리가 너무 길어 보인다 싶으면 좀 올려 입는다(그러나 어지간해선 허리에 맞춰 입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요령이 쌓인 상태에서 계속 줄기차게 입고 다닌다. 그러면 청바지가 몸에 적응하는 건지 몸이 바지에 적응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옷감은 데님인데도 흡사 츄리닝을 입고 다니는 것처럼 편하기 그지없는 상태가 된다.
드디어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은 궁극의 경지에 도달했나 싶으면, 바로 그 순간
바지가 해져서 찢어져 버리고 만다. 원래부터 찢어서 판 바지가 아니었으니 찢어진 게 보기 좋을 리 없다.
거 참. 요새 바지는 옷감도 튼튼한 걸로 만들텐데 내가 험하게 입는 건지 아니면 불량품인 건지.
그러고 나면 다시 "그래바로이거야" 바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아니면, 그냥 찢어진 데를 수선해서 입고 다닐까?
헌재 2004. 12. 16., 2003헌가12, 판례집 제16권 2집 하, 446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제3조 제2항 위헌제청
"...특정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의 필요성이 아무리 높고 범죄행위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고조된 상태라 하더라도 형법의 기본원칙인 죄형의 균형성을 무시하면서까지 형량을 높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형벌이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잔인하면 일시적으로는 범죄 억지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중벌에 대해 면역성과 무감각이 생기게 될 뿐이고, 나아가 범죄예방과 법질서 수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법질서의 영속성과 안정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뿐이다."
"일찍이 몽테스키외는 “모든 이완의 원인을 살펴보면 이완은 범죄를 처벌하지 않았던 것의 결과이지 형벌을 경감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형벌을 받아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폭정의 결과이다. 폭정은 악당에 대해서나 정직한 사람에 대해서나 동일한 형벌을 과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잔혹한 형에 의해서 사람들이 억압되어 있는 나라가 있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대부분 정부의 폭력의 결과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한 정부는 이런 형을 가벼운 죄에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중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는 규범준수를 담보할 것으로 기대되는 요소로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제재의 양 내지 강도”(Sanktionshöhe)가 아니라 “제재의 개연성 내지 가능성”(Sanktionswahrscheinlichkeit)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즉, 규범을 위반한 경우에 제재가 가해질 개연성 내지 가능성이 높을수록 규범준수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형사특별법은 형법전이 미처 범죄로 파악하지 못했던 신종 범죄의 신속한 규율이라든가 일정 영역에 있어서 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인 규정을 둘 필요성이 있는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제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법률의 철저한 집행을 통하여 범죄를 억지하는 것이 아니라 중형을 규정한 법률의 제정을 국민들에게 홍보함으로써 위하를 통한 범죄의 억지를 꾀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는 폭처법을 포함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형사특별법이 일반법인 형법에 규정된 범죄의 형가중만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중벌주의가 언제나 부정적인 효과만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중벌주의에만 의존하는 형사정책은 문제가 있다. 폭처법의 경우 범죄발생시간이나 장소, 수단, 전과, 상습성 등에 따른 형벌가중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에 대하여 가중처벌하는 것이 반드시 특별법 제정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차이는 그 차이가 중대하지 않는 한 법정형의 범위내에서 해결할 수 있고, 만일 법정형이 이들 범죄의 다양한 유형을 차별화하여 적용하기에 한계가 있다면 법정형을 강화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멋진 글이다.
헌법재판소 실무수습 과제를 하면서 찾아 본 결정문인데, 읽다가 감동해버렸다.
헌재 결정문을 읽으면서 감동한 건 행정수도특별조치법사건(관습헌법사건)에서 전효숙 재판관이 쓴 반대의견 이후로 처음이다.
앞으로 감동적인 결정문이 많이 나오길 기대해본다.